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0만세운동 기획자 권오설의 고향
    [목수의 옛집 나들이] 경북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
        2012년 11월 06일 10: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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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을 위해 살다간 안동 사람들

    목수일을 시작한지 육 년째다. 그 동안 경북북부에서만 일을 했다.

    경상북도 북부지역인 안동과 영주, 봉화… 이 지역에 대한 나의 느낌은 보수, 유교, 양반, 전통, 고집불통, 산골짜기, 오지 등이었다. 실제 살아보니 내가 가진 선입견은 맞은 것도 있지만 여태까지 잘 알지 못했던 의외의 것도 많더라. 그 중 하나가 이곳 사람들이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다는 것이다.

    안동독립운동관에 가면 무려 1000명의 독립운동가의 이름과 출신지역을 새긴 “추모의 벽”이 있다. 도산면 원촌마을 이육사 / 도산면 하계마을 이만도, 김락, 이중언 / 법홍동 임청각 이상룡, 이상동 / 서후면 금계마을 김흥락, 김용환 / 와룡면 오천마을 김남수 / 일직면 귀미마을 김도화 / 임동면 무실마을 류연박, 류연성 / 임하면 내앞마을 김동삼, 김대락 / 풍산읍 오미마을 김재봉, 김지섭 / 풍산읍 현애마을 김시현 / 풍천면 가일마을 권오설, 권오상 / 풍천면 하회마을 류도발, 류신영….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다.

    지난 글에서 조선공산당 초대비서 김재봉 선생의 고향 오미마을은 소개를 했고 이번에는 6.10만세운동의 기획자 권오설의 가일마을을 소개한다. 앞으로 석주 이상룡의 고택인 법흥동 임청각, 김동삼의 고향 내앞마을, 김남수의 생가 오천마을 탁청정 종가 등을 소개할 예정이다.

    권오설의 고향 가일마을

    * 가일마을의 역사

    가일마을은 고려시대에는 왕(王)씨가 살았고, 그 뒤에 하회마을의 주인인 풍산 류씨가 대대로 살았다. 안동 권씨가 깃들기 시작한 것은 1420년대부터다. 조선 세종 때 정랑을 지낸 참의공 권항이 류서의 딸에게 장가들어 가일로 와서 터전을 잡게 되었다. 순흥 안씨 또한 류서의 증손녀에게 장가들어 오늘날까지 세거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가 있기에 권씨․안씨 합동으로 류서의 묘소에 현재까지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 후손이 마을의 주인으로 600여년 누려오면서 고결한 선비의 마을을 이루고 있다.

    가일마을의 전경-가일의 진산이 정산이 아늑하다

    가일마을 입향조 참의공 권항 이후 화산 권주, 병곡 권구를 비롯하여 학문에 열중하여 문집 및 유고를 남긴 사람이 스물이 넘는다. 근대에는 우암 권준희를 필두로 권오헌, 권영식, 권오설, 권오상 등 독립운동에 매진한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가일마을의 입지

    안동 시내에서 풍천읍을 거쳐 하회마을을 가다보면 오른편에 가일마을이 있다. 마을 뒤로 삼각형의 잘 생긴 봉우리가 보이는데, 이 산을 정산(鼎山)이라 한다. 가일마을의 주변으로는 하회마을을 비롯해서 소산(素山), 구담(九潭), 오미(五美), 원당(圓塘), 갈전(葛田) 등이 있는데 근동사람이면 마을 이름만 들어도 그 곳에 과거 어떤 인물들이 있었는지, 지금은 누가 살고 있는지 훤히 알 정도의 이름난 동성(同姓)마을이다. 이 마을들은 안동을 대표하는 전통문화유산을 많이 보전하고 있기도 하다.

    이 지역이 옛 전통을 유지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은 너른 풍산 들이 있어 경제적 뒷받침이 가능했었기 때문이다. 풍산들을 감싸고 있는 산기슭에는 여자못, 설못, 가일못 등의 오래된 관계시설이 있다. 모두 조선 중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인데 조선시대 관개농업의 실상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풍산들은 경북북부 일대에서는 가장 넓은 들에 속한다. 토질은 낙동강의 범람으로 만들어진 충적토인데 매우 기름져 안동 제일의 농업생산지이다.

    가일마을의 경제적 기반이 된 너른 풍산들

    *가일마을의 동수(洞藪)

    마을 동구에 심는 나무를 경북에서는 ‘동수’ 또는 그냥 ‘쑤’라고 한다. 수(藪)는 수풀(林)과 같은 뜻이다. 동수는 실제 ‘함양 상림’처럼 숲으로 조성한 곳도 있고, 그냥 상징적으로 한두 그루의 나무만 심어 놓은 곳도 있다. 가일의 동수는 가일못가에 있는 몇 그루의 버드나무와 회화나무다.

    동수는 마을의 기운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고 외부인의 시선으로부터 마을을 차단하여 주민들의 심리적 안정감을 이루는 역할을 한다. 나아가 마을 전체의 대문 역할도 하며 마을을 드나들 때 공간 이동에서 오는 심리적 불안감을 해소해주는 중요한 풍수적 장치이기도 하다.

    가일마을의 수백년 된 동수는 마을과 사람들의 역사를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나무들 사이에 2001년 11월 11일 권오설 선생 기적비를 세웠는데 권오설의 동지였던 오천리 김남수의 아들 김용직이 글을 지었다.

    권오설 선생의 기적비와 동수-기적비 뒤편 나무들이 동수

    가일마을의 옛집

    * 수곡고택

    수곡고택(樹谷古宅)은 수곡 권보(樹谷 權䋠, 1709~1777)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손자 권조(權眺)가 1792년 창건하였다. 수곡고택의 수곡은 권보의 아호이다. 이 집은 일제 강점기 시절 군자금모금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했던 우암 권준희(友巖 權準羲, 1849~1936)가 살았던 곳이고, 그의 손자로 역시 독립운동가였던 권오상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수곡고택은 사랑채, 안채, 일지재(一枝齊), 사당, 대문채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채가 맞배지붕인 것은 평생을 도학에 전념하여 검소를 생활신조로 삼았던 권보의 정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전체적으로 뒤쪽의 진산과 잘 어울려서 깔끔하면서도 운치가 돋보인다. 남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는 사랑채와 안채는 튼 ‘ㅁ’자형을 이루고, 앞마당 왼쪽에 별당채인 일지재가 남향으로 서 있다. 안채의 왼쪽 뒤편 약간 높은 터에 사당이 있으며 그 뒤로 가일마을의 진산인 정산의 줄기가 이어져 있다.

    수곡고택

    수국고택의 망와, 도깨비 문양이 재미있다

    *시습재

    시습재(時習齋)는 화산 권주(花山 權柱 1457~1505)의 고택이다. 화산은 도승지, 경상도 관찰사 등 많은 벼슬을 거쳤으며 중국어에도 능통하여 대명외교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연산군 11년(1504) 갑자사화 때, 그가 성종 13년(1482) 승정원주서로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갔다는 이유로 파직당하고 죽임을 당하였다. 권주의 아들인 권질도 거제도로 유배를 가서 위리안치의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그곳에서 딸을 낳았다. 기록에 의하면 예안에서 두 번째 귀양살이를 하던 권질은 정신이 성치 못한 자신의 딸을 퇴계에게 후처로 맞이해달라는 부탁을 하였는데 27세에 허씨 부인을 상처한 퇴계는 30세에 권질의 딸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았다고 한다. 이로써 화산 권주는 퇴계의 처조부가 되고 권질은 장인이 되었다.

    갑자사화와 기묘사화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통에 한동안 방치되었던 이 집은 18세기 중엽부터 후손들이 다시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현재의 건물은 150여년 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시습재는 가일권씨(안동권씨중 가일마을 출신을 일컫는 말) 대종가로 마을의 진산 바로 앞에 남향으로 앉아있다. 우측 모서리에 나있는 트임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바깥사랑 마당 너머로 ㅁ자형 몸채가 있다. 몸채 우측 뒤편에는 위계상으로 가장 높은 사당이 별도로 일곽을 이루며 자리하고 있다.

    이 집은 안채 대청마루 뒤편의 창호가 특이하다. 정면 세 칸의 대청은 모두 뒤편으로 판문이 나있는데 양가에 있는 두 개는 영쌍창(楹雙窓)이다. 영쌍창이란 창틀 가운데에 세운 작은 기둥인 영(楹)이 있고 양쪽으로 창호가 있는 것이다. 이는 18세기 이후로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는 고식이다.

    시습재 전경

    *남천고택

    남천고택은 야유당 권장이 1850(철종1)년 그의 넷째 아들 권숙의 세간집으로 지었다.

    마을의 동측 중간부분에 있는데 대지가 매우 넓다. 원래 지금보다 훨씬 더 넓은 마당과 건물이 있었다. 정면6칸, 측면6칸의 튼 ㅁ자형의 홑처마 기와집으로 안채에 벽장을 들이는 등 19세기 전통주택의 변화과정이 잘 나타나있다.

    대문간 없이 -자형의 중문간채와 구 뒤편의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를 이루고 있다. 앞마당 우측에는 근래에 연못을 조성하고 정원을 꾸몄다. 연못은 방형이고 가운데 원형의 석가산이 있다. 지금은 칠십대의 집주인 혼자 기거하지만 자녀 중 한명이 문화재수리기술자로 일하고 있어 집을 아주 잘 관리하고 있다.

    한편 이 사랑채에서는 권숙이 직접 기거하면서 학문연구와 가족들을 중심으로 한 후진양성에 노력하였다고 전한다. 이때의 사랑채는 조선후기의 초등교육기관인 일반 서당과는 구별되는 고차원적 교육기관으로 존재했던 문벌 또는 당색별로 폐쇄되어 있는 형태로 추측된다.

    남천고택의 서편은 담으로 둘러 쌓인 밭이 있다. 그 곳이 바로 권오설의 생가가 있던 곳이다.

    권오설과 그의 영향을 받은 권오상, 권오운, 권오직(권오설의 막내동생) 등의 후예들은 사회주의 계열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권오설은 해방전에 사망하였지만 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 일부는 해방 후 북한정권 수립에도 참여했고 관직을 지내기도 했다. 한국 전쟁때는 남쪽으로 내려와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휴전 후 권오설을 비롯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은 가일마을에서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압박과 피해를 받았다.

    권오설의 양아들(권오설의 동생 권오기의 아들 권대용)은 몇십년 고향을 지키다 너무 힘들어 1980년대 고향을 떠나고 말았다. 2005년 대한민국 정부는 권오설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제는 콩밭이 되어버린 권오설의 집터에 그의 생가가 복원되기를 기원해본다.

    남천고택 진입로

    남천고택 서편의 콩밭-이 밭이 권오설의 집이 있던 곳

    * 권성백 고택

    이 집은 원래 수곡 권보의 손자 권환이 생가인 수곡종택을 짓기에 앞서 지은 것이다. 풍기광복단과 대한광복회에 참여하여 독립자금모금활동 등을 한 독립운동가 권영식(1894~1930)이 태어나고 죽은 집이다. 양반집의 면모를 두루 갖추고 있는 조선 후기의 기와집인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건축 양식으로 보아 19세기 후반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안채와 사랑채가 이어져 완벽한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는 큰 대청이 있는데 특이하게 전후면 모두가 둥근 기둥이다. 조선시대 민가에서는 둥근기둥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으나 후기로 접어들어서는 그 제한이 유명무실하게 되어 대청이나 사랑채의 전면은 둥근기둥을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여기서처럼 대청후면까지 둥근기둥을 과감히 사용한 예는 매우 드물다.

    사랑채와 중문간채는 ‘一’자로 이어져, 가운데는 중문간이며 오른쪽은 사랑채·왼쪽은 문간채가 된다. 사랑채는 방과 대청으로 이루어졌으며 사랑마당 앞으로 길게 툇마루를 두었다. 사랑마당 앞쪽에는 방과 대문·마구간·헛간으로 구성된 一자형 대문간채가 있으나, 지금은 그 오른쪽에 새로 낸 대문을 이용하고 있다.

    이 집에서 특히 주목되는 구조는 안방에서 부엌·광까지 이어지는 다락과, 대청 건너 상방과 골방 천장으로 이어지는 대형다락이다. 또한 안대청에 물건을 얹기 위하여 설치한 시렁도 다양하고 충실하게 꾸며져 있다. 전체적으로 규모가 크고 설비가 합리적이며 건축부재도 튼튼하고 충실하여 장중한 멋을 풍기는 조선 후기 주택의 좋은 예이다.

    권성백 고택 전경

    * 노동재사, 노동서사

    노동서사(魯東書社)는 1770년 병곡 권구의 덕을 기려 가일마을 사람들이 창건한 서원이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T자형 집으로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솟을대문이다. 일제시대 권오설이 조직한 원흥학술강습소(元興學術講習所)의 강습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노동재사(魯東齋舍)는 가일권씨 수곡문중 소유로 1840년경 권구의 묘소를 수호하고 봉향하기 위해 건립했다. 실제로는 노동서사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앞쪽이 조금 낮은 지형에 따라 전면에 비교적 높은 석축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앉히고 주위에 담장을 두르지 않았다. 비교적 큰 규모의 口자형 재사로 뛰어난 법식은 없으나 마루 뒤로도 드나들 수 있게 머름을 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그 예를 이 건물에서 볼 수 있다. 건물의 네 모서리에 상부의 도리 뺄목의 처짐을 막기 위하여 까치발형 버팀목을 받친 모양새가 눈길을 끌고 있는 건물이다.

    노동재사 전경- 지금은 민간단체에서 민박집으로 활용하는 중

    권오설에 대한 자료

    권오설에 관한 이야기를 더 써려다 링크와 책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친다.

    안동 사랑방 34호 [안동의 인물-안동지역 사회운동의 선각자 권오설] 편 – 심상훈 저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자료총서Ⅱ 권오설 1, 2 / 김희곤 / 푸른역사
    안동가일마을 – 풍산들가에 의연히 서다 /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 예문서원

    항일구국열사 권오설 선생의 묘

     

    필자소개
    진정추와 민주노동당 활동을 했고, 지금은 사찰과 옛집, 문화재 보수 복원을 전문으로 하고 있는 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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