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검열공화국!
    [책소개] 『잠시 검열이 있겠습니다』(한만수/ 개마고원)
        2012년 10월 20일 12:1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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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69년 한 성냥회사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걸작 <나체의 마야>를 겉면에 인쇄한 제품을 내놓았다. 성냥은 불티나게 팔렸지만 법원은 성냥갑에 찍힌 명화는 더 이상 명화가 아닌 음화라며 음란죄를 물었다. 이른바 ‘유엔성냥 사건’. 2012년 방송통신심의위원 박경신은 예술과 음란이 어떻게 다른지, 국가가 이 문제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 것인지 묻기 위해 자신의 블로그에 성기노출 사진을 올렸다가 기소당했다. 죄목은 역시 음란죄.

    2. 1948년 여순사건을 빌미로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그 해에만 12만 명을 검거·투옥한 것을 시작으로 반세기 넘게 사상과 양심의 심판자 노릇을 했다.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가 형법으로 대체할 것을 권고할 정도로 당대에 이미 명분을 잃은 이 법은 민주화 이후 서서히 사문화의 길을 걷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 등장과 함께 다시 발톱을 드러냈다. 그 중 백미는 얼마 전 트위터에 북한 관련 ‘농담’을 올린 죄로 사진사 박정근 씨에게 징역 2년을 구형하는 기염을 토한 것. 근엄한 재판정에 울려 퍼진 박씨의 농담이란 이런 것들이다. “장군님 빼빼로 사주세요” “김정일 카섹스!”

    3. 1980년 광주학살의 주범 전두환을 26년 후에 단죄하는 내용을 담은 강풀의 웹툰 <26년>은 일찍이 영화화가 결정됐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수차례 엎어져야 했다. 제작 취지에 공감하는 시민들의 십시일반에 힘입어 스크린에 걸릴 수 있게 됐지만, 이 작품이 2003년에 처음 기획돼 애초 원제가 ‘23년’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10년 가까이 지체된 셈이다. 한편 외국계 투자회사 맥쿼리코리아와 이명박정부의 유착 의혹을 추적한 다큐멘터리 <맥코리아>는 메인 포스터가 영등위에 의해 배포 금지됐을 뿐만 아니라 개봉일을 코앞에 둔 지금까지 역시 ‘알 수 없는 이유’로 등급 결정이 미뤄지고 있다.

    세상 모든 검열에 관한 종횡무진 뒷담화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검열국가다. 시대에 따라 검열주체가 정치가에서 자본가로 바뀌고, 수단이 먹칠과 가위질이란 물리적 제재에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밀한 공포로 바뀌었을 뿐, 감시와 금지를 무기로 한 외부검열과 이에 따른 ‘셀프검열’의 확산이라는 순환기제는 늘 대동소이하다.

    이 책은 일차적으로 그런 검열에 관한 뒷담화다. 보도지침이 한국 언론을 동토로 만들었던 80년대와 싸움의 대상이 정치권력에서 자본으로 이동해가던 90년대를 신문기자로 살아냈고, 40대 너머의 삶을 검열연구로 채워가고 있는 저자는 생업과 학문의 여정에서 만난 근대검열 100년의 풍경과 흔적들을 생생하게 복원해낸다.

    독자들은 저자를 따라나서며 우선 금지어를 놓고 벌어지는 권력과 언중의 숨바꼭질을 목격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행간을 무시한 채 특정 단어를 문제 삼는 ‘부분주의’ 검열이 일제 총독부조차 용도폐기한 구닥다리 수법임을, 같은 맥락에서 최근 여성가족부가 남발하는 ‘19금 딱지’ 공세의 지독한 촌스러움을 체감할 것이다. 또 명예훼손죄와 그 친구들(괘씸죄·불경죄·대역죄)의 계보를 통해, 이 죄목들이 실은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귀한 분들’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치지 못하도록 ‘아랫것들’의 입을 막는 자물쇠에 불과함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또한 마광수-장정일 필화 사건을 돌아보며 ‘에로티시즘’이란 전통적 금기를 대하는 한국인들의 태도가 얼마나 유연해졌는지 느낄 것이다. 그런 한편 김수영의 유작 시 「김일성 만세」에 대한 껄끄러운 반응에서, 한국 사회가 레드콤플렉스라는 또 하나의 금기에 갇혀 있는 현실도 접할 것이다.

    과거 ‘벽돌신문’ 등의 유행어를 남기며 시끌벅적하게 이뤄지던 자기과시적 검열이 소리 소문 없는 은폐적 검열로 ‘진화’하는 과정과, 공권력과 자본력이 민간인 사찰과 개인정보 수집으로 스토커 행세를 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도 몸서리치지 않을 이는 드물 것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한국 사회가 여전히, 아니 더욱 지능적이고 교묘한 검열국가로 이행하고 있음을 경고한다.

    숨은 검열 찾기

    우리의 몸은 얼마나 자유로울까? 예절과 매너가 신체를 옥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이 책에서 저자는 검열을 사전적으로만 정의하지 않는다. 감시와 금지 규범을 포함해 표현의 자유를 훼손하는 모든 행위를 광의의 검열로 해석하며 우리가 몰랐던 숨은 검열과 그 이면을 두루 살핀다.

    그에 따르면 종교의 자유가 만개한 한국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비기독교인들에게 강요하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나, 드라마 주인공의 운명에 간여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작품 자체의 수명을 좌지우지하는 시청자(대중)는 모두 숨어 있는 검열행위요 검열관이다.

    저자는 검열이 작품의 완성도와 평판에 끼치는 영향에도 눈길을 준다. 『걸리버 여행기』는 당대 세태를 풍자한 ‘휴이넘’과 ‘라퓨타’ 편이 삭제된 채 출판됨으로써 ‘모두가 알지만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문’, 그저 아동을 위한 신비한 동화로만 기억되고 있다. 일제 식민지 시기 문인 강경애가 쓴 단편 「소금」은 검열당국의 붓질로 결말부 300자가 사라졌는데, 저자와 국과수가 합작한 이 작품의 복원 과정에서 작가가 검열에 대비해 플롯을 일부 포기하면서까지 핵심을 작품 곳곳에 나눠 장치하는 고육책과 그런 저자의 처지를 인지하고 이야기를 능동적으로 독해할 줄 알았던 당대 독자들의 ‘이심전심’이 드러나는 장면은 경탄과 씁쓸함을 동시에 안겨준다.

    검열에 저항하기, 검열을 우회하기

    저자의 관심은 검열자에게만 있지 않다. 금지가 있는 곳에 위반이 있는 법. 권력이 본능적으로 금지와 통제를 욕망하듯 인간은 아는 대로, 느끼는 만큼 표현하고픈 욕망이 있다. 그 위태로운 숨바꼭질. 검열이 사납거나 지능적이라면 위반은 비장하거나 유쾌했다.

    당국의 검열공세에 200개의 1회용 인스턴트 필명으로 맞선 루쉰(이 이름조차 필명이었다). ‘카더라’ 화법으로 필화를 면한 박지원과 세르반테스. 일제의 검열에 만주로 일본으로 인쇄망명을 떠났던 100년 전 문인과 출판인들. 100년 뒤 이명박정권의 인터넷검열을 피해 구글로 사이버 망명에 나선 누리꾼들.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가 강요한 ‘건전가요’와 ‘명랑사회’에 노가바(노래가사바꿔부르기)식 비틀기와 가리방(간이 등사기)으로 찍어낸 불법유인물로 대항한 학생들. 정보공개와 카피레프트 운동으로 정보독점을 공격하는 위키리크스와 ‘하얀 해커’ 어노니머스. 자본이 박대한 <두 개의 문>과 <26년>을 일으켜 세운 소셜펀딩 운동. 저자는 오늘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와 자유가 검열에 저항했던 이들의 활약과 희생에 발 딛고 있음을 꼼꼼히 기록해둔다.

    ‘착한 정부’? 속지도 쫄지도 말라

    이명박정부와 함께 탄생한 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통신이라는 공적·사적 네트워크 정책을 통괄하는 무소불위의 기구였다. 저자는 또한 방통위가 영화를 제외한 민간 검열을 총괄하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예산과 심의 집행권을 틀어쥠으로써 현정권이 꿈꾼 검열국가의 ‘바지 사장’으로 기능했다고 꼬집는다. 현정권 최고 실세였던 방통위원장 최시중은 감옥에 갔고, 누가 됐든 정권의 주인도 곧 바뀔 것이다. 그래서 이른바 ‘착한 정부’가 들어서면 검열은 사라질까? 저자의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인쇄일-발행일을 다르게 표기하는 한국 출판계의 관행은 일제가 남긴 출판 검열의 흉터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한 번 만들어진 관행이 당연한 원칙인 양 굳어지듯 일단 시작된 검열과 그 프로세스는 쉬 멈추지 않는 법이다. 제아무리 선한 정부라 할지라도 감시와 통제의 욕망은 권력의 본령이다. 그러니 ‘잠시 검열이 있겠습니다’에 속지 말라. 검열은 ‘잠시’가 아니라 ‘쭈욱’ 계속될 테니. 그러나 미리 쫄지도 말라. 앞서 살펴봤듯 저항과 우회가 살아 있는 한 검열권력의 입막기는 늘 제한적으로만 성공했거나 정반대의 결과를 불러오지 않았던가. 이 책은 이를 위한 연대의 호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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