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민주화라고? 문제는 자본주의야!
    [책소개]『자본주의에 불만있는 이들을 위한 경제사강의』(E.K 헌트/ 이매진)
        2012년 10월 13일 01:5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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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대통령 선거에 나선 유력 후보 모두 입을 모아 ‘경제 민주화’를 내세운다. 한국 사회의 부와 권력이 민주적으로 배분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인 셈이다.

    실업과 불안정 고용, 장시간 노동과 워킹푸어, 주거 대란과 하우스푸어, 학자금 대출과 청년 실업, 절망 범죄와 고독사로 대표되는 한국의 자본주의는 유로존 사태와 월가 시위 등 위기에 직면한 세계 자본주의의 흐름 안에 놓여 있다. 이토록 ‘불안한 자본주의’가 어떻게 오늘날 전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일까?

    1968년 창립한 미국의 진보적인 학술 단체 급진정치경제학연합(The Union for Radical Political Economics, URPE)에서 활동한 E. K. 헌트(미국 유타 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의 《자본주의에 불만 있는 이들을 위한 경제사 강의(Property and Prophets: The Evolution of Economic Institutions and Ideologies)》는 이 ‘불안한 자본주의’의 실체가 궁금한 이들에게 자본주의를 옹호하거나 비판하는 여러 경제 이론을 쉽고 정확히 알려준다.

    1972년 처음 출간된 이래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일곱 차례 개정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의미 있는 자본주의 입문서 구실을 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보수적 경제 사상과 비판하는 급진주의 경제 사상의 끝나지 않는 대결의 역사를 균형 있게 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요약과 부록을 통해 여러 경제 이론의 핵심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칭 ‘마르크스의 제자’가 쓴 이 책은 《소유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1979년에 한국어판이 출간된 적이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를 ‘경제적 팽창주의’라고 옮겨야 하고 마르크스의 이론을 제대로 소개할 수 없던 군부독재 아래에서 책은 찢기고 뒤틀려 구석에 처박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970년대 말보다 더 오른쪽으로 치우친 경제사상이 득세하는 지금에야 우리는 자본주의의 치열한 연대기를 기록한 노학자의 경제사 입문서를 온전히 만나게 됐다.

    경제사와 지성사를 넘나드는, 불타는 자본주의의 연대기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경제학 교과서는 대개 자본주의의 실제 현실이나 역사적 흐름에는 거리를 둔 채 추상화된 논의에만 몰두한다. 또한 신고전파 경제학을 바탕으로 미시경제학이나 거시경제학만 살펴본 뒤 케인스주의나 후생 경제학 등 이단적인 흐름은 부록으로 다루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아예 무시한다. 물론 급진적인 경제학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렇게 어느 한쪽에만 초점을 맞추거나 유명한 학자들의 일생을 중심으로 시대 배경을 간략히 정리하고 이론을 요약하는 대신, 이 책은 봉건 사회의 껍데기를 깨고서 자본주의가 등장한 이래 시장 제도와 축적 방식이 변화하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그 시대의 새로운 경제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나타난 여러 이론들을 소개한다.

    《자본주의에 불만 있는 이들을 위한 경제사 강의》는 자본주의 이전 고대 노예제부터 1990년대 신자유주의 비판과 급진 정치 운동까지 자본주의의 역사를 모두 14강에 담았다. 1강부터 4강까지는 자본주의 시장 체제 이전의 경제 체제인 노예제와 봉건제, 봉건 경제 체제를 지배한 기독교 가부장 윤리의 특징을 살펴보고 봉건 경제 체제의 붕괴와 자본주의 초기 단계인 중상주의의 등장을 사회상의 변화와 함께 정리한다.

    기독교 가부장 이데올로기는 새로운 체제인 중상주의와 상응하면서도 모순되는데, 새롭게 등장한 프로테스탄티즘, 개인주의, 고전적 자유주의 철학은 이 모순을 제거하고 중상주의를 옹호하는 구실을 한다. 이 고전적 자유주의는 정부의 시장 개입은 해롭다는 장구한 이데올로기의 바탕이 된다. 또한 고전 경제학을 대표하는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의 이론의 요점도 잘 정리돼 있다.

    5강부터 9강까지는 산업혁명부터 남북 전쟁 이후 독점 기업이 나타난 시기를 다룬다. 산업혁명 시기의 비참한 노동 환경과 불평등한 소득 분배를 해결하려 한 고전적 자유주의자 호지스킨, 협동적 사회주의를 주장한 톰프슨과 오언, 그리고 칼 마르크스 이전의 몇몇 사회주의자를 소개한다.

    뒤이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개념을 정리하고, 마르크스의 사회 이론과 경제 이론을 두 강에 걸쳐 살펴본다. 마르크스는 그 자체의 모순 때문에 자본주의가 계급은 물론 생산과 교환 사이에 모순이 없는 사회주의 사회로 필연적으로 대체된다고 봤다.

    한편 고전적 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대기업을 옹호하는 신고전파로 새롭게 태어나는데, 신고전파의 자유방임, 사회다윈주의, 새로운 기독교 가부장주의 모두 정부의 시장 개입을 제한하는 태도를 취한다. 뒤이어 신고전파의 복잡한 이론을 간단히 정리한 뒤, 기업과 정부가 공모해 대기업의 독점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한다는 베블런의 이론을 살펴본다.

    10강부터 마지막 14강까지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말까지 비교적 짧은 시기를 대상으로 사회주의 운동의 두 조류인 점진적 사회주의와 혁명적 사회주의를 비교하고 미국 사회의 현실을 비판한다. 대공황 이후 위기에 몰린 신고전파는 정부 지출을 통해 시장 문제를 해결하려는 케인스주의를 흡수했고, 이런 방법을 통한 장기 번영이 미국 사회의 경제 구조를 위협할 것이라는 비판론자의 견해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한편 2차대전 뒤에도 경제적 불평등을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자본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고전적 자유주의는 반공주의를 이용해 자본주의를 향한 모든 비판을 왜곡된 공산주의와 동일시해 매도하면서 체제의 위기를 넘긴다. 이런 시도에 맞선 급진 정치운동은 복잡하고 구조적인 사회 문제의 원인은 자본주의인 만큼 자본주의의 기본 구조를 바꿔야 불가피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공정’하면서도 ‘급진’적인 자본주의 경제사 강의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누구를 선택하더라도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이에게 표를 던지는 셈이다. 그런데 우리가 옹호해야 한다고 강요받는 자본주의란 과연 무엇일까? 경제를 민주화하면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민주적인 소득 배분이 가능할까?

    《자본주의에 불만 있는 이들을 위한 경제사 강의》는 자본주의가 등장한 이래 사회가 변하는 과정을 추적하면서 각 시대의 새로운 경제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나타난 여러 경제 이론을 소개한다.

    근대 이후 경제사와 경제 사상의 전체 흐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경제 이론의 핵심 내용을 정리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신자유주의의 뿌리와 비판하는 급진주의의 뿌리를 함께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공정한 자본주의 입문서’인 이 책은, ‘불안한 자본주의’를 해석하고 바꾸는 데 관심 있는 불만의 세대에게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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