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 여든 살이 된 것을 맞으며
    [어머니 이야기②] 어머니 아버지의 서울생활
        2012년 10월 16일 03:5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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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머니 이야기]를 연재한다. 우리네 부모님들의 삶은 이름 있는 이들의 삶 못지않게 소중하고 아름답고 역사적인 삶이다. 다만 그 기억을 가족이라는 울타리 내에서만 공유한다. 나의 부모님, 당신의 부모님, 누군가의 부모님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부모님의 평전일 수도, 가족들의 고난한 삶의 기록일 수도, 추상명사 민중이 아닌 구체적 민중의 얘기일 수도 있다. 93년부터 명륜동에서 ‘풀무질’이라는 작은 인문사회과학서점의 일꾼으로 일하고 있는 은종복씨의 연재글이다. 날짜는 지금 시점과는 조금 다를 수 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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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내 아버지 팔순 잔치를 하는 날이다. 아버지 나이 여든 살, 어머니 나이 일흔 일곱 살. 어머니 아버지는 당신들 나이 열 아홉 살, 스무 두 살에 혼례를 치르고 나서 몇 해 뒤 서울에 올라오셨다. 올해로 서울 생활이 50년이 훌쩍 넘었다.

    아버지 고향은 경북 군위군 소보면 화실이다. 지금도 하루에 버스가 네 번쯤 들어가는 산골이다. 어머니 고향은 화실에서 걸어서 1시간 30분쯤 걸리는 새기터다.

    두 분은 아버지 누나 소개로 만났고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않고 혼례를 치렀다. 그때는 1953년도 한국전쟁이 막 휴전을 했다. 아버지는 집안 장남인 시골 큰아버지를 대신해서 군대에 들어갔다. 트럭을 모는 운전병이었다. 잠시 휴가를 나와서 어머니와 혼인을 했다.

    어느 한 시골 마을의 모습

    아버지가 안 계신 동안 어머니는 화실에서 시부모님과 시아주버님, 시동생들을 더 해서 스무 명이 넘는 시댁 식구들 시집살이를 했다. 어머니는 겨울 찬 새벽에 우물을 길어오면서 손이 터지고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고된 시집살이지만 꿋꿋하게 버티며 해냈다. 남편은 군대에서 일 년에 한두 번 오고 만다. 하지만 시부모님께서 똑 소리 나게 살림을 잘하는 어머니를 따뜻하게 대해 주셔서 덜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서울로 올라가야 살 수 있다는 마음을 다 잡는다.

    무더위가 푹푹 찌는 여름 한 날 어머니 시어머니께서 무를 두 개 뽑아 오셨다. 어머니 보는 앞에서 “야야, 어느 무가 더 커 보이노?” 어머니 보기에는 그게 그것 같아서, “와요! 어머니 두 개 모도 비슷하고마!” “그래도 잘 좀 봐라. 이 짝 게 좀 더 커 보이지 않나!” 하시며 시어머니는 당신 오른손에 든 것을 들어 보였다. 시어머니는 무 한 개를 대구에 사는 둘째 시아주버님 댁에 주려고 하는데 좀 더 큰 것을 주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까지 무를 가지고 그러시냐 두 개 다 드리라고 했더니 시어머니는 펄쩍 뛰시면서 시아버지가 아시면 난리 난다고 했다.

    그 말씀을 듣고 어머니는 시골에서 하루라도 서둘러서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버지가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내 부모님은 서울로 떠났다. 시어른들은 눈물바람으로 길을 막았다. 눈 감으면 코 베 간다는 서울에서 어떻게 살겠냐고.

    어머니 아버지는 딱 쌀 한 말과 차비만을 손에 쥐고 서울에 왔다. 어머니는 길을 돌아다니며 참기름을 팔고 아버지는 종이 공장에서 기름밥을 먹으며 살았다. 어머니가 잠을 자는 곳은 여러 사람이 함께 썼는데 밤에 잠시 뒷간이라도 다녀오면 몸을 누일 곳에 없어 다리를 세우고 웅크리고 칼잠을 자야했다. 아버지는 서울 돈암초등학교 앞에서 풀빵장사를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빵이 팔리건 안 팔리건 날마다 500원을 가져 오라고 했고 아버지는 그렇게 했다. 어느 날은 어머니가 아버지 가게에 가서 빵 하나 달라고 했더니 모르는 사람 보듯 하면서 돈을 받고 팔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일을 생각하면 빵 하나 거저주지 않는 남편이 섭섭하기도 했고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벌려는 마음을 보면서 믿음직스러워했다.

    아무튼 어머니 아버지는 알뜰하게 돈을 모아서 판잣집이라도 당신 집을 샀을 때 하늘이라도 날듯이 기뻐하셨다. 어머니는 혼례를 치르고 5년 동안 아이를 못 낳았다. 은씨 집안에서 쫓겨 날 판이었다. 근데 혼례를 치르고 5년이 지나서 첫아들을 낳았고 그 뒤로 아들만 셋을 내리 낳았다. 한 동안 씨받이 얘기를 오갔던 집안 어른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내 아버지는 초등학교 3학년쯤 다녔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문턱에도 못 들어갔다. 두 분 모두 1930년대 일본강점기에 태어나서 살기 무척 힘들었다. 아버지 집안에서는 작은 아버지만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고 모두들 농사일을 하느라 공부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여자인 어머니는 더 했다.

    어머니는 공부를 못 한 것이 늘 마음에 한이 맺혔다. 글을 쓰거나 계산을 할 때 생각대로 되지 않으면 못 배운 것을 한탄하며 내 자식만은 공부를 잘 시켜야지 다짐했다. 그래도 어머니는 지금 서툴기는 하지만 읽고 쓰고 더하고 빼기 하는데 크게 힘들어 하지 않는다.

    어머니 나이 환갑이 넘었을 때 동네에서 하는 한글교실에 몇 번 나가시더니 금세 배우셨다. 그만큼 어머니는 머리가 좋았고 은씨 집안에 들어와서 아들 넷 모두에게 집을 사 주고 대학 공부까지 시킨 것은 모두 어머니가 알뜰하게 살림을 하고 머리가 똑똑해서다.

    어머니는 자못 심각하게 이런 말을 하신다. “내가 초등학교만 나와도 이렇게 살진 않을 텐데. 어디 장관 마누라쯤 되었을 텐데!” 그럼 난 이렇게 말한다. “그럼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을 거고, 어머니 아들 넷을 못 보았을 텐데 그래도 좋아!” 그러면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면서 네 아버지는 모르겠지만 내 아들들을 못 본다면 안 되지 하신다.

    어머니는 아들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 이름을 부를 때면 종찬아, 영수야, 아니 종복아 하면서 꼭 형부터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내 동생 영일이가 태어나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어머니가 아들들에게 끔찍하게 사랑을 쏟아 부을수록 남편과 며느리는 찬밥 신세가 되었다.

    오늘은 여든 살 맞은 아버지 잔칫날인데 어머니 얘기만 많이 했다. 아버지는 내가 책방 풀무질을 처음 열 때 작은아버지 밑에서 10년 넘게 일하다 받은 퇴직금 천만 원을 고스란히 보탰다. 난 1993년 4월 1일에 책방 일을 시작했고 아버지는 서너 해 뒤에 책방에 나오셔서 도와주고 있다. 달마다 50만 원을 드리지만 그 돈은 몇 해 뒤에 목돈이 돼서 돌아온다.

    난 살면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먹다짐으로 싸운 적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두 분이 목소리를 크게 해서 다툰 일도 열 손가락에 꼽는다. 어머니는 늘 당신이 집안 살림을 잘 꾸려서 싸우지 않고 이만큼이라도 먹고 산다고 하신다. 그 말도 맞지만 사실 아버지가 묵묵히 일을 하면서 살아오셔서 그렇다.

    어머니는 벌써 20년 넘게 버린 종이나 빈병, 고철 따위를 모아 달마다 50만 원 넘게 버신다. 그 일도 아버지가 책방에서 일을 마치고 등가방에 한 가득 종이를 지고 오시고, 길을 가다가 돈이 댈 만한 것을 하나 둘 모아서 그렇다.

    요즘 어머니 아버지는 따로 밥을 잘 안 하신다. 동네 편의점에서 날짜 지난 먹을거리를 가져다가 드신다. 김밥 속에 들어 있는 밥을 볶아서 드신다. 아버지는 날짜 지난 빵을 책방으로 가져 오셔서 간식으로 먹는다. 아버지는 내게 그 빵을 먹으라고 두세 번 말을 하다 내가 한 번도 먹지 않는 것을 보고 말을 안 하지만, 나랑 같이 일하는 둘째형에겐 빵을 아껴 두었다가 꼭 말씀을 하신다. 마음씨 착한 내 둘째형은 고마운 마음으로 아버지가 주신 빵을 먹는다.

    오늘은 내 아버지가 여든 살이 되는 날이다. 슬프기도 하면서 기쁘다. 여든 살이면 자식이 아버지를 보살펴 드려야 되는데 아직도 아버지 어머니 도움으로 책방을 이어가고 있다.

    책방을 처음 열었을 때나 책방이 힘들 때 어머니는 목돈을 성큼성큼 주셨고 아버지는 말없이 그것을 지켜보고 늘 책방에 나오셔서 책을 사오거나 잔심부름을 해 오셨다. 하지만 기쁘기도 하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듯이 책방에 나와 책을 사오고 출판사 사람들을 만나며 일을 하니 나이 드는 것을 잊으며 몸도 마음도 편하다고 하신다.

    아버지는 책방에 못 나오는 날이 높은 곳에 계신 사람이 부르는 날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신다. 난 그럼 이렇게 대꾸다. “아버지가 책방 안 나오시면 그 날이 책방 문 닫는 날이에요.” 이 말에 아버지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내심은 뿌듯해하신다.

    아버지와 내 나이 차이가 32살이다. 내가 48살, 아버지가 80살. 그 나이 차이는 내 아들 형근이와 똑같다. 형근이가 지금 16살이니. 내가 지금 아버지 나이가 되었을 때 내 아들 형근이가 나를 보고도 내가 내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하듯이 그랬으면 좋겠다.

    아버지 어머니 고맙습니다. 이렇게 잘 키워주셔서. 부끄럽지만 큰절 올려요.

    2012년 8월 26일 가을 하늘이 맑은 날 아침에 책방 풀무질 일꾼 셋째 아들 은종복 씀.

    필자소개
    서울 명륜동 인문사회과학 책방 풀무질 일꾼. 93년부터 일하고 있다. 두가지 꿈을 꾸며 산다.온 세상 아이들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는 날과 남북이 평화롭게 하나 되는 날을 맞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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