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웃겨라 캔디야!
    [안녕? 페미니즘!] 남자의 '보슬아치'와 여자의 '컷더부랄'
        2012년 10월 12일 04:4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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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세는 개그본능

    요즘처럼 남을 웃기는 재주가 중요한 시절이 있었나 싶다. 천하의 비호감 연예인이라도 TV에 나와 솔직한 유머로 대중을 빵빵 터트리면 금세 호감으로 돌아선다. 성공적인 브라운관 복귀를 꿈꾸는 왕년의 가수든, 신비주의를 고집하다 대중에서 멀어진 배우든 일단 재기를 위해서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내 안의 숨겨둔 개그본능 발휘할 것”이라며 단단히 벼른다.

    이게 어디 연예인뿐이랴. 술자리에서도, 모임에서도, 심지어 채용 면접장에서도 유머감각 있는 사람이 가장 사랑받는다. 남을 웃기고 싶다는 욕망은 그야말로 ‘본능’에 가까운 모양인지, 온 사회가 서로를 상대로 거대한 개그배틀을 벌이는 형국이다.

    그리고 여기, 이 본능을 충실히 따르며 남을 웃기기 위해 서슴없이 망가지는 여자들이 있다. 하루 종일 쇼핑몰에서 보내 올 택배를 기다렸는데 막상 옷을 입어보니 내 꼴이 영 우습고, 나의 기대와도 다르고, 심지어 들어가지도 않아서 난감하다. 이럴 때 이 호모루덴스들은 얌전히 반품을 하는 대신, 혼자보기 아까운 이 모습을 개그 삼아 웹에 올려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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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발 개그본능 좀 죽여”

    그런데 이상하다. 나는 웃기고 싶은데 여자는 웃기면 망한단다. 아무도 나를 ‘여자’로 안보는 이유도, 내가 여태 모태솔로인 이유도, 짝사랑하는 남자와 결국 절친이 되어버린 이유도 도무지 억제가 안 되는 이 몹쓸 개그본능 때문이다.

    예쁜 여자의 개그본능은 아무 문제가 안 된다는 게 함정이지만, 여기에 속하지 않는 대다수 여자들이 ‘여자’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제발 그 참을 수 없는 개그본능은 넣어둬야 한다. 대신 무한히 웃어주라. 남자가 적당히 세련된 유머감각으로 여자를 웃기는 것이 이성애 연애각본의 핵심 조건이라면, 여자의 미션은 철저하게 웃어주는 것이다.

    ‘안생겨요봇(@ASKY_bot)’이 타산지석으로 제시한 저 링크를 클릭하면, 한 여성 웹툰 작가가 소개팅에 나가서 마음에 드는 상대방에게 개그본능을 무한 발사하다 결국 애프터를 못 받고 망한 일화가 그려져 있다.

    남을 웃기는 것이 곧 직업인 개그우먼들조차 ‘남을 웃기는 일’과 ‘여자’라는 정체성이 충돌하며 겪는 분열적 상황을 토로한다. 성형수술과 다이어트로 화제가 된 어느 개그우먼이 자신의 미니홈피에 남긴 글은 “여자답게 살고 싶었습니다”이었다. 선배로부터 “너는 여자로 안 살거니?”란 말을 들으며 “여자로 살지, 개그우먼으로 살지 생각했다”는 이들의 고백은 다음의 질문을 던져준다. 유머가 곧 능력이자 권력인 세상에서 왜 ‘여성’과 ‘개그’의 공존은 성립하지 않는가.

    웃기는 여자는 위험하다

    우리 사회는 씩씩하게 웃어주는 캔디는 사랑하되, 남을 웃기는 여자는 사양한다. 웃지 않는 여자를 참으로 싫어한 나머지, 세계를 제패한 천재 운동선수라 하더라도 생글생글 웃지 않으면 성격이 무뚝뚝하다고 흠을 잡는다. 그렇다고 너무 웃겨서도 곤란하다. 마치 여성들의 말하기를 부정적으로 여겨온 것처럼 남을 웃길 줄 아는 여성은 뭔가 여성적이지 않거나 공격적, 혹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유미라는 예쁜 본명도 버린 이영자와 김미화가 남을 웃기기 위해 사용했던 무기는 여성성이 제거된 뚱뚱한 몸과 우악스러운 일자눈썹이었다. 섹드립으로 점철된 동네 아줌마들의 수다도 그렇다. 아줌마는 여자가 아니니까 웃길 수 있고, 혹은 웃기니까 여자가 아니다.

    웃음은 수많은 학자들의 오랜 탐구주제였다. 방대한 웃음 이론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도 토머스 홉스의 ‘우월성 이론’일 것이다. 영구와 맹구가 우스웠던 이유는 타인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이나 불완전한 실수를 보며 사람들은 자신의 우월성을 느끼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 누가 슬랩스틱을 보며 웃겠냐만, 우리는 여전히 매 주말마다 TV 앞에서 신체를 일그러뜨리고 자신의 바보 같음을 경쟁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기다린다.

    여성들이 개그를 던질 때 처하는 위험한 입장은 여기서 드러난다. 남을 웃기려면 거의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희화화하고 자신을 천한 자리에 위치시키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여성으로서 나의 매력을 반드시 삭감시킬 이 위험천만한 모험에 뛰어들기란, 직업이 개그우먼인 여성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천대받던 위치에서 벗어나 존중받기 위해 투쟁해 온 불안한 존재들이 자기비하 전략으로 남을 웃기는 것은 그래서 가끔 비장해지고 자주 실패한다. 게다가 웃음의 본질적 성격은 의사소통에 있을 진데, 나의 농담을 상대방이 제대로 수신하지 못하면 자칫 멀쩡한 내가 진짜 ‘바보’가 되는 참사가, 즉 농담을 하는 내가 탈취되는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웃음은 그 사회의 규범을 벗어날 때 폭발적으로 유발되기도 한다. 모순적 상황을 발생시켜 웃음을 자아내는 능력은 사회적 질서, 규범, 권력과 나 사이의 간극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시민들에게 물대포를 쏘는 경찰 앞에서 “온수! 온수!”를 외칠 줄 안다는 것은 공권력을 두고도 농담을 던질 줄 아는 나의 우월적 지위를 확인, 또는 과시하는 일이었다. 나꼼수 멤버들이 필사적으로 무리수를 두던 시점이 정봉주 전 국회의원의 수감 이후인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남을 웃기려다가 자신이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 여자의 개그를 주저하게 만든다면, 반대로 ‘웃기는 여자를 위험한 여자로 간주하는 통념’은 여자의 농담을 불온한 것으로 만든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규범이 엄격하면 엄격할수록 여기서 일탈할 때 생기는 진폭이 남성보다 크기 때문에 여성의 유머는 급진적일 수밖에 없다.

    웃기는 것은 곧 세계를 조롱하는 것이다. 남자들의 ‘보슬아치’는 여자들을 조롱하는 농담(!)으로 허용되어 공공연히 떠돌아다닐 수 있지만, 여자들이 아무데서나 ‘비더고자’ ‘컷더부랄’을 외치며 비아냥거렸다간 ‘유영철과 강호순을 풀어버리겠다’는 악플이나 받을 뿐이다. 섣불리 위험한 여자가 되지 말라는 암묵적 종용 때문에 여자들은 개그를 두고 아슬아슬한 게릴라전을 벌인다.

    여기서 필요한 전략은 농담의 종류를 섬세히 구분하는 ‘촉’이다. 웃긴 쇼핑몰 후기처럼 무해한 개그는 과감하게 던져도 되지만, 비더고자처럼 위험한 농담은 악플의 염려 없는 은밀한 곳, 안전한 장소에서 주로 실행된다.

    외부로 유출된 것으로 보이는 여성커뮤니티 게시판

    이 복잡한 속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웃기고 싶다. 토크쇼에 나와서 그동안 말 못한 상처를 고백하던 개그우먼들이 마지막에 남긴 말도 “그럼에도 대중들을 웃기고 싶다”였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이 떠오른다. 대체 개그가 뭐기에 여자들은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이렇게 웃기고 싶은 걸까.

    고단한 한국사회와 웃기는 게릴라 캔디들

    이유는 단순하다. 사는 건 고단하고, 서로가 웃고 웃기지 않으면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내가 어떤 노력을 다해도 한국사회라는 겹겹의 불안 속에서 여자인 나는 결코 안전하지 않고 자아의 성취는 영원히 유예될 것 같다. 이 예감은 취업의 문턱마다, 연애의 고비에서, 끔찍한 여성 표적 범죄의 기사제목을 마주할 때 매순간 나를 따라다닌다.

    딱히 기댈 곳도 없이 엄친딸, 엄친아들과 함께 생애사적 고비를 어렵게 통과해야 하는 나에게 주어진 자원은 자기계발서 몇 권과, 다이어트 후에 내 인생이 달라졌으니 너도 어서 동참하라는 주위의 조언 정도가 전부일지도 모른다.

    노동시장에서 제 몫을 다하는 동시에 매력적인 외모를 갖추고 멋진 남친과 즐거운 연애도 하는 이상적 여성상은 사회가 부과하는 임무이자 내가 욕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 어디까지가 능동이고 수동인지 영 헷갈리기만 하고, 저건 거의 판타지에 가깝다는걸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나의 현실은 내가 사는 변두리 원룸의 안전을 걱정하며, 명품백은 커녕 인터넷 쇼핑몰의 ‘하루특가! 무료배송!’으로 배달된 옷을 입어보다가 낭패를 보거나, 아무 옷이나 입어도 예쁜 훈녀를 훔쳐보며 부러워할 따름이다. 판타지와 현실의 간극에서 오는 갈등과 자괴감은 그야말로 ‘웃프다’.

    외부로 유출된 것으로 보이는 여성커뮤니티 게시판

    이들은 힘들어도 속내를 감추고 꿋꿋하게 웃는 과거의 캔디 역은 사양한다. 대신 내 상황과 현실적 조건의 불일치가 가져오는 이 ‘웃픈’ 상황을 자조적인 유머를 통해 폭로하고, 서로 웃고 웃기며 크게 잘난 것 없는 너와 나의 비슷한 모습을 확인한다. 이들의 자기희화화가 가능한 것도, 불안한 현재를 견딜 수 있는 이유도 분명히 어딘가에 나와 같은 네가 있다는 믿음 덕분이다.

    재미있는 것이 곧 권력이 되는 사회에서 나의 개그본능을 숨겨라 마라 훈계한다고 분개할 필요는 없다. 여자들은 ‘안생겨요봇’의 저 트윗을 두고 “딱 내 얘기” “내가 이래서 망했지”라고 낄낄대는 멘션과 함께 리트윗하면서 저 매뉴얼 자체가 하나의 블랙유머라는 것을 은근슬쩍 드러낸다. 여자들에게 그만 좀 웃기라고 당부한 ‘안생겨요봇’도 실은 이 블랙유머의 협조자인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어차피 일상의 매순간마다 디테일하게 구분된 젠더 역할을 연기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우리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웃고 웃길 것이다. 내 손에 쥐어진 선택지 가운데, 나의 삶을 최소한 유쾌하고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 줄 무기가 사실 이것 말고 또 뭐가 있겠는가.

    필자소개
    필자들은 페미니즘 속 세상, 세상 속의 페미니즘이 일으키는 불화를 열광하고, 성찰하는 연구자들이다. 관계와 소통을 본격적으로 통찰하는 매혹적인 학문이자 사상으로서, 농익은 진리 주장에 머물러 있기보다 설익은 질문에 열려있는 페미니즘을 지향한다. 필자들의 관심사는 저마다 다르지만, 생계부터 정치적 안부까지를 함께 걱정하고 토론하는 생활공동체의 화학작용으로 인해, 각자의 사유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 엄혜진(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서울대 여성연구소 객원 연구원) 김원정(서울대 여성연구소 연구원), 윤보라(서울대 여성학협동과정 박사과정), 이선형(서울대 여성연구소 연구원)이 차례로 글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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