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을 잃은 여자와 빛을 잃은 남자
    [서평] 『희랍어 시간』(한강/ 문학동네)
        2012년 10월 27일 01:1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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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거실 소파에 앉으면 텔레비전과 그 아래에 놓인 받침대의 유리문이 정면으로 눈에 들어왔다. 검은 모니터와 회색 테두리는 겹쳐진 직사각형이 되었고, 받침판은 그 도형에 두 줄 가로선을 더해 평행의 직선들이 여러 겹으로 보였다. 아랫부분은 위아래로 뻗은 유리문과 텔레비전 받침이 세로로 구역을 나누었다.

    나는 모눈종이와는 거리가 먼, 그 가로선과 세로선의 구역에 맞추어 머릿속으로 한글을 써보곤 했었다. 자음과 모음, 선과 동그라미들을 머릿속으로 겹쳐보았다가 나누고, 한껏 눌러보기도 했다. 텔레비전 받침대의 가로 테두리 부분에 글자가 올라가려면 양 옆을 한없이 잡아 늘여야 했다. 많은 글자를 올릴수록 평소와 같은 모양의 글자가 되었고, 외로운 글자가 될수록 일그러뜨려야 쓸 수 있었다.

    희랍어를 배우는 여자가 가장 좋아하는 글자는 ‘숲’이다. 그리스 신전 풍의 지붕과 아래의 탄탄한 기반부, 마치 탑처럼 보이는 허리로 연결된 모양이 안정적이다. 여자는 그 글자를 발음할 때 입이 움직이는 모양을 좋아한다. 음성이 나오기 전 오므라들기 시작하는 입술의 움직임, 조심스레 시작되다가 부드러운 파열음마냥 끝나는 소리, 입술을 오므리며 완결 지어지는. 여자는 약속으로서의 언어를 부수고 눈과 귀와 입술로 느껴지는 새로운 장르의 예술을 시작한다.

    그녀는 말이 가지는 느낌이나 냄새, 미세한 움직임에 너무나도 민감했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말들이 하나로 응축된 단어를 생각해보다가, 때론 빅뱅만큼 파괴력을 가진 말을 내뱉는 찰나의 악몽을 꾸기도 한다. 그래서 그녀는 말을 잃었다. 그리고 희랍어를 배우러 다닌다.

    ‘채식주의자’와 ‘바람이 분다, 가라’에 이어 이천십일 년 한강은 <희랍어시간>을 내놓는다. 한강 소설이 가지는 특유의 미묘한 내음새는 여전히 진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소 친절해졌다.

    <희랍어시간>의 줄거리는 복잡하지 않다. 현재 시점에서 말을 하지 않는 여자는 희랍어를 배우는 아카데미에 다니고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는 그 아카데미의 강사다. 그러나 한 여자와 한 남자의 기척이 만난다는 광고 문구를 읽고 두 사람의 연애 이야기를 상상한다면 <희랍어시간>을 집어 들지 않기를 바란다. 잔잔하게 들끓는 마음이 담긴 책장을 넘기다 보면, 셀로판지로 투과해보는 듯한 과거와 현재가 펼쳐지면서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가만히 들여다보게 된다.

    남자는 십대 후반부터 독일에서 살았다. 그는 독일 아이들보다 희랍어를 잘하는 신기한 동양인이었다. 대학에서는 희랍철학을 배웠다. 희랍의 논증 방식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신을 부정하는 희랍식 논증을 알고 있다. 문득 삶 자체에 감사해야 한다고 믿는 여자를 떠올린다. 어릴 적 앓은 열병으로 말을 잃은 여자. 그의 말을 읽기 위해 입술을 바라보는 줄 알면서도 세차게 비비고 싶은 사람. 세상에 존재하는 아픔들을 돌보지 않는 신은 선하지 않다. 혹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둘 다 아니라면 신이 아니다. 그는 놀리는 듯 진지하다. 여자는 발끈해서, 신은 선하면서 슬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희랍어에서 ‘신적인 것’과 ‘본다’는 동사는 흡사하다. 남자는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고 있다.

    남자는 유전적으로 시력이 매우 나빠서 아주 어두운 곳에서도, 아주 밝은 곳에서도 잘 볼 수가 없다. 서서히 사그라지는 시계는 윤곽을 잃어가고 비닐봉지를 머리에 뒤집어씌운 마냥 어슴푸레한 색채들이 다만 명암을 가질 뿐이다.

    그는 독일로 가기 직전 불교에 관한 책을 사러 들렀던 수유리의 늦은 아홉 시를 기억한다. 보르헤스의 불교 입문서를 펴들면 떠오르는 그날 밤, 차가운 공기와 묘하게 두근대는 발걸음. 언제든 그날의 파아란 달을 볼 수 있다. 그는 서른 중반 즈음이 되자 가족의 반대에도 한국으로 돌아와서 희랍어를 가르치는 아카데미에서 일한다.

    한강은 ‘그려준다’. 주변의 사물로 말하고, 그들의 행동으로 말하고, 주변의 소음으로 말한다. “엎질러진 어둠”을 긁는 자동차의 굉음, 풀밭에서 들리는 여치 소리, 매캐한 내음, 아파트 담장 저편으로 내밀고 있는 아카시아. 천천히 문장을 훑어가다 보면 나도 어느새 그 장면을 걷는다. 어디선가 본 듯한 길거리를 나의 눈으로, 불길이 붙어 푸르게 일렁이는 명치를 껴안고 휙휙 지나치고 있다. 가만히 흔들린다.

    희랍어는 동사에 모든 의미를 담을 수 있다. 과거의 한 시점에 일어났던 일이 다시 일어난 것인지도, 주어가 다시 그 자신에게 행한 재귀 용법인지도 동사가 변화하며 말한다. 말이 짧고 간결하지만 모두 알려준다. 언어가 정점을 찍었던 시대였다. 고도로 정교해진 언어는 다시 단순해지는 과정으로 들어선다. 희랍어는 이제 쓰이지 않는다. 말을 잃은 여자와 빛을 잃은 남자는 희랍어 강의를 시작하기 전 아카데미의 교실에 침묵하며 앉아있다.

    희랍어를 배우고 싶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담아내는 응축된 동사. 시작되기 전에 이미 모든 내용이 결정되어야 내뱉어질 수 있는. 소설 군데군데 희랍어로 적혀 있는 단어들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고등학교 수학에서 종종 쓰이던 파이와 같은 문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 나에게 이 ‘그림’은 수학 기호로 다가올 뿐이지만 고대의 희랍인들에게는 의미 그 자체였으리라.

    나는 한강의 소설을 한 자리에서 읽어낸 적이 없다. 한글인데도 마치 희랍어 같다. 문장마다 침묵하며 맺혀있는 빅뱅을 터뜨리고 넘어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책의 호흡은 길고 느리지만, 결코 담겨있는 마음을 같은 숨결로 읽을 수 없다. 책 표지처럼 빗방울이 차창에 맺히는 날이면 더 좋을 듯하다. 읽는 도중 의자를 뒤로 젖히고 천장을 바라보는 순간이나, 앞에 놓아둔 사과도 한입 먹어가면서 한강의 희랍어를 잠시 멈출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내게로 찬찬히 풀려 나오는 데에는 물리적으로도 시간이 흘러야 하더라.

    필자소개
    연세편집위원 아메바 trythemoment@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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