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 배제되면 노동자만 아니라
사회 주요 이익 모두가 배제돼"
[책소개]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최장집/ 폴리테이아)
    2012년 10월 20일 12:0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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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동자는 10년 가까이 현대차에서 일했는데,
그 사이 자신을 고용한 인력 회사가 일곱 번이나 바뀌었다고 말한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지금 회사에 다니고 있는 건가.’ 하고 자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말에서 나는 존재감을 상실한 채 헤매는, 카프카의 소설 속 소외된 한 인간의 모습을 떠올렸다.”

민주화의 진정한 수혜자는 누구인가? 

이 책은 보통 사람들의 상처투성이 삶을 들여다보고, 그것이 ‘노동 없는’ 한국 민주주의의 결과임을 말한다. 자신의 노동으로 소득을 얻고 가족을 건사해야 하는 우리 사회의 생산자 집단들이 생활 세계와 시민사회, 나아가 정당 체제의 영역에서 사실상 무권리 상태에 있다는 증언인 셈이기도 하다. 그리고 질문한다. 민주화 25년이 지난 지금, 도대체 우리가 꿈꾸고 바랐던 민주화의 수혜자는 누구인가.

“우리가 권위주의와 싸우면서 민주화에 걸었던 가장 큰 기대는, 정치적으로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기대와는 달리, 민주화 이후 시간이 갈수록 노동자들이 시장 상황에 무력하게 휘둘리는 종속적인 지위로 빠져들게 될지는,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일이었다.”

한국 민주주의의 현장을 탐사하다: 인간적 상처들과 공동체의 해체

이 책의 1부인 “ 삶의 현장에서 보는 한국 민주주의”는 최장집 교수가 전주의 지역 자활 센터, 성남의 새벽시장, 경기도 광주의 비닐하우스 농장, 가리봉동의 이주 노동자 지원 기관, 울산의 현대자동차 공장 등을 방문하고 탐사한 기록들이다. “필자가 만난 사람들 혹은 필자가 들여다본 사람들의 삶은, 새벽 인력시장에 나온 일용직 노동자로 시작해 봉제 공장 노동자들과 대기업 노동자를 거쳐 기초 생활 보장 수급자들과 이주 노동자, 그리고 재래시장 상인들, 농민과 청년 비정규직, 신용 불량자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하층의 삶이었다.”

그는 낯선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만나 인터뷰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힘든 일이었지만, 그보다 (아무리 남의 삶이라도) 결핍과 고통을 들여다보는 것이 정신적으로도 괴로운 일이었다고 고백한다. 현장에서 그는 노동의 존엄성과 정당의 역할이 부재한 것,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준 수많은 인간적 상처들과 공동체의 해체를 목격한다.

이 책은 이런 현실에서 민주주의가 그 가치대로 발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깊은 회의와 강한 항의를 드러낸다.
“노동의 시민권이 노사 관계와 정당 체제에서 취약해질 때 그것의 부정적 효과는 사회 전반의 공동체적 결속을 해체시키는 것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 노동이 배제되면 노동자만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주요 이익 모두가 배제된다는 것,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바로 여기에 있다.”

1980년대 초 미국 시카고 대학에서 한국의 노동문제를 다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최장집 교수가 평생 일관되게 연구해 온 주제는, 정치체제가 시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것이다.

민주주의를 정치의 제도나 구조로 말하는 사람은 많아도 그처럼 사회경제적 기초 위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말하는 정치학자는 많지 않다. 일에 대한 헌신 없이 제대로 설 수 있는 사회나 경제가 있을 수 없다면, 당연히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가 튼튼해지고 노동의 존엄성이 공동체의 규범으로 자리 잡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민주주의도 자신의 가치를 발양하지 못할 것이다.

“노동은 모든 사회 구조물의 기반을 이루는 힘이다. 경제성장도 시장도 재벌 대기업도, 그리고 민주 정부도 모두 노동에 기반을 두고 서있다. 따라서 노동의 위기를 말하게 되었다는 것은, 곧 위기의 한국 경제, 위기의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한국 사회를 걱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노동 없는 경제, 노동 없는 시장으로 달려 나가는 한국 사회의 ‘바닥으로의 질주’가 계속된다면, 민주주의도 경제도 유지될 수가 없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민주주의 자체를 잘 제도화하고 실천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서있는 사회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하는 데에도 최대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너도나도 경제민주화, 복지국가를 소리 높여 말하지만…

선거철을 맞아 경제민주화와 복지가 화두가 되고 있지만 최장집 교수는 이에 비판적이다. “오늘날 여당이든 야당이든 모두가 갑자기 경제민주화를 말하고 비정규직 문제 해결과 복지국가를 소리 높여 말하고 있다. 필자가 이를 좋게만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정당들 간에 존재했던 어떤 신념이나 가치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미 상처받고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사회집단들의 규모가 커지고 이들의 표가 선거 결과에 영향을 크게 미치게 된 상황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최장집 교수는 2부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위하여”에서, 지난 정부 시기 복지 정책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사회적 시민권에 기초를 둔 접근은 복지를 위해서도,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복지란 사회나 국가가 의당 시민에게 부여해야 할 수혜이므로 시민은 그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의식을 갖게 하는 한편, 수혜자 개인으로 하여금 자아 존중과 긍지, 삶의 목적과 효능을 견지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칠순을 맞은 젊은 노학자의 작은 책

정치학자 최장집 교수는 1943년생으로 올해 칠순을 맞았다. 이 책은 그가 스스로 자신의 칠순을 기념해 묶어 낸 작은 책이다. 그는 서문에서,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삶에서 결핍과 고통을 들여다보는 것이 괴로울 때마다 스스로 ‘뒤늦게 인생 공부 많이 하는구나.’라고 느꼈다고 했다. 인간의 삶이란 무엇인가, 인간존재의 비극적 운명에도 무너지지 않고 싸울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를 생각했다고도 했다. 엄밀한 글쓰기로 정평이 나있는 최장집 교수가 일흔의 나이에 현실의 삶을 기록하면서 보여 주는 이런 감수성은 기존 글과는 다른 묘미를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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