• '달인'의 공통점, 손에 남겨진 상흔들
    [TV 디벼보기] 생활의 달인, 진보정치도 달인이 많아지길
        2012년 11월 08일 10:1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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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으면, 입을 벌리고 넋을 놓고 볼 때가 많다. 귀신같이 위조지폐를 찾아내는 사람,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동안 불량을 찾아내거나, 한치의 오차도 없이 기계만큼 정확한 일을 해내거나, 혹은 엄청나게 빠른 손놀림으로 눈을 감고도 그 일을 해내는 ‘장이’의 위대함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 능력의 한계는 어디까지 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특정 한 분야에서 어떤 ‘장이’가 된다는 것은 진심으로 존경과 찬사를 받을만한 일이다.

    그 존경과 찬사는 한 인간이 어떤 한 분야에서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묵묵히 수십년의 세월을 스스로와 싸우고, 또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임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수십 년의 경력을 쌓는 동안 얼마나 많은 괴로운 시간들이 있었는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괴롭다. 그들에게도 초짜의 어설픈 시절이 있었고, 셀 수도 없는 상처와 자아와 싸우며, 때로는 엄청난 실패를 각오하면서 그 경지에 도달했을터이다. 시간이 켜켜이 쌓이고 쌓여, 아주 고되고 고된 하루가 쌓여 지금의 ‘달인’을 만들었을 터이다. 그들에게 손에 남겨진 상흔은 영광의 훈장이 되었고, 자신에 대한 도전에 대한 승리감으로 점철된 과거가 되었다. 그래서 인지 때론 그들의 얼굴에서 자부심마저 느껴진다. 이제는 ‘추억’으로 남겨진 상처를 보듬으며, 자신의 일에 만족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부러운 장면이다.

    종종 ‘달인’의 묘기에 가까운 기술을 보면서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엇하나 제대로 끈질기게 해본 적도 없고, 쉽게 포기해버린 적도 많았고, ‘난 안될 거야’ 라고 지레 겁먹고 물러선 적도 많았다. 반성컨데 이정도만 하자라는 말로 한 발 물러섰고, 내 한계를 시험해 본다거나 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자신의 분수를 아는 인간이라는 말로 적당히 눙치고, 남들보다 아주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인생이 편하다는 기조로 살아온 것도 사실이다. 다치고 싶지 않았고, 좌절하고 싶지 않았다는 변명도 했다. 그저 호기심만 많아서 이것저것 손만 대고, 하나에 몰입해본 적이 없으니 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끙끙 앓았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은 무엇이고,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또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지금도 동일한 고민에 종종 시달린다. 결국 나는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할 줄 하는 것이 딱히 없는데다 뭐 하나 열심히 하는 성격도 아니라는 진지한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되고야 만다.

    여튼, 이 생활이 달인을 보고 있노라면 인생이 부끄러워 지는 것은 사실이다. 누가 알아주는 일만 하고 싶어했던 알량한 욕심마저도 낯뜨거워진다. 그러면서도 어디 한 구석에서 조용히 반발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청계천 어느 허름한 공장에서 실을 고르는 달인이 된 50대 아저씨, 눈을 감고도 미더덕을 까는 아줌마,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프레스 기계 앞에서 철판 구멍을 뚫는 청년, 이 거대한 기계 속에 기꺼이 톱니바퀴가 된 자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포디즘이 낳은 인간 기계화의 정점. 포디즘이라는 비인간적 시스템은 인간의 능력을 어디까지 극대화 하여 기계화 할 수 잇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라는 저 속 깊은 곳에서의 알량한 반발도 생긴다.

    그들은 여전히 먼지 풀풀 날리는 공장에서 마스크도 없이 ‘달인’이라는 이름으로 땀을 흘리며 공장을 누빈다. 저 위험한 프레스에 제대로된 방호시설도 없이 철판을 밀어넣고, 침침한 조명에서 하루 종일 레이스를 보며 불량을 찾고, 하루 종일 서서 물건을 포장한다. 그들은 ‘달인’이니까! 무언가 위험해 보이는 상황에 그들은 ‘고도의 숙력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내몰리는 것은 아닐까. 초고압의 모래 스프레이가 나오는 공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청바지를 밀어넣는 모습이라니. 그들의 임금은 얼마나 될까. 그들의 ‘숙련 노동’에 대한 댓가는 제대로 받고 있는 걸까. 인생에 대한 반성과 함께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이 사회에 대한 짜증도 어쩔 수 없다. 물론 그들은 누군가 대접해주지는 않지만 오랜시간 동안 남들보다 훨씬 숙련된 지금의 모습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더 좋은 대우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이프로그램에는 ‘요리사’들이 그런 숙련 노동자들보다 더 종종 등장하고 있다. 우동의 달인이라거나 철판요리의 달인들이 대결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주곤 하는데, 어쩌면 이제 그런 ‘장이’들을 찾기 어려워져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면, 문득 정치에도 ‘달인’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개인적인 것이지만 나는 ‘있다’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오래 정치를 하신 분들이 훨씬 정치적 감각도 좋고, 노련한 것은 맞다. 하지만 어쩐지 정치라는 분야는 ‘달인’이 되는게 별로 좋아보이지 않는다. 무언가 검은 음흉한 냄새가 나는 것 같은 구린 기분이다.

    처음 진보정치가 국회에 진출했을 때 진보정치는 ‘달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외에서 갈고 닦은 내공은 때로는 좌충우돌하며 적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그때 진보정치는 서툴렀고, 어설펐지만 그래도 많은 것들을 남겼다. 좋든 좋지 않든 남긴 것들 중에는 내부에 축적된 것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진보정치는 애늙은이 같다. 실패와 상처만 가득 안고, 어쩌면 나의 과거 모습처럼 상처와 도전앞에서 주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진보 정치의 달인’이 많아지길 바란다. 진보정치는 더 노련해지고, 더 숙련된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진보정치는 적지 않은 시간을 앓고, 또 서로에게 상흔을 남기고, 때로는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자아와의 싸움이었다. 빛나지 않는 자리에서의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일이었고, 하루하루가 별 진전없는 무의미한 것 같은 날도 있었다. 진보하지 않는다는 좌절, 어제 벌어졌던 일과 다르지 않은 오늘, 달라진 것도 없는 것 같은 회한,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은 그대로 있는 것 같다는 실망이 하루하루를 메꿔 여기까지 왔다.

    진보정치는 여전히 ‘달인’이 아니다. 아직도 지리한 스스로와의 싸움 중이다. 솔직히 말하면 어디까지가 진보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모든 것이 혼돈스럽고, 이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누군가 내게, 혹은 내가 누군가에게 남긴 상처는 꽤 오랜시간 우리를 잠식할 것이라는 불안감은 사그러들지 않는다.

    ‘달인’의 공통점 중 하나는 손에 남겨진 수 많은 상흔이다.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상처를 서로에게 남겨야 ‘달인’이 될 수 있을까. 안개처럼 막막한 현실에서 여전히 희망을 갖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진보정치인들이 더 많이 늘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아주 막연한 기대 뿐이다. 때론 실망도 했고, 외면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고, 버리고 떠나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다. 지긋지긋하다못해, 두번다시 이 공간과 연을 맺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버리겠다는 결심도 몇번이나 했다. 지금도 그런 이들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누가 진보이고, 무엇이 진보정치인지에 대한 정체성 조차 흔들리는 이 척박한 살이 속에서 더 많은 능력있는 ‘진보정치’가 늘어나길 바란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이 혼돈의 시기가 지나고 우리가 더 좋은, 더 괜찮은 진보정치를 갖게 되면 아주 조금은 뿌듯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의 상처가 언젠가는 우리가 여기까지 오기까지 겪었던 ‘추억’으로 남겨질 수 있기를 바란다. 자신을 시험하는 하루가 메워지다 보면 언젠가 우리도 ‘좋은 진보 정치’를 가질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희망은 때론 고문이며, 마약이라 할지라도, 현실을 버티게 하는 힘이다.

    필자소개
    [체르노빌 후쿠시마 한국]의 저자, 은근 공돌 덕후 기질의 AB형 사회부적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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