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능성 확인한 2000년 그리고 2012년
    [아빠의 현대사 41-3] 새 세상의 꿈, 민주노동당 창당 ③ 부끄러운 고백 ‘여성 할당제’
        2012년 05월 27일 10: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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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없이 뇌까렸던 말들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되돌아온다./ 무덤 속에/ 오, 우리를 덮어주고/ 우리를 잠재우는/ 헛된 기념물들이여./ 자, 이젠 굴복하자./ 어둠이 밀려오는 소리 들린다.” (김형영 시, [․․․ 에게] 중에서)

    민주노동당의 창당 준비는 두 차례에 걸친 진보정당 창당 원탁회의를 개최하여 노동, 농민, 빈민, 지식인, 여성, 청년, 학생 등 각 부문 진보진영의 참여를 추진하고 각 지역과 민주노총 소속 노동조합에서 창당 발기인을 조직하면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1999년 8월 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했었다. 당을 만들면서 여러 가지 쟁점들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여성할당제’였다.

    민주노동당 창당대회의 모습(사진=민주노총)

    언제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난다. 다만 회의가 열린 곳은 세종문화회관 회의실로 또렷하게 떠오른다. 이후 건설될 당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운영위원에 갑자기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여성할당 30%’를 배정해야 한다는 안건이 제출되었다.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물론 앞서 말한 브라질 노동자당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제 막 만들기 시작하고 있는 당의 초기 모습에서 30%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나는 반대했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것 때문에 ‘반 여성주의자’로 찍혀 놀림을 받곤 한다. 나름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모든 면에서 그런 것 아니다. 나 역시 그런 한계를 가졌었다. 만장일치로 통과되긴 했지만 돌아보기 위해 당시 발언들은 한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여성할당제를 둘러싼 토론

    김진선(민주노총 여성국장) : 7조 ①항에 여성 운영위원은 전체 운영위원회의 30% 이상이 되도록 하며, 각 단위도 이 기준을 적용한다는 내용을 삽입할 것을 제안한다.

    이상범(울산 시의원) : 여성에 30%로 할당한다고 했는데 현재 전체 추진위원 중 여성의 수가 몇 명인지 알고 싶다.

    김진선 : 30%를 활동에 근거한, 즉 전체 추진위원 수에 비례해서 한다는 것은 곤란하다. 인구를 따지면 50% 배정해야 마땅하지만 30%라는 것은 운영위원회 내에서 견제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수다.

    이상범 : 근본 취지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의무조항으로 넣지 않아도 여성에게 동등한 자격과 기회를 인정하는 사람들이다. 규약에 명시하는 것은 우리 자신도 여성차별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걸 반증한다.

    이재기(국민승리21 회원) : 현실적으로 여성들의 정치참여와 사회참여가 제도적 보장을 받지 못하고 있다.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단체라고 현실에서 그렇게 지켜지고 있냐고 반문하고 싶다.

    진한걸(울산 북구의원) : 이렇게 중대한 자리에 왜 여성들은 많이 오지 않았나. 중요한 역할을 해나갈 운영위원을 이런 식으로 배정하는 것은 많은 부작용과 능률 저하를 낳는다. 어떻게 검증되지 않은 사람을 획일적으로 30%를 선출하나.

    차유미(매일노동뉴스 기자) : 잠정적 우대조치임을 분명히 말한다. 그동안 여성들이 많이 일해 왔지만, 이런 자리에 올 수 없었던 조건들이 있는 것이다. 여성도 능력이 있으면 오라는 식이 아니라 여성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10분간 정회 후 속개)

    권영길 : 이것이 사실상 진보정당의 성격을 규정짓는 갈림길이라서 고민했다. 원칙적으로 안될 때는 현실적 측면 감안하자. 규약에 여성운영위원 할당 30% 제안을 받아 결정하되, 실천의 문제에서 각 조직의 특성을 감안하자. 이의가 없는가?

    전체: 예.

    그렇게 만장일치로 결정이 되었다.

    “계급보다 더 오래된 성의 질곡을 깨뜨려야”

    “진보정당의 여성할당제는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의아해 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게 그리 당연한 일이 아닌 게 이 땅의 현실이다. 노동조합 내 22.5%의 조합원 비중에도 못 미치는 낮은 여성 노조간부 비율, 4.4%의 여성 노조위원장, 게다가 산별노조 대표자는 민주노총, 한국노총 모두 한명의 여성 대표자가 없다. 계급의 역사보다 더 오래된 성의 질곡을 깨뜨리는 데 앞장서는 정당이 되어야 한다. 30% 이상 여성할당제는 모든 계급과 계층, 부문의 여성을 진보정당으로 조직하기 위한 잠정적 우대조치이다.”(김유미 추진위원·당시 보건의료산업노조 부위원장)의 말이었다. 솔직히 당시 나는 그 정도까지를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민주노동당은 여성할당제와 함께 노동부문에 대한 할당도 시행했었다. 나는 민주노동당의 노동자 중심성을 강조하기 위해 민주노총 운영위원배정과 관련하여 얘기했다. “운영위원 배정과 관련 민주노총에 50% 이상 배정된 것은 민주노총이 그만큼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 기준이 가장 적절하다.”고 발언했다. 그렇게 충분한 준비를 마친 민주노동당은 마침내 2000년 1월 30일 올림픽공원 역도경기장에서 “20의 사회를 80의 사회로”라는 구호아래 5천여명이 모인 가운데 힘차게 출발했다. 창당대회를 치르던 그 날의 감격은 여전히 짜릿하게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얼마 전 ‘나는 가수다’에서 인기를 한껏 모았던 윤도현 밴드가 축하공연을 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무대 뒤에서 행사진행을 해야 했던 우리는 공연의 기억보다는 현수막을 달고, 철제로 된 4단 비계(아시바라는 일본말을 주로 쓴다)를 아슬아슬하게 탔던 기억이 더 남는다.

    민주노동당의 출발

    민주노동당은 창당 후 2개월만에 국회의원 선거라는 첫 시험을 치렀다. 정당명부에 의한 비례대표제 도입을 위해 민주노동당은 적극적인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러나 비례대표제를 도입하겠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약속은 보수 정당들의 이해관계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민주노동당의 최악의 제도적 조건에서 2개월이란 짧은 준비 속에 선거를 치러야만 했다. “공부도 못하고, 시험 준비도 제대로 못한 학생에게 왜 이리 시험은 자주 오는 거지?” 당시 내가 즐겨 쓴 표현이었다.

    2000년 4월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전국 227개의 선거구 중 21개의 선거구에 후보를 출마시켰다. 21명의 후보 중 민주노총 출신은 10명이었다. 그 중 내가 속해 있던 공공연맹에서만 3명이 출마했다. 내가 작년 대전에 와서 지금도 만나고 있는 유성에 있는 과학기술노조의 이성우라는 친구의 경우 조합원 3,600여명이 투표에 참가해 83.8%의 지지로 후보로 최종 확정되고, 조합원 1인당 1만원의 정치기금도 결의했었다. 본격적으로 노동자들이 정치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당선이 안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출마하여 민주노동당을 알리고, 당원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루 종일 선거유세를 벌어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돈 한 푼 받기는커녕 거꾸로 돈을 내고, 선거 투개표 요원으로 참가해서 받은 돈도 모두 당에 냈던 사람들이다.

    선거결과 민주노동당은 1.2%의 득표로 의석을 확보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후보들은 출마지역에서 평균 13.1%의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특히 민주노동당은 울산, 창원 등 노동자가 밀집해 있고 노동운동이 활발한 공업지역에서 40%에 가까운 득표율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는 1992년 민중당 후보 득표율의 2배가 되는 것으로서 한국에서 진보정당의 가능성을 확인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게 새로운 2000년이 시작되고 있었다.

    추락한 노동자 밀집지역의 지지율

    그러나 이번 2012년 총선결과는 전혀 달랐다는 점도 기억하고 넘어가자. 노동자 밀집지역에서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 후보는 모두 떨어졌다. 울산에서는 2004년의 정당지지율 21.89%에서 16.3%로, 창원에서는 24.25%에서 18%대로 떨어졌다. 인천도 15.32%에서 9.71%, 거제에서도 26.19%에서 통합진보당 9.93% 진보신당 8.48%로, 평택에서도 17.71%에서 8.63%로 곤두박질쳤다는 통계도 있다. 노동정치의 실종을 보여주는 가슴 아픈 얘기들이다.

    필자소개
    대학 입학과 동시에 전두환을 만나 인생이 바뀜. 원래는 학교 선생이 소망이었음. 학생운동 이후 용접공으로 안산 반월공단, 서울, 부천, 울산 등에서 노동운동을 함. 당운동으로는 민중당 및 한국사회주의노동당을 경험함. 울산을 마지막으로 운동을 정리할 뻔 하다가 다행히 노동조합운동과 접목. 현재의 공공운수노조(준)의 전신 중의 하나인 전문노련 활동을 통해 공식적인 노동운동에 결합히게 됨. 민주노총 준비위 및 1999년 단병호 위원장 시절 조직실장, 국민승리 21 및 2002년 대통령 선거시 민주노동당 조직위원장 등 거침. 드물게 노동운동과 당운동을 경험하는 행운을 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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