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도 우리는 서로의 삶을 반복한다
    [서평]『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김연수 저/ 자음과 모음)
        2012년 10월 13일 02:4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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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에게 너무 서운했던 것들을, 어느 순간 내가 다른 친구에게 하고 있더라고. 내가 그 친구를 서운하게 만들고 있었어.”

    며칠 전 간만에 만난 오래된 친구가 나에게 머뭇거리며 한 말이다. 서로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한 뒤 각자 다른 생활에 적응하고, 다른 삶을 꾸려가는 것을 멀찍이서 지켜본 시간이, 같은 교실에서 함께 한 시간보다 점점 길어지는 친구였다.

    그런 시간의 차이만큼 서로에게 내심 서운한 게 많이 쌓였었고, 점점 서로를 이해하고 넘어가기 힘들었는데, 각자 삶에서 서로가 모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슷하게 반복되는 어느 순간을 통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날 우리는 이석원씨가 쓴 [보통의 존재]에 나오는 ‘이어달리기의 비유’를 떠올렸다. ‘연애란 이어달리기처럼 전 사람에게 당한 걸 죄 없는 이번 사람에게 푸는 이상한 게임’ 이라는 그 비유가 사실 연애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될 수 있는 것 같다고, 내가 당했던 일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애꿎은 사람에게 하고 있다고, 그 서글프고 찌질한 ‘반복’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렇게 모두에게 반복되는 경험들 때문에, 우리는 공감하고, 새로운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는지 몰라.”

    이어지는 친구 말에 번쩍 생각이 나는 건, 김연수의 소설이었다. 소설에서 그가 쏟아내는 수많은 사람들, 무수한 관계들은 조금씩 서로를 닮았고, 늘 각자의 한 부분에서 촘촘히 연결되어있다. 이번 그의 신작「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역시 가느다랗게 서로 연결되어 반짝이고 있는 삶들의 그물망을 담고 있다.

    어렸을 때 해외로 입양되어 자란 카밀라는 25살이 되어, 자신의 친엄마가 진남이라는 곳에 살던 17살 여고생 미혼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엄마를 찾기 위해 한국에 들어온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은 진남여고의 교장과 무언가 경계 어린 기운이 감도는 진남의 친절 속에서 카밀라는 홀로 친엄마의 진실을 찾아 나간다. 그 과정 속에는 카밀라만큼이나 생생한 많은 인물과 많은 삶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카밀라의 친엄마의 진실들이 밝혀지면서 동시에 드러나는 것은 그 수많은 인물들이 얽힌 방식들이다. 그리고 그 관계들은 서로를 반복하는 모양들이다. A에 대한 미움이, 나에 대한 B의 미움으로 반복되고, 그 유사성과 잔인함의 정도에 따라 누군가는 심한 상처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죽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스포일러가 되고 말 것이다.)

    한편 그러한 반복되는 관계들의 형식도 반복된다. 선생님에 대한 학생의 연정, 여자 아이들 간의 은밀한 감정싸움, 연인의 과거 때문에 신뢰하고 싶어도 그게 쉽지 않은 집착 등 우리가 ‘뻔하다’라고, ‘통속적이다’라고 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은, 사실 그만큼 수없이 반복되어왔고,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모두가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미움과 안타까움이 반복되는 이야기들은 소설 속에서도, 우리 삶 속에서도 ‘풍문’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이 소설은, 뻔한 풍문 속에서 결국 반복되는 상처들의 주인공들을 무작정 연민하지 않는다. 한 때 진남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반복되어 말해졌던 이야기들을 보관하는 ‘바람의 말 아카이브’는 카밀라에 대해, 카밀라의 친엄마에 대해, 지긋지긋한 반복에 희생된 불쌍한 이들이 아닌,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을 다시 바라보고, 미움으로 반복되던 관계들에 대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풍문 속에서 얽히고 설켰던 관계들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서로가 자신을 삶을 반복하고 있기에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내가 너를 미워해서 네가 상처받은 만큼, 나도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있었고, 너에게 받은 상처로 내가 아파한 만큼, 나도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의 삶이 너의 삶 속 어느 순간에 반복되고, 너의 삶이 나의 삶 어느 한 켠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것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 때 필요한 것은, 그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용서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사과’ 역시 중요하다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카밀라의 친엄마인 지은을 끝까지 내몰아간 자잘한 미움들과 폭력들의 고리에 있던 이들이 아카이브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질 때, 그들에게 요구되던 것은 진정한 사과를 통해 이 미움의 반복을 끊어내는 것이다. 반복되는 경험들을 바탕으로 누군가를 새롭게 이해하고, 그동안 이해하지 못하고 당연하게 저질렀던 원망과 미움, 폭력들에 대해 사과하는 것이다.

    나와 나의 친구가, 서로를, 그리고 각자 삶에서 지금 관계 맺고 있던 또 다른 누군가를, 그리고 내내 속으로 나쁜 마음만 품고 있던 스스로에게 사과하고 이해하고 용서했던 것처럼.

    오랫동안 혼자서 간직해온 비밀 하나가 그렇게 풀리면서 미옥의 소녀 시절이 마침내 종말을 고했다. (p.283)

    한편, 이 소설은 개인과 개인을 넘어서, 커다란 크기로 반복되고 있는 사회들도 보여준다. 교육감 선거를 비롯한 수많은 선거에서 후보의 부정적 가십을 캐내는 모습, 여전히 ‘정조’, ‘순결’에 얽매인 사회가 처절하게 내치는 미혼모, 더 이상을 잃을 수 있는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내몰려, 결국 크레인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누군가의 모습 등… 이 소설에는 소설 속 과거의 관계와 현재의 삶이 반복되는, 그리고 소설 속의 삶과 지금 실제 우리의 삶의 반복되어 겹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겹겹이, 다양한 크기로 반복되는 삶들의 그림 속에서, 우리는 어떤 크기의 어떤 사과를 받아야 하는 지 생각해볼 수 있다. 단지 개인 간의 관계뿐 아니라, 사회에서 개인을 짓누르는 어떤 시간을 넘나드는 비루한 반복들에 대해 우리는 떠들어야 하고, 그 떠들어진 이야기를 통해 사회의 누군가 혹은 집단은 다시 주목을 받고, 진정한 사과와 용서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미움의 바통을 넘기는 것은 쉽다. 이 지루한 이어달리기에 새로운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은 너무나 쉽고, 요즈음엔 잔인한 경쟁 속에서 그것이 ‘(나만) 잘 살아남는 법’으로 요구되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는 모두가 상처받은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연민하는 것을 넘어서 공유하는 상처의 깊이만큼 서로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지금 서로의 삶에서 반복되는 것을 깨버리는 것, 서로를 보듬어 안고 사랑하는 것은, 그 어떤 멘토도, 세력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다에는 파도가 쳐야만 하는 것만큼이나 당연하고, 하나의 책임이고, 눈물겹게 힘들지만 아름다운 일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한 번 새롭게 연결된 그물망 속에서 외롭지 않게 반짝거릴 수 있다.

    필자소개
    학생. 연세대학교 노수석 생활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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