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법 권력에 맞서는 개미들의 투쟁
    [서평]『법과 싸우는 사람들』 (서형 저/ 후마니타스)
        2012년 10월 13일 02:3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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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때 법과 사회 선생님을 따라 서초동 법원에 간 적이 있다. 법원에서 준비한 견학 프로그램을 마치고 자유롭게 여러 재판을 방청했는데, 법정의 분위기와 공판 진행은 내가 상상하던 것과 너무 달랐다.

    진짜 재판은 우리가 영화 드라마나 언론에서 접하는 것처럼 ‘멋있지’ 않았다. 공판 일정은 15분마다 있었고 법관과 피고인은 서로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리숙한 피고인은 재판부의 위엄에 쉽게 주눅이 들었고 그가 제대로 대답을 못할 때면 재판관은 대놓고 짜증을 냈다.

    그리고 재판을 받으러 오는 이들 중 많은 수가 변호사 선임을 하지 않고 직접 소송을 진행하는 게 오금이 저렸다. 까딱해서 실수 하나라도 하면 인생이 걸린 싸움에서 지는 게 아닌가. 나는 저 자리에 혼자 선다는 생각만 해도 무서웠다.

    그 때의 경험은 내게 혼란과 실망으로 남아있었는데, [법과 싸우는 사람들]에 나타난 법정도 그리 다른 것 같지는 않다. 이 책의 주인공은 20년 동안 원고와 피고석에 번갈아 서야만 했던 사법 피해자 임정자씨다. 그가 1990년 처음 고소한 이는 간통죄를 저지른 당시의 남편이었고 그 뒤론 부동산 문제로 업자들과 재판을 계속했다.

    20년간의 기록을 따라가기란 쉽지 않다. 임씨는 남편과 김명숙이라는 부동산 업자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 둘 다 1심에서 패소했다. 뒤이어 사기 무고 1심 판결에서도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세기가 바뀐 뒤에도 그녀는 항소와 재심을 계속했지만 뜻하는 바를 이루지는 못했다.

    이 책은 임씨의 소송 흐름과 함께 그가 소송 대리인 없이도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사용한 소송 기술을 자세히 기록한다.

    법관이 항상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지는 않는다는 현실에서, 그는 이런 소송 기술을 ‘법률가와 맞서는 일반인이 알아야 할 생존 법’ 이라고 평한다. 결정적 증거는 사전에 제출하지 않고, 상대측의 거짓말이 한껏 부풀려졌을 때 제시한다. 자료는 법원이 사용하는 형식과 비슷하게 만들어 신뢰감을 주고, 매번 쪽과 열을 명시하면서 재판부에게 확인해보라고 요구한다. 공판 조서에 잘못이 있을 때엔 재판관과 서기관을 고소하는 것도 불사한다.

    임씨만 이런 전략을 구사하는 건 아니다. 그와 비슷하게,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소송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은 ‘법정 계모임’을 만들어 함께 움직인다.

    서로의 재판을 방청해주고 식사를 대접받는 모임인데, 방청석에 사람이 많으면 심리적 안정감은 물론 재판부가 공판 지휘에 신중해지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그들은 법률적 조언을 나눌 뿐만 아니라 사실 확인서를 작성하는 등 공판의 판세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이들이 변호사의 도움을 받지 않는 건 금전적으로 부담이 되어서만은 아니다. 필자는 국선 사선을 막론하고 변호인들은 법관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제도상 재판부의 재량이 매우 커서 당장의 판결 결과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고, 법조인들이 사법연수원 동기 선후배 사이 등의 강력한 유대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해 이후 자신의 경력에도 문제가 생길까 우려한다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려면 혼자 싸우는 수밖에 없다.

    임씨는 거처를 아예 서초동 근처로 옮기고 원래 살던 대전까지 매 공판마다 내려갔다. 법원 앞에는 1인 시위하는 이들이 새벽부터 모여든다. 많은 사람들이 예전 같은 생활과 직업을 포기하고 여기에 매달리고 있다. 사법 피해자들이 법정 안팎에서 전개하는 투쟁은 일견 악착같고 답답해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필자는 그들도 평화와 안정을 원하는 보통의 서민일 뿐임을 일깨우며, 이들이 이를 악물도록 만드는 불합리함이 우리 사법 체계에 숨어있음을 알아차리라고 주문한다. 과연 사람들은 법 앞에서 평등한 시민으로 대우받고 있는가?.

    아주 하찮아 보이는 소송이라도 당사자에게는 ‘우주 보다 더 큰’ 것임이 분명하다. 삶을 지키기 위해서는 삶을 송두리째 내걸어야 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오늘도 법정의 개미들은 싸우고 있다.

     

    필자소개
    학생. 연세대학교 노수석 생활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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