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좌파의 인지적 지도
    대선 뿐 아니라 그 이후를 준비해야
        2012년 10월 27일 04:55 오후

    Print Friendly, PDF & Email

    진보좌파, 붕괴의 징후인가?

    1997년 권영길 후보의 도전 이후 진보진영은 가장 초라한 상태에 직면해 있다. 초라한 상태라는 표현도 양호하다. 진보좌파는 대중적으로, 도덕적으로 붕괴 국면에 와 있다는 느낌마저 지울 수 없다.

    변화를 바라는 대중들, 미래가 불안정한 젊은이들은, 안철수와 같은 ‘우스꽝스런 광대’에게 지지를 보내고 있을 뿐 진보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애정도 없다. 진보좌파진영은 대중들에게 대안적인 세력으로 인정받는 것은 고사하고, 생존조차 의심스러운 상태로 전락한 것이다.

    진정 아이러니한 것은 진보진영이 어느 때보다 많은 대선 후보를 보유한 집단이 된 점이다. 보수진영은 단 한명의 후보를 내세웠고 이에 맞서는 야당은 문재인, 안철수 두 명이 경합을 벌이고 있는 반면, 진보좌파 진영은 통진당의 이정희, 정의당의 심상정, 변혁모임의 노동자후보가 나설 국면이다. 여기에 진보신당마저 독자후보를 낸다고 결의하면 진보좌파진영은, 민중운동 역사상 ‘전무’한 네 명의 후보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정말 장하고 가슴 벅차다 해야 할까?

    대중들은 진보진영을 쳐다보지도 않는데 서너 명의 후보가 난립하여 저마다 자신들만이 ‘진정한 진보’이거나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옹호한다고 선전하는 꼴은 ‘망해가는 집안’이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보여주는 국면이라 하겠다.

    오늘(10월 24일 현재) 언론에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심상정 후보는 0.6%, 이정희 후보는 0.5%를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 이름도 없는 변혁모임의 후보가 나서게 된다면 0.2~3% 지지가 덧붙여 질 것이다. 진보신당이 결합하면 또 영점 몇 %가 더해질 것이다.

    초라하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좌파진영을 이루는 각 정파들은 상호 적대의식 속에서 자기 갈 길만 걸어가고 있다.

    통진당과 진정당의 후보들은 진보진영의 대표후보가 되어 야당후보군과 경쟁하려 하기보다 오히려 야당후보로부터 ‘야권연대’의 대상으로 지목받기 위해 상호 경쟁하고 있다. 변혁모임의 후보는 진보좌파진영의 연대라는 정세의 요구는 외면한 채 오로지 투쟁하는 노동자후보만을 고집하고 있다. 진보신당은 해프닝 제조기가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국면이다.

    진보정치 15년의 결과가 이렇게 갈기갈기 찢어져 상호불신과 비방으로 정치공간의 언저리에 조차 안착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인생을 걸며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에 투신했던 선배들, 동료들이 짊어져야 할 절망감은 과연 누가 책임져야 할까?

    문재인 캠프와 안철수 캠프로 합류하는 민주노총 전현직 간부들의 이름이 나날이 신문 지상을 점령하는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형국이다. 그들의 행보는 한편으로 변절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진보좌파의 전망부재가 낳은 결과이기도 하다.

    이 글은 대선국면에서 거칠게 그려보는 진보좌파에 대한 인지적 지도이다. 나는 진보 좌파라고 했다. 이제 진보와 좌파는 점차 구별 정립되는 상황인 듯하다. 그러나 나는 아직은 좌파가 진보라는 수사를 포기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좌파가 진보를 전유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글은 현재 진보좌파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정확이 인식함으로써 우리가 나아가야할 바를 모색하고자 하는 것이다. 누더기가 된 좌파의 현실을 냉정히 인식함으로써만 현재의 국면을 돌파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초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른쪽을 향한 정처 없는 행로: 진보정의당

    통진당 탈당파를 중심으로 구성된 진보정의당의 실질적인 주체는 국참계이다. 그러나 이 말은 국참계가 당권을 좌지우지 한다는 것도 아니고 주요 당직자들이 국참계라는 말도 아니다. 진보정의당의 중심 실무진은 통합연대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심상정 진보정의당 대선후보 수락 연설

    실제로 조직을 만들고, 일을 기획하고, 의원을 보좌하는 역할은 통합연대 출신이 많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들은 초기 민주노동당을 만든 주체이고, 진보신당을 설계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무진이 통합연대 출신이고 대통령 후보와 당 공동대표가 통합연대 출신이거나 민주노총 출신이라고 해도 진보정의당의 대주주가 국참계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진보정의당의 대중적 토대가 국참계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들이 내세우는 정책 어젠다 역시 국참계의 요구가 다수 반영된 ‘진보적 자유주의’ 의제인 셈이다.

    심상정 진보정의당 대통령 후보의 출사표는 진보진영의 독자적 의제를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연대 전략을 제시하기보다 안철수-문재인을 향한 간곡한 호소로 흘러넘친다.

    예의 복지국가-경제민주화 논리에서부터 ‘정치 대전환을 위한 국민회의’를 제안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민주당으로부터 야권연대의 대상으로 지목받기 위한 애처로운 짝사랑만이 보일 뿐이다. 강동원 진보정의당 원내대표가 예방한 자리에서 박지원으로부터 ‘호통’을 듣고 잘못을 사과하는 촌극은 이런 구조에서 빚어진 당연한 결과이다.

    어쩌면 심상정 후보의 출마는 민주당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진보진영의 후보가 민주당 후보와 단일화함으로써 민주당은 야당 지지층만이 아니라 진보진영의 지지조차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심상정 후보와의 단일화가 변수가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민주당으로서는 이것이 심상정 후보를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이다.

    진보진영이 보수정당의 대중적 정당성을 보증하는 수단이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비판적 지지론을 펼쳤던 80년대의 전대협도 이보다 노골적으로 보수야당에 추파를 던지지는 않았다.

    진정당이 오른쪽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통진당 탈당파들 중 노동운동에서 의미 있는 정파나 대중단체들은 진보정의당에 조직적으로 결합하지 않았다. 진보정의당은 사상누각처럼 공중에 떠 있는 정당인 셈이다. 대중적 토대 역시 취약하다.

    그러니 이들이 조금이라도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공중파 선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자당을 확고하게 지지하는 계급적/대중적 토대가 없기 때문에 진정당은 추상적인 ‘시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아야 한다. 이 경우 진정당은 ‘대중의 상식’ 수준에 맞는 정책을 제시할 수 밖에 없다. 그 결과로 나온 구호가 정치개혁, 복지, 경제민주화인 셈이다. 당연히 민주당 개혁세력과 아무런 구별이 안 된다.

    이들은 비록 7명의 의원을 보유하고 있으나 이들의 정체성 자체도 모호하기 그지없다. 그들이 어떤 의제를 중심으로 활동할 것인지도 오리무중이다.

    심상정 후보가 진보진영의 단일화에 먼저 힘쓰고 그 이후 민주당과 선택적인 연대 가능성을 열어 놓았으면 우리는 이 정당에 대해 조금이나마 희망을 가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심상정 후보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못 느끼는 듯하다. 진보진영과의 연대는 표가 되지 않는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렇다고 심상정 후보의 지지율이 얼마나 올라갔는가? 고작 0.6%인 것을. 이 정도의 지지율은 있으나마나한 존재감이다. 심상정 후보의 존재는 “진보가 민주와 단일화 했다”는 알리바이만을 성립시킬 뿐이다.

    근본주의와 정치적 실용주의라는 두 얼굴: 통합진보당

    심상정 후보와 국참계가 오른쪽을 향해 뚜벅뚜벅 전진하고 있다면 이정희 통진당 후보는, 근본주의와 정치적 실용주의의 경계를 위험하게 줄타기 하던 경기동부의 야누스적 본성을 적나라하게 펼쳐 보이고 있다.

    근본주의란 특정한 신념(교조/교리)만이 절대선으로 사고하고 모든 행위는 이 교리에 근거해서만 판단하는 정치적, 종교적 종파를 일컫는다. 근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준은 자신들의 교리를 실현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이지 그 외의 기준은 일체 중요하지 않다.

    그들은 자신들의 교리가 옳다면 이를 실현하기 위해 어떤 수단이라도 활용할 수 있다고 사고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고 목표의 올바름이 모든 과정의 판단기준이 된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선후보와 당 지도부

    정치적 실용주의는 정치적으로 이익이 되는 어떤 선택도 마다하지 않는 사고이다. 근본주의와 실용주의는 전혀 상반된 대상을 일컫지만 경기동부에게 있어서 둘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이들은 자유주의자들과 손을 잡다가도 언제든지 거리낌 없이 연방제 통일과 반미구호를 불쑥 들고 나온다. 경기 동부는 주사파식 근본주의의 토대 위에 실용주의적 유연성을 쌓아올린 독특한 정치세력이다. 이들은 국면에 따라 어떤 때는 실용주의를 또 어떤 때는 근본주의를 과시함으로써 우리를 놀라게 한다.

    2001년 전국연합 활동가들이 군자산에 모여 결의한 이른바 ‘9월테제’는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 정당의 건설을 통한 자주적 민주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제시한다. 그후 전국연합 활동가들이 민주노동당에 집단적으로 가입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은 2002년 이후 당 근간을 장악해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2004년에 민주노동당 내의 최대 정파로 자리 잡는다. 민주노동당 장악과정에서 그들이 보여준 행태는 놀라운 것이었다. 당비 대납, 부정선거, 다수결을 통한 패권, 회계부정, 당내 정보 유출 등 온갖 비정상적인 행태를 보였다.

    NL의 조직력과 활동력은 놀랍고도 탁월하다. 그들은 활동가들을 상호 보조하고, 시민사회단체와 노조 내부에서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했으며, 안정적인 활동가 재생산구조를 만들어 왔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노동운동과 정치 모두에서 대단한 유연성을 보였다. 그들은 노조 내부의 지지를 얻기 위해 사측과 기꺼이 야합하고 기득권과 타협했으며, 정치세계에서는 자유주의자들과 손잡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유시민류의 자유주의자와 손을 잡는 것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다. 정치적 실용주의가 지배하는 국면이다.

    그러나 2012년 통진당 사태는 경기동부식 근본주의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이들은 자신들이 주도적으로 선거부정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일체 인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선거부정을 낱낱이 까발린 당 지도부에 대해 폭력적으로 저항했다.

    더 나아가 반대파들의 모든 ‘폭로’가 자주민주통일 운동을 좌초시키려는 기회주의자들의 기획된 음모의 일부라고 평가했다. 이 과정에서 보여준 경기동부의 ‘의연한 태도’는 모든 이들을 경악케 했다. 경기동부에 대한 일체의 비판은 반미자주대오에 대한 공격인 것이다.

    이정희씨는 반미자주화를 위해서라면 어떤 화살도 정면으로 받아내겠다고 다짐함으로써 그들의 신념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

    그녀의 출사표에 나타난 “우리민족끼리 단결”과 “연방제 통일방안”은 NL진영을 응집시키려는 의지의 표방이다. 한 때 진보의 아이콘으로 급성장한 이 여인은 일체의 주저함 없이 경기 동부의 일개 조직원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한다. 이정희씨의 상반된 두 이미지는 경기동부 그룹의 야누스적 면모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NL식 근본주의자들은 미디어로부터, 여론으로부터 철저한 조롱꺼리로 전락했지만 여전히 민중운동 내부의 가장 큰 단일 정파이자 최대 주주이다.

    그들은 내적으로 응집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헌신적인 활동가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다. 비록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이 황망한 목표가 되어버렸지만 운동조직으로서 이들이 지닌 자산이 여전히 확고부동하다.

    현 국면에서 경기동부는 대중과 호흡할 수 없으며 호흡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없이 옳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 더불어 그들은 대중은 망각의 존재이기 때문에 조직만 제대로 보전하면 언제든지 다시 기회가 온다고 평가하고 있다.

    ‘10년은 라면 먹을 각오’로 다시 전선에 선 이들은, 당분간은 내적 통일성 유지에 혼신의 힘을 다할 것이다. 이들이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파이가 급속하게 줄어드는 국면에서 이를 어떻게 조직적으로 견뎌낼 것인가이다. 이는 흥미롭게 지켜볼 사안이다.

    근본주의의 빛과 그림자: 변혁모임

    민중운동 내부의 근본주의는 경기동부에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NL과 대칭적인 존재는 아니지만 PD적 근본주의도 결코 만만치 않다. 근본주의가 자신의 교리만을 교조적으로 숭배하면서 타 집단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신념의 추종자들이라는 점에서 변혁모임 역시 이 범주에 속한다 하겠다.

    변혁모임에 결합하고 있는 여러 세력들, 노동전선, 사노위, 노혁추 등은 노동운동 현장에서 전투적 노조주의를 대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단호한 반자본주의 세력이다.

    대선방침 결의한 변혁모임 활동가대회

    이들은 투쟁현상에 가장 헌신적으로 결합하고 있으며, 현장 투쟁에서 노동조합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가를 경험을 통해 체득한 활동가 집단이다. 이들은 파업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가며,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호흡하고, 장기 투쟁 사업장을 지키고 있으며, 정리해고에 대해 단호하게 맞서 싸우는 부대이다. 현장파라는 이름에 걸 맞는 백전노장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이들은 단호한 반자본주의 분파답게 변혁적 노선을 명확히 하고, 일체의 타협이나 야권연대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들은 부르주아는 부르주아일 뿐이고 사민주의는 부르주아 체제의 재생산을 담당하며, ‘정치적 기회주의자들’을 보수당을 지지하는 순진한 대중들보다 더 혐오스러워 한다. 자본주의 체제와 조금이라도 빌붙는 것들에 대해서 단호하게 선을 긋고 있다.

    이런 근본주의적 태도에 맞게 그들은 변혁적 계급정당 건설을 목표로 활동한다. 더불어 대통령 후보도 독자완주를 목표로 투쟁하는 노동자후보를 출마시키겠다고 호기를 부리고 있다. 진보진영 전체가 대중의 ‘웃음꺼리’가 된 것도, 이미 진보후보가 두 명이나 나와 있는 것도 이들의 관심대상은 아니다. 이들에게 있어 이정희/심상정은 부르주아 후보로 보일 뿐이다. 진보진영에 대한 관심도 없다. 좌파, 변혁적 관점이 확고히 선 진영에 대해서만 관심을 둔다. 투쟁하는 노동자후보로 대선을 독자완주 한다는 관점은 이런 근본주의적 태도의 귀결이다.

    그러나 변혁모임의 한계는 너무나도 뚜렷하다. 이들은 노동자계급 변혁정당을 건설하겠다고 호기를 부리지만 이 변혁정당이 대중정당인지 활동가정당(전위정당)인지 조차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활동가정당이라면 이 정당은 등록조차 될 가능성이 없다. 5개 광역시도에서 1,000명씩 활동가를 조직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변혁정당에 참여하는 전체 활동가를 모아도 1,000명이 안 된다. 그렇다면 당을 만들겠다는 주장은 말뿐인 셈이다. 만약 이들이 노동자계급에 토대를 둔 대중정당 건설을 목표로 한다면 노동포럼이나 다양한 노동자 대중조직과 함께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의 노선 외에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고 있다. 활동가정당도 대중정당도 아닌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만이 올바른 노선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기회주의자들’과 일체의 연대를 거부한다. 통진당에 결합한 사민주의자들, 노동운동 내의 조합주의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변혁적 순혈주의만 주창한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치러야 하는 대가는 막중하다. 그들은 체제변혁을 목표로 하지만 체제를 변혁하기 위해 좌파의 힘을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에 대해 아무런 계획도 없다. 그들은 오로지 투쟁사업장에 전투적으로 결합하는 것만으로 모든 정치를 대체한다. 변혁적 목표를 굳건히 하는 사회주의자들은 한줌밖에 안되어도 이들은 이 한줌 내에서만 움직이려 한다. 언젠가 노동자계급의 혁명성이 발현될 것을 기대하면서. 그러나 그 예정된 시간은 결코 그냥 오지 않는다.

    이는 현실정치에서 지독한 분파주의로 나타난다. 자신들만이 옳기 때문에 타 집단과는 결코 합칠 수 없다. 좌파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다양한 세력을 결합시키고자 하는 의지조차 없다. 그들은 그들의 정치노선을 수용하는 사람과만 연대한다. 그런데 이 세력들은 매우 미약하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자 선언]에서 ‘공산주의자는 노동자당에 대립하는 특수한 당“이 아니라고 분명히 지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오로지 독립된 변혁정당만을 고집한다.

    더 나아가 이들은 계급과 시민의 변증법에 대해 무지하다. 변혁적 근본주의는 오로지 노동자계급만 강조한다. 그러나 노동자는 생산관계에서 노동자이지만 주권자로서 시민이기도 하다. 계급적 이해관계와 보편적 시민권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권이야말로 시민으로서 노동자계급이 가져야할 근원적 권리다. 노동자계급적 관점과 시민성은 접합될 수 있다. 인권의 정치는 계급성의 후퇴가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계급정치인 셈이다.

    변혁적 근본주의는 시민성의 정치를 사고하지 못함으로써 현장 밖으로 노동자운동의 대의를 확대시킬 수 없다. 그들은 현장의 목소리를 시민적 언어로 담론화할 능력도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자신의 주장이 옳은데 대중을 설득해야할 이유가 어디 있나? 이런 정신승리의 결과는 변혁모임의 대중적 고립이다.

    변혁이 목표라면 변혁의 논리를 대중적 언어로 번역하고, 시민들을 조직해야 한다. 그러나 변혁적 순혈주의는 이를 사고할 수 없다.

    조타수를 잃어버린 난쟁이들의 거함(巨艦): 진보신당

     진보통합이 부결된 이후 진보신당은 균열되었다. 과거 민주노동당을 만들고, 민주노동당과 분리된 이후 다시 진보신당을 주도적으로 만들고 실무를 관장했던 대부분의 중앙당 활동가들은 이 국면에서 진보신당에게 이별을 고한다.

    이들은 모두 정치를 통해 성공을 꿈꾸었고, 한나라당, 민주당, 진보정당이라는 ‘천하 3분지계’를 꿈꾸던 이들이라 진보신당으로서는 그런 꿈을 실현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십수년을 함께 한 진보진영의 정치인들도 모두 진보신당을 떠났다. 더불어 통합을 지향했으되 통합연대와 함께 탈당하기를 거부한 진보신당 통합파들은 당연히 당권으로부터 물러났다.

    이 과정에서 진보신당은, 열정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나 정치적 경험은 부족하고, 축적된 실무역량도 일천한 활동가들로 재구성되었다.

    진보신당에는 합리적인 독자파들이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경험적 미숙과 열정의 과잉이 복합된 어릿광대들 또한 흘러넘쳤다. 김은주 비대위 하의 전국위원회 해프닝은 이 당이 앞으로 어떤 경로를 밟을 것인가를 뚜렷이 보여주었다.

    재창당 결의한 진보신당 임시당대회

    진보신당호를 조종해 온 선원들은 모두 떠나고 이 배에는 난쟁이들만 남았지만 이 난쟁이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된 것이다. 진보신당은 조타수를 잃은 거함이 되었다.

    어릿광대들의 해프닝이 잦아들 때쯤 홍세화 대표 체제가 출범했다. 진보정치인과 언론으로부터 버림받은 당원들이 홍세화를 구원자로 보는 것은 당연했다. 특히 홍세화식 어법, 배제된 자들의 서사니 진보의 밀알이니 하는 수사학과 떠나간 자들에 대한 분노는 그를 추대한 당원들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 듯했다. 진보신당에 남은 ‘마음이 가난한 자들’은 홍세화 선생을 통해 새로운 진보의 희망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홍세화식 어법과 정치행보는 독자파를 지향했던 사람들의 분노를 대변하는 것이지 진보정치, 좌파정치의 씨앗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그는 좌파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도 못했고, 새로운 리더십을 만들지도 못했으며, 진보신당 고립주의자들을 진보정치의 새로운 장으로 이끌어내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의 행보는 진보신당 어릿광대들의 신념만을 강화시켰을 뿐이다.

    홍세화 체제는 진보신당의 현재를 잠시나마 지탱시켜 주는 힘으로 작용할 따름이었지 새로운 대안과 비전 제시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현 국면에서 보자면 홍세화 체제는 치유되어야할 대상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사회당과의 통합도 새로운 진전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이 통합은 진보신당의 득표율을 높여주는 것도 아니었고 당내 민주주의를 활성화시키는 것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사회당과의 통합으로 인해 당은 더 혼돈의 상태로 전락했다.

    사회당이 보장받은 지분은, 당내 반정치주의적 성향을 강화시켰으며 진보신당의 고립을 더욱 확대재생산 했다. 홍세화 대표가 수사적으로 반정치주의 문화를 조장했다면, 사회당 출신들은 조직적으로 ‘반정치주의’ 문화를 만들어낼 능력이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과거 사회당이 보였던 고립주의를 진보신당을 통해 다시 표방하고 있는 셈이다. 당내 어릿광대들은 때로는 이들과 블루스를 추고 때로는 이들과 갈등하며 난파된 거함을 휘젓고 있다.

    이제 진보신당호의 좌충우돌은 충분히 예견된 사태가 된다. 대선정국의 혼란은 그 결과이다. 사회연대후보 추진, 진보신당 독자후보 선출, 좌파단체와의 연대, 노동자민중후보 추대 연석회의 참가 등 여러 선택지를 둘러싼 지도부의 혼란은 이 당이 과연 하나의 정당인가 싶을 정도의 불신을 초래했다.

    당의 대선 방향은 대표단 내에서조차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고, 당의 선택은 공식통로를 통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외부 언론을 통해 접해야 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최악의 해프닝은 ‘몇몇 당원들이’ 지도부 몰래 시도한 돌출적인 대선후보 기자회견 추진이었다. 당의 대선후보를 ‘일부 당원들이 마음대로’ 발표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쯤 되면 당이 조롱꺼리로 전락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러나 이런 혼란에도 불구하고 진보신당호의 중요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진보신당이 정치적 경험이 미숙한 난쟁이들의 조직이긴 하지만 좌파 내부에서 가장 큰 정치조직이기 때문이다.

    통진당이 균열된 이후 진보신당은 단일 정치조직으로서는 두 번째 규모를 자랑하게 되었다. 통진당은 당분간 진보진영 내에서 고립되었고, 진보정의당은 7명의 국회의원이 있지만 사실상 토대 없는 조직이다. 반면 진보신당은 좌파들 내부에서 10,000 대오를 거느린 큰 세력인 셈이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지속적으로 좌충우돌하는 난파선으로서는 이 대오를 이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의미 있는 정치세력이 될 수도 없다. 진보신당의 혁신이 그만큼 절박하다는 말이다.

    대선 너머를 보자.

    이 글에서 나는 사회진보연대, 새로운 노동정치를 위한 제안자모임, 노동자연대 다함께, 진보교연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나 자신은 이들 단체 가운데 어떤 곳의 회원이기도 하고 정치적으로도 가장 가깝다고 느낀다.

    이들 조직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과연 공통점이라는게 있기는 할까? 이들 조직들의 공통점이란, 대략적으로 말해, 제대로 된 진보좌파정당 건설을 지향하고 대선국면에서 진보좌파 통합후보를 지지한다는 점이다.

    이들 단체들은 대선국면에서 통진당 후보와 함께 할 수 없다면 그 외의 진보좌파의 연대후보가 나와야 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진보정의당도, 변혁모임도, 진보신당의 일부 세력도 이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진보좌파 통합후보의 꿈은 멀어졌다. 노동자민중후보 추대를 위한 연석회의의 좌초는 진보진영의 뼈아픈 현실이 되었다.

    나는 이런 국면에서라면 진보신당이 대선 대응보다 대선 이후를 준비하는 것이 제대로 된 정세판단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세 명의 진보 후보가 나선 마당에 다시 한명의 후보가 더해진다면 진보진영은 또 한 번 웃음꺼리가 될 것이며, 조직 보존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최근 진보신당 부대표인 심재옥 동지는, 지난 시기 진보신당이 보여준 혼란에 대해 대표단으로서 사과를 표하며 진보신당 독자후보 선출이나 대선대응의 난점을 지적하는 글을 당원게시판에 올렸다. 심재옥 동지는 대선 이후 진보좌파정당 창당을 준비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이 주장에 대해 근본적으로 동의한다.

    2013년 이후 정세는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통진당은 당분간 NL식 근본주의를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대외적 정당성보다는 대내적 통합과 관리가 이 조직에게는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다. 진보정의당은 7명의 의원을 지닌 ‘갑’의 지위를 이용하여 대중조직들 내에서 대중적 토대를 갖추려고 노력할 것이다. 반면 변혁모임은 변혁적 좌파정당을 꾸리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진보정의당도 변혁모임도 그들의 뜻대로 될지 미지수다.

    제안자모임, 노동포럼, 다함께 등은 노동자운동에 굳건히 토대를 둔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을 추진할 것이다. 사회진보연대도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며 사회운동적 정당의 건설을 지지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도 중요한 변수는 여전히 진보신당이다. 진보신당은 비록 난쟁이들의 조직이지만 10,000 대오를 거느린 거함(巨艦)이다. 이 거함(巨艦)이 좌초되는가 진보정치 재구성의 토대가 될 것인가에 좌파적 대중정당의 미래가 달려 있다. 진보신당과 노동운동에 토대를 둔 조직들이 화학적으로 융합된다면 통진당과 대결할 수 있는 새로운 진보적 대중정당을 건설할 수 있다.

    제대로 된 진보좌파 대중정당의 존재는 변혁모임의 좌편향과 진보정의당의 우편향을 넘어설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다. 비록 시간이 필요하긴 하지만 노동현장에 토대를 둔 변혁모임과 진보좌파적 대중정당은 함께 가야할 동지이다.

    그러나 당분간은 변혁모임 스스로 계급정당의 길을 추진하도록 지켜보자. 그들 스스로 진보좌파적 대중정당과 함께 하려할 때 그때 함께 하면 된다. 더불어 대중적 토대를 둔 좌파적 대중정당은 선택을 유보하고 있는 진보정치세력에게 강력한 메시지가 될 수 있다. 진보좌파와 함께할 것인가 우경화의 길을 갈 것인가의 선택. 이들에게 선택을 강요하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된 진보 좌파적 대중정당의 건설이 필요한 시점이다.

    필자소개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박사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