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구도 ‘종북’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노선 없는 현실론'의 결과물...'의리'와 '조직'만 남아
        2012년 05월 25일 10:1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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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돌리지 말고 종북인지 아닌지 말해 주세요.”

    ‘MBC 백분토론’에서 ‘돌직구녀’로 유명해진 여성 시민논객이 이상규를 몰아붙입니다. 이걸로 게임 끝! 이름도 잘 지어요, ‘돌직구’라…

    즉문즉답이 생명인 토론에서 ‘어~ 그건 이렇고’ 식으로 설명하는 순간 이미 진 거죠. 말이 길어지는 건 단칼에 쳐내지 못할 사정이 있거나 자기도 잘 모르거나, 둘 중 하나거나 둘 다거나 이거든요.

    100분 토론에 참여한 이상규 당선자

    구당권파의 ‘특별한’ 화법

    ‘구당권파’로 불리는 분들은 북한 얘기만 나오면 경직됩니다. 북핵 문제나 북한 인권 문제, 그리고 삼대 세습 문제가 그것들이죠. 지켜보는 처지에서 보면 그리 곤란한 질문이 아닌 듯한데, 이상할 정도로 유연하게 넘기질 못하더라구요.

    이분들의 답변에는, 뭐랄까, 정해진 패턴이 있는 것 같아요.

    ‣ 북핵 문제 : 원칙적으로는 반핵이다. 다만, 미국과 맞서야 하는 북한의 사정을 고려해 볼 때….

    ‣ 인권 문제 : 당연히 인권은 소중하다. 다만, 엄혹한 상황에서 나라를 유지해야 하는 북한의 형편을 고려하자면…

    ‣ 삼대 세습 : 우리 기준으로 볼 때는 참 이해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북한 내부 문제로서…

    이렇게 ‘일반론 → 북한의 특수성’으로 흐르죠. 이게 참 답답합니다. 순서만 바꿔도 완전 다를 텐데 말이죠.

    “북한의 특수 상황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평화’와 ‘인권’이라는 가치는 어떤 체제도 거스를 수 없는 보편적 가치다.”

    “세습은, 북한에서는 받아들일 수 있는지 몰라도,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문제다.”

    이렇게만 시작해도 충분히 얘기를 풀 수 있습니다. 앞의 두 문제는 정전과 평화협정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죠. 세습도 현실의 북한 정권을 부정하고서야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느냐로 가면 되거든요. 실제로 중국은 물론 미국도 이렇게 접근하잖아요?

    과거의 덫에 사로잡히다

    저는 ‘종북주의’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00주의’란 ‘00을 기원이자 목표로 삼는 이념(신념)’이란 뜻입니다. 가령 ‘자유주의’라 하면, ‘자유’를 개인의 기원이자 목표로 삼는 이념이겠죠. 따라서 ‘00’은 ‘가치’를 담습니다.

    그런데 ‘종북’이란 게 무슨 가치란 말입니까? ‘북한 추종’이 존재의 기원이자 목표다? 웃기잖아요? 설령 그렇더라도 ‘북한의 무엇을?’이라는 게 따라 나와야만 합니다. 그 순간 별 게 아니게 되는 거죠.

    저 보기엔, 종북주의라는 프레임을 만든 사람도, 그 프레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모두 과거의 덫에 사로잡혀 있지 않나 싶습니다.

    80년대 중반에 이른바 ‘강철서신’이 학생운동권을 강타했더랬죠. 별 것도 없어요.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내세운, 참 소박한 이론이었습니다. ‘주체사상’ 말이죠. 한국을 미제의 식민지로 규정한 ‘식민지반봉건(반자본)’론이라는 걸 곁들였죠.

    정작 학생들을 사로잡은 것은 이론보다는 ‘품성론’이었습니다. 사회주의에 흠뻑 빠졌지만 자유분방하던 학생들에게 ‘바른 생활’과 ‘의리’는 매서운 질타였습니다. ‘대중 노선’은 비밀스럽던 운동을 편하게 대할 수 있게 해 줬고요.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 이들에게 주체사상 같은 이론은 더 이상 없다고 봅니다. 남은 것은 현실적인 힘뿐이죠. 민주노동당을 장악하고 급기야 현실 권력 근처까지 다가가게 한 바로 그것, 의리와 조직! 이것이 이번 통합진보당 사태의 바탕에 깔린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 아닌가 싶습니다.

    이 ‘노선 없는 현실론’이 그들을 궁지로 내몬 겁니다. 낡은 이념을 대체할 것이 없는 상태에서 곧장 과거의 뿌리를 캐내는 쪽으로 몰렸다는 거죠.

    그걸 반성하지 않은 채 그냥 들고 왔던 게지요. 이전에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지만 그럭저럭 넘어갔습니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죠. 조중동이 물고 늘어지고, 국민들 관심도 집중되고 있으니까요.

    결국, 북한 문제에 대답을 잘 못하는 것은 ‘말 못할 사정도 있고’, ‘자기도 잘 몰라서’ 그런 겁니다. 분명 시대착오적인 논란이지만, 스스로 불러들인 것이기도 합니다.

    ‘최소한의 이념’이 필요한 때

    이상규가 백분 토론 다음날 라디오 인터뷰에서 ‘사상의 자유’를 이야기하더군요. 답답했습니다. 사상의 자유는 남들이 ‘말하지’ 못하는 사상을 ‘말할’ 때는 빛나지만, 말 못할 것을 숨기는 경우에는 초라합니다.

    물론 ‘돌직구녀’는 전 국민이 지켜보는 데서 대답을 강요했습니다. 엄연한 폭력입니다. 허나 어쩝니까? 그럼 대답 안 할 겁니까? 양심수와 정치인은 엄연히 다른 것을요.

    ‘진보=종북’의 얼개를 짠 저들은 통진당 당사를 압수수색하여 당원 명부를 가져갑니다. 새누리당은 연일 ‘종북주의자 축출’을 외칩니다. 급기야 대한문 앞 쌍용차 해고자 분향소가 털리고 맙니다.

    분향소가 헐리고 한 여학생이 울먹이며 들고 있던 손팻말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오늘 22명 쌍용차 노동자의 죽음이 철거당했습니다.”

    진보 정치인을 10명 넘게 배출했는데도 여전히 이렇게 고통과 슬픔을 호소하는 처지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지금이야말로 진보진영의 이념을 마련하는 쪽으로 뛰어들 때입니다. 진보의 틀을 짜는 데로, 진보라면 마땅히 갖춰야 할 최소한의 이념을 장만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자는 거죠. 있지도 않은 것, 단단한 것, 꽉 짜인 것 말고 가장 기본적인 것,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것, 그 안에서 호소하기보다는 당당하고 자유롭게 노닐 수 있는 이념 말이죠.

    희미한 낡은 이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건 구당권파만이 아니었습니다. 내세울 것 없는 진보이기는 이짝 저짝 마찬가지였습니다. 오죽하면 새누리당 의원들이 ‘진보우파’를 표방할까요.

    필자소개
    민주노동당 활동을 하였고 지금은 정의당의 당원이다. 수도권에서 오랫동안 논술 전문강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부산에 정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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