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협의 당연지정제 폐지 요구
의료민영화로 가는 지름길
    2012년 10월 18일 05:3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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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25일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에 대한 위헌소송을 다시 추진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연지정제 폐지라는 요구는 국민의 지지도 받기 힘들 뿐만 아니라 의사들이 당면하고 있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도 아니다.

질병의 과학적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던 시절 귀신을 쫓아야 한다는 굿판이 벌여진 것처럼, 의협이 당연지정제라는 유령과 싸우고 있는 동안 보건의료체계의 문제는 더욱 곪아갈 것이다. 제대로 된 보건의료체계의 개선을 위해서는 국민과 의사 간 소통과 공동 모색이 필요하다.

당연지정제 위헌 소송 재추진의 배경

국민건강보험법에 규정된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란 일정한 요건에 해당하는 모든 의료기관이 건강보험의 요양급여를 실시해야 한다는 제도다.

이 제도로 인해 국민은 모든 병의원에서 건강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고, 병의원이 시행한 의료행위의 비용은 건강보험이 정한 수가로 동일하게 책정된다.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는 국민건강보험이 사회보험으로서 복지정책의 역할을 하는 근간이 되는 제도로 평가된다.

의협은 건강보험 당연지정제가 의료기관의 “영업의 자유”를 과도하게 침해하며 수단의 정당성을 인정받기가 어렵다고 주장한다. 국민의 입장에서도 질병의 치료방법에 대한 개인의 선호 및 기호가 무시되어 국민의 진료 선택권을 심각하게 제한한다고 주장한다.

의협은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여 2002년에도 헌법소원을 낸 적이 있으나 당시 헌법재판소에서는 7:2로 합헌 판결을 받았다. 이번에 밝힌 의협의 입장 역시 2002년 헌법소원을 냈을 때와 대동소이하다. 의협은 “다시 한번 요양기관 당연지정제에 대한 위헌 여부를 다퉈 볼 필요성이 있어 진행되는 것”이라는 발언을 통해, 이번 헌법소원 제기가 지난 2002년도의 연장선에서 추진되는 것뿐임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그간 민간의료보험은 양적, 질적으로 성장해왔다. 의협이 최초로 헌법소원을 제기했던 2002년 당시, 민간의료보험 시장은 5조 6593억원 정도 규모였으나 2008년 33조원을 돌파하면서 6년 사이에 6배에 가까운 성장을 이뤘다. 보험가입자가 실제로 지출한 의료비에 따라 보장을 해주는 실손형 민간의료보험이 증가하면서 질적인 변화도 생기고 있다. 국민건강보험처럼 병원과 직접 거래를 하거나, 병원의 진료를 통제하려는 계획을 본격화하고 있다.

게다가 지난 3월 발효된 한미FTA 금융서비스 장에서는 건전성 사유 외에는 신금융서비스에 대한 규제를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민간의료보험의 이윤추구와 시장 확대는 더 탄력을 받게 될 것이다.

한편 공적보험인 국민건강보험의 문제는 지속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건강보험의 보장률은 2010년 현재 62.7%로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덜어주기에는 부족하다. 건강보험의 수가 결정 및 운영은 의료기관의 매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지속적으로 갈등을 만든다.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공급체계는 민간부문이 절대 다수이기 때문이다. 공공병원의 비율은 2010년을 기준으로 7.3%, 병상 수 기준으로도 11.8%에 불과하다.

당연지정제 폐지는 의료민영화의 수순

이렇게 민간보험은 성장하고, 국민건강보험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당연지정제가 폐지된다면 건강보험은 더욱 약화될 것이다. 고급 장비와 시설을 갖춘 일부 병원은 건강보험 가입자를 받지 않고 자기들이 정한 고가의 가격으로 진료를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 고소득층에게 건강보험의 필요성은 사라지는 반면, 건강보험이 보장해 주지 않는 항목이 많아질수록 민간의료보험의 필요성은 더 커지게 된다.

결국 당연지정제 폐지는 보편적인 의료서비스에 대한 국민의 접근을 가로막게 되고 의료의 공공성을 위협할 것이다. 국민들이 받게 될 의료서비스는 감기같은 비교적 경미한 질병에서부터 암과 같은 중증질환에 이르기까지 보험가입 여부와 보험서비스의 종류, 보험회사의 종류에 따라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고소득층은 민간보험에 가입해 고급 영리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저소득층은 약화된 건강보험의 보장성으로 인해 병원의 문턱도 넘어가기 힘든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국민들이 의료민영화에 반대하는 것은 이러한 차별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민간의료보험이 국민의 건강에 득이 될 것이 없다는 점도 문제다. 지난 8일 금융위원회에서 40세 가입자가 가입 시점 보험료 1만5000원, 3년을 만기로 갱신되는 실손형 의료보험에 가입했다는 전제로 시뮬레이션을 진행한 결과, 가입자가 82세가 되면 보험료로 매월 166만 6801원을 납부해야 한다고 밝혔다. 대부분의 민간보험의 구조가 이와 비슷하다.

당연지정제 폐지는 의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아

그렇다면 의사들에게는 당연지정제 폐지가 어떠한 형태로든 도움이 될까?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의사들의 불만은 건강보험이 의료행위의 가격을 낮게 통제하고, 그마저도 모자라서 심사를 통해 급여지급을 삭감한다는 것에 있다. 당연지정제가 폐지되고 건강보험이 약화된다고 의사들이 자율적 진료를 보장 받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민간의료보험의 통제력이 강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민간보험회사들은 계약권을 빌미로 의료기관 및 의사들을 그들의 통제 하에 둘 것이며 그들의 영리행위에 방해가 되는 의사 및 의료기관들과의 계약을 해지할 것이다. 결국 의사들의 진료권은 보험회사의 영향력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다.

미국의 경우 대부분의 의사들은 보험회사에 고용된다. 의사들은 보험에 가입된 환자 외의 다른 환자를 진료할 수 없으며 혹 진료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환자의 추가 부담이 필요하다.

보험회사들이 고용한 의사들은 가입한 환자를 얼마나 잘 치료하느냐에 의해서 인센티브를 받는 것이 아닌 보험회사의 이익에 얼마나 많은 기여를 하였는지에 따라서 인센티브를 제공받게 된다. 이를 유도하기 위해 보험회사에서는 보험가입자에게 의료인들의 정보를 직접 제공하는 식의 유인 알선 행위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사들은 환자의 건강상태 및 자신의 지식과 소신대로 진료를 할 수가 없으며 보험회사의 이익을 위해서 진료를 하게끔 유도될 수밖에 없다.

환자, 국민과 의사의 관계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실질적으로 이윤을 추구하는 것은 민간의료보험, 대형병원이지만 현장에서 환자를 대하는 것은 의사다. 의사는 환자의 신뢰를 받을 수 있어야 치료 성과도 좋아지고, 스스로도 만족할 수 있다. 그러나 이윤을 추구하는 시스템이 강화될수록 환자들의 불신은 더 강화될 것이고, 이러한 모순된 요구를 현장에서 의사 개인이 감당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당연지정제 폐지는 의료민영화로 가는 길이며, 이는 국민과 의사의 관계를 더 악화시키는 길이다. 포괄수가제를 반대하면서 의료민영화의 문제를 말했던 의협이 당연지정제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모순이며, 이러한 의협의 주장을 국민들이 얼마나 신뢰할지 스스로 자문해보아야 한다.

의협은 파국으로 가는 주장을 멈춰라

현재 보건의료체계는 문제가 많다. 의사들의 불만도 거기에서 온다. 그러나 그 해결책이 국민과 의사가 함께 건강할 수 있는 보건의료체계를 만들기 위한 방향인지 여부를 고민하고 따져봐야 한다. 그러한 방향에서 정부가 체계적이고 전반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도록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래야 정부에 대한 의사들의 불만에 국민도 공감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이 요구되는 시기에 의협의 당연지정제 폐지에 대한 주장은 그 부담을 직접 짊어져야 할 국민들에게는 물론 “영업의 자유”가 아니라 “국민의 건강”을 우선시 하고자 하는 대다수의 의사들에게도 전혀 득이 되지 않는, 오히려 되돌릴 수 없는 파국으로 가는 주장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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