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안티그네, 안티고네
    [안녕? 페미니즘!] 가짜 여성, 진짜 여성의 왜곡된 구도 넘어야
        2012년 11월 05일 10:1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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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는 여성이 아니무니다?

    10년 전 페미니스트 저널리스트 최보은이 대권 후보로 ‘박근혜를 사유하자’고 주장하면서 벌어진 ‘소란’은 여전히 새삼스럽다. “여성진영은 왜 참정권 행사를 여성의 독자적 이해관계에 기반해서 바라보지 않고 ‘진보진영’의 틀 속에서만 바라보려 하는가?”라는 그녀의 상식적인 질문은 도발적인 것으로 수용됐다. 박근혜라는 ‘문제적 여성’ 때문이었다.

    박근혜는 ‘우연히 여성인 정치인’, ‘정치적 남성인 생리적 여성’, ‘여성임을 부정한 여성’이지, 진짜 여성이 아니라고 반박되었다. “여성 문제와 여성 관련 정책 개발에는 관심이 없고”, “여성들의 고통스러운 경험과 그에 대한 성찰성”은 물론 “타자에 대한 배려와 연대를 실천할 능력과 소양”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 독재자의 유훈을 떠받드는 공주일 뿐이라는, 그녀의 정치적 반대자들의 호명에 페미니스트들 역시 동참했다. 노력하는 마초를 자처한 한 진보주의자 남성이 ‘계급 문제에 무관심한 중산층, 인텔리 여성들의 투항’이라고 몰아부치자, 여성을 희롱하고 페미니즘을 모욕하도록 빌미를 준 해프닝으로 서둘러 일단락시켰다.

    이번 대선에서는 ‘최초 여성대통령’의 현실화 가능성이 최보은 대신 페미니스트들이 응답하도록 요청해 왔다. 가짜 여성론과 공주론이 재등장했다. 박근혜는 “국가와 자신을 분리해 사고하지 못하고 거기에 종교적 의미까지 덧붙인 신탁 받은 공주”이며,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첫 숫자가 ‘2’라는 사실 이외에는 여성과 가장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박근혜가 여성이 아니며, 시민이 되지 못한 세습 신분의 화신일 뿐이라는, 10년 만에 똑같이 반복된 이 주장은 박근혜를 안티하는 페미니스트들의 공격포인트가 될 수 있을까?

    안티고네 이야기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다. 오이디푸스 사후, 그녀의 남자 형제들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는 왕위를 놓고 서로 다투다 죽게 되고, 왕위는 안티고네의 외삼촌인 크레온에게 돌아간다. 크레온은 테베를 공격한 폴리네이케스를 반역자로 선포하고, 에테오클레스에게만 성대히 장례식을 치러준다.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는 들에 내다버려 짐승의 밥이 되도록 하라, 명하는데 안티고네는 이를 거역하고 몰래 매장함으로써 감옥에 갇히고, 그곳에서 목을 매 자살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주목한 것은 크레온의 법으로 상징되는 국가, 즉 정치공동체의 ‘밖’에 위치한 非시민 여성의 문제적인 존재 구조다. 원칙적으로, 오빠를 애도한 안티고네의 행위는 왕의 명령을 거부한 반역죄로 처벌될 수 없다. 그녀의 행위는 혈연의 참혹한 죽음을 방치할 수 없는 친족 규범을 따른 것으로, 여성을 시민권자에서 배제한 폴리스에서 이에 대해 단죄하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오빠의 시신을 수습하는 안티고네

    프랑스 페미니스트 철학자 이리가레에 따르면 안티고네는 공동체의 영원한 아이러니를 반영한다. 폴리스는 최고의 선을 실현하는 자유민 남성의 완전한 결사체로서, 사적인 영역과 철저하게 분리된 것으로 간주되면서도, 시민은 가족 안에서의 생산 및 재생산 노동을 통해 형성된 자기충족적 인격체로 이상화된다.

    따라서 가족의 안녕은 폴리스의 존립 기반이다. 가족 안의 역할에 충실한 안티고네는 배제되었으면서도 배제되지 못하는 아이러니컬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리가레는 안티고네가 정치적인 것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사적인 것을 통해 정치적 발언을 하는 여성적 힘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페미니스트 퀴어 이론가인 버틀러는 이리가레와 달리, 왕의 명령을 거스르는 안티고네의 결단과 크레온에 맞선 발화의 방식이 갖는 남성다움에 주목한다. 안티고네가 크레온과 대면하는 모습은 통치권자의 그것처럼 매우 남성적인데, 크레온이 자신의 남자다움을 완전히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 정도였다.

    크레온에게 말을 하면서 안티고네는 남성다워지고, 그 말을 들으면서 크레온은 점점 남성성을 잃는다. 한마디로 안티고네는 여성인 남성, 혹은 남성인 여성이 되어 이 희곡 전반 걸쳐 젠더 규범을 불안정하게 만든다.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의 근친상간에 연루된 안티고네는 젠더 규범뿐만 아니라 친족규범도 위반한다. 오이디푸스에게 이오카스테는 아내이자 어머니이며, 따라서 안티고네에게 오이디푸스는 아버지이자 오빠가 되고, 폴리네이케스는 오빠이자 조카이기도 하다. 이성애적 가족 구조의 정상성과 금기를 위반한 안티고네는 ‘순수한’ 가족의 대표자를 자임할 수 없게 된다. 한마디로 젠더 규범과 가족 규범에서 일탈한 안티고네는 여성, 혹은 남성이 아니라 그 젠더 이분법의 경계를 교란하는 주체다.

    여성정치인 박근혜 역시 이러한 안티고네적 구조를 수행한다. 그녀는 제왕적 최고 권력자의 공주였고, 수년간 그의 아내 역할을 대신했다. 부모의 ‘비극적’ 죽음은 이 가족의 대표자로서 그녀의 정치적 입문과 동원의 발판이었다.

    또한 육영수의 육화된 이미지는 그녀의 정치적 생존의 핵심 자원이면서도, 결혼과 출산이라는 여성의 ‘일반적인’ 경험을 벗어남으로써 여성성은 탈각되었다. 극도로 절제되어 있는 그녀의 발화 방식은 모호해 보이는 젠더 정체성과도 잘 결합되어 있다.

    여성-정치의 아포리아에 갇힌 안티그네

    이리가레와 버틀러의 안티고네에 대한 해석이 차이는 있지만, 여성 시민과 정치인이 정치공동체 안에 놓이는 ‘문제적 형식’을 다룬 것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박근혜가 여성이 아니며, 공주일 뿐이라는 주장은 이러한 ‘문제적 형식’ 자체를 곧바로 박근혜 개인의 고유한 정치로 등치시킨다. 그럼으로써 박근혜가 여성이 아니라면 진짜 여성은 누구인지, 공주의 세속 버전이 여전히 여성의 정치 입문에 중요한 자질이 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지에 대한 답변의 책임을 지게 된다.

    생물학적 결정론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를 통해 박근혜를 ‘가짜 여성’으로 가려내려는 노력이 그 일환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섹스와 젠더를 구분해서 얻고자 했던 페미니즘의 성과를 벗어난다. ‘최초의 여성대통령’ 선언의 잠재력에 놀란 그녀의 경쟁자들이 마치 섹스는 악이고 젠더는 선인 것처럼 대당시키는 요상한 논리와도 구별이 되지 않는다.

    “박후보가 생물학적으로 여성이지만, 사회정치적 여성으로서 여권신장과 양성평등에는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았다”는 한 야권 캠프의 발언을 보자. 젠더는 가치지향이나 의지를 일컫는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여권신장과 양성평등’에 대한 기여를 특정한 생물학적 성(sex)에 연결시키려는 이 ‘사회정치적’ 현상을 설명할 때 쓰이는 용어가 젠더다.

    젠더와 정치가 맺는 ‘문제적 형식’은 모든 여성정치인들이 놓인 아포리아다. 보편자 남성(성)의 세계에서 개별적이고 특수한 여성(성)의 체현은 늘 불안하게 동요한다. 그래서 정치가 남성의 영역임을 투명하게 드러내고 싶을 때, 즉 공천 등을 둘러싼 이전투구와, 정략적 이해관계가 발생할 때, 이 동요하는 젠더정체성은 여성정치인을 배척하기 위한 조롱과 공격의 빌미로 활용된다.

    박근혜가 독특한 것은 이 ‘문제적 형식’을 잘 활용할 뿐만 아니라 그 함정을 피하면서 성공한 여성정치인 가운데 한 명이라는 점이다. 이 ‘독특함’을 여전히 ‘문제적 형식’에서만 찾으려 하는 것은 박근혜의 정치를 초역사화함으로써, ‘안티’의 내용을 텅 비우고, 설득할 대상을 잃게 한다.

    박근혜라는 ‘문제적 형식’을 넘어

    1998년도에 입문해서 집권 여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 때까지 그녀의 정치적 위상이 단지 아버지의 딸로서 박제화되어 있던 것이 아니라 당 내 개혁과 원칙을 바탕으로 한 리더십, 보수적 기반과 가치에 대한 비타협적 수호 등을 통해 권력을 확대해 왔다는 연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체 여성유권자들 가운데 박근혜의 지지율이 타 후보에 비해 높지 않다. 일반 여성유권자들은 박근혜에게 여성 대표성의 가치나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최근 ‘여성대통령 선언’을 하고, 김성주를 통해 독립적이고, 진취적인 여성 이미지를 덧씌우려는 캠프의 무리수들이 이를 반증한다.

    반면, 박근혜의 지지자들 가운데는 그 지지 이유가 ‘최초의 여성후보’라는데 가장 많이 응답을 했다. 박근혜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여성들을 포함한 그녀의 지지층에게 공주와 성녀의 이미지는 강력하며, 이것이 이들이 지지하는 박근혜에 대한 여성 대표성의 의미를 구성하고 있다. 공주라서, 그 공주는 왠지 ‘다른 여성’과는 다를 것 같아서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 공주의 의미를 단지 봉건적 세습 신분과 동일한 것으로, 그리고 이에 대한 갈망을 허위의식으로 판단하고 말일이 아니다.

    구체적인 분석은 이 글의 목적을 벗어나지만, 박근혜가 저학력, 저소득, 지방성 등의 요소를 담은 다수의 여성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으며, 이는 박근혜를 통해 여성으로서의 고단한 삶을 보상받고 싶어하는 젠더평등 욕망의 투영이라고 설명한 정치학자 이진옥의 연구는 하나의 힌트를 준다.

    그동안 할당제와 리더십 개발에 주력했던 페미니즘운동의 여성 대표성 제고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정치와 만나는 ‘문제적 형식’의 근원적 구조는 전복되지 않았다. 기존 정치권력에서는 물론, 페미니즘 운동의 정치세력화 의제로부터도 소외되어 있던 여성들에게 다가설 정치와 언어가 필요한 시점이다.

    다만, ‘치마만 둘러도 우리는 찍을 수 있다고 여겨질 정도로 여성들의 불만이 치솟아 있다는 걸 보여주자’라는 10년 전 최보은의 주장처럼, 성적 차이가 그 본연의 순수한 모습으로만 드러나는 순간은 없다는 점은 명심해야겠다.

    필자소개
    필자들은 페미니즘 속 세상, 세상 속의 페미니즘이 일으키는 불화를 열광하고, 성찰하는 연구자들이다. 관계와 소통을 본격적으로 통찰하는 매혹적인 학문이자 사상으로서, 농익은 진리 주장에 머물러 있기보다 설익은 질문에 열려있는 페미니즘을 지향한다. 필자들의 관심사는 저마다 다르지만, 생계부터 정치적 안부까지를 함께 걱정하고 토론하는 생활공동체의 화학작용으로 인해, 각자의 사유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 엄혜진(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서울대 여성연구소 객원 연구원) 김원정(서울대 여성연구소 연구원), 윤보라(서울대 여성학협동과정 박사과정), 이선형(서울대 여성연구소 연구원)이 차례로 글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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