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극적 저항의 지침서,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 "자본의 부속품이 되는 삶 거부"
        2012년 10월 08일 03:1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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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은 1,000여명의 교수 회원들로 구성된 교수단체이다. 87년 창립된 이후 현재까지 사회민주화와 교육개혁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해왔다.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는 민교협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연재하며, 매주 1회 월 또는 화요일에 게재한다. 이 칼럼은 민교협의 홈페이지에도 함께 올라간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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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녹두장군 전봉준이나 레닌 동무 정도의 큰 인물이라면‘노동자 농민 동지여, 우리는 더 이상 뺏길 것이 없다, 일어서라, 이제 우리의 세상을 만들자’라고 외치면서 노동자와 농민을 규합하여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폭식하는 자본가의 탐욕을 견제할 최소한의 장치도 없이 이 땅의 노동자와 농민의 삶은 위협받고 있다. 노동자들은 생명을 위협받으면서 노동을 해야 한다. 농민들은 열심히 일을 하면 할수록 더욱 빚더미에 짓눌린다. 최저 생계비에 한참 못 미치는 법정 최저임금조차 제대로 주지 않는 일자리를 놓고 도시 청소년과 노인 노동자들은 경쟁한다.

    나를 분노하게 하는 것은 노동자와 농민의 삶을 위협하는 이런 상황만이 아니다. 나의 분노는 노동자와 농민의 분노조차 통제하여 없애버리는 상업 언론, 돈벌이 교육, 그리고 이 모두를 지탱하는 국가권력과 자본권력에게로 향한다. 그렇지만 나의 분노는 분노일 뿐 그 이상은 없다. 혁명은 고사하고 부당한 권력을 비난하는 내 말을 들어주는 사람조차 나에게는 별로 없다. 적극적 저항을 시도하지 못하는 나는 소극적으로 저항한다. 나의 소극적 저항의 지침서가 19세기의 미국 작가 허먼 멜빌이 쓴 [필경사 바틀비]이다.

    [필경사 바틀비—월가 이야기](1853년)는 [모비 딕]의 작가로 유명한 허먼 멜빌이 쓴 단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미국 뉴욕의 월가에 있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필경사로 일했던 바틀비라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은 화자가 바틀비의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화자는 주로 부자들의 채권, 저당증서, 부동산 권리증서 등을 처리해주면서 편안한 삶을 살아가는 변호사이다. 이 변호사는 원래 두 명의 필경사와 한 명의 사환을 두고 있었지만 일이 많아지자 바틀비라는 필경사 한 명을 더 고용한다. 바틀비는 처음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한다. 변호사는 성실한 필경사를 새로 고용한 것 같아 만족스러워 한다.

    필경사는 원본을 보면서 필사본을 쓴다. 그리고 필사본은 원본과 대조하면서 검토를 거쳐야 완성된다. 필사본의 검토는 한 사람이 원본을 읽고 다른 한 사람이 필사본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협조가 필요하다.

    변호사와 바틀비 사이에 문제가 생긴 것은 이런 검토에 필요한 공동 작업을 바틀비가 거부하면서부터이다. 고용인이 피고용인에게 어떤 일을 하자고 하면 피고용인은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을 같이 하자는 변호사의 말에 바틀비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그렇게 안하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하며 협조를 거부한다. 필사본의 검토는 필경사의 고유 업무이다. 이는 어려운 일도 아니고 부당한 일도 아니다. 또한 피고용인인 바틀비는 고용인인 변호사의 명령에 복종할 의무도 있다. 그러나 바틀비는 변호사가 되풀이해서 일을 같이 하자고 말을 해도 똑같이 차분하고 단호하게 “그렇게 안하고 싶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 한다. 변호사는 바틀비를 이해할 수 없고 따라서 당황하게 된다.

    바틀비는 필사본 검토의 일을 거부할 뿐 아니라 나중에는 필사본을 작성하는 일 조차 하지 않는다. 바틀비는 변호사 사무실에 있으면서도 업무에 관련된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더구나 바틀비는 그 사무실을 자신의 숙식처처로 삼아버리기도 한다. 난감해진 변호사는 그렇다고 경찰을 불러 무력으로 바틀비를 쫓아낼 엄두를 내지 못한다. 바틀비를 범죄자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변호사는 결국 사무실을 다른 건물로 옮긴다. 그렇다고 바틀비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바틀비는 사무실이 옮겨간 뒤에도 여전히 그곳에 상주한다. 바틀비 문제를 해결하라는 요청을 받은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일자리를 알아 주겠다거나 심지어는 자신의 집에 들어와 살라고 제안하지만 바틀비는 그 모든 제안을 거부한다.

    결국 바틀비는 부랑자 수용소로 송치된다. 변호사는 부랑자 수용소로 바틀비를 찾아가서 사식을 넣어주는 등 가능한 호의를 베풀려고 하지만 바틀비는 모든 호의를 거부한다. 바틀비는 결국 부랑자 수용소에서 죽게 된다.

    보통의 인간과는 너무나 다른 바틀비를 이해하려고 변호사는 바틀비의 과거를 찾아보지만 그가 워싱턴 D.C.에서 수취불능 우편물을 처리하는 일을 한 적이 있다는 정도가 변호사가 알아낸 전부이다. 수취불능 우편물같이 소통의 희망이 없어진 바틀비의 삶을 생각하며 변호사는“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라는 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마친다.

    [필경사 바틀비]의 배경은 19세기 중반 미국 뉴욕의 월가이다. 당시의 월가는 아직 증권거래소가 설립되기 전이지만 미국 자본주의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상업, 부동산업, 금융업이 성행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의 화자인 변호사는 자신이 법률 사업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자본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자본가들의 사업 허가, 채권, 부동산 거래 등의 법적 문제를 해결해둔다는 점에서는 자본의 하수인이기도 하다. 이 변호사가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자본의 하수인 역할을 충실히 하기 때문이다. 이 자본의 하수인은 자기 자신의 하수인인 필경사 두 명과 잔심부름하는 사환을 두고 있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축소판이 이 변호사 사무실이다.

    바틀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 사무실에 별 문제가 없었다. 좀 모자라는 이들 필경사와 사환은 이 변호사 사무실이 운영되는 데에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더 많은 수익을 내기 위하여 사업을 확대하면서 바틀비라는 새로운 노동자를 고용하자 노동자의 저항이 시작된다.

    바틀비는 노동자이지만 노동을 거부한다. 고용주인 변호사의 권위도 거부한다. 바틀비는 노동을 거부하는 이유나 고용주의 권위를 거부하는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합리성을 표방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절대적 저항은 어떤 합리적 이유도 대지 않고 자본주의적 질서를 거부하는 것이다. 바틀비는 수동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노동과 고용주의 권위를 거부한다.

    바틀비의 소극적이지만 절대적인 저항에 고용주인 변호사는 속수무책이다. 바틀비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자본주의적 질서 내에서 성공을 위하여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파괴하여 버린다. 바틀비의 저항으로 변호사는 사무실을 옮겨야 하고 옮긴 후에도 바틀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하여 노심초사 하여야 한다.

    이 단편소설의 마지막 말인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는 자본주의적 질서 내의 인간성을 생각해보게 하는 말이다. 이 말은 얼핏 보면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것이 전혀 없는 바틀비의 일생을 한탄하는 말같이 보인다. 인간으로서 아무것도 안하고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다가 죽은 바틀비가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한탄하는 말같이 들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이 말은 자본주의적 질서 안에서의 인간의 존재 조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단편소설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바틀비의 죽음을 확인할 때 변호사가 발 아래에 잔디의 새싹이 돋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장면이다. 이 부분 말고는 이 소설 어디에도 새 생명을 언급하는 곳이 없다.

    변호사 사무실은 월가의 여러 빌딩 틈에 자리 잡아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새로운 생명이나 새로운 삶을 기대할 수 없는 곳이 자본주의의 중심부인 월가이다. 새로운 생명을 기대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도시에서 자본가와 자본가의 하수인인 변호사, 그리고 그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수익을 쫓으면서 일상을 영위하고 있다.

    바틀비의 죽음은 자본주의의 질서에 대한 소극적이지만 절대적인 거부를 통하여, 적어도 바틀비 자신 안에서는, 자본주의를 파멸로 이끈다. 그리고 그 파멸의 자리에 잔디의 새싹으로 암시되는 새로운 질서, 새로운 삶의 방식의 가능성이 열린다. 변호사가 하는 “아, 인간이여”라는 말은 바틀비의 죽음으로써 자본주의적 인간과는 다른 인간의 가능성이 열린다는 뜻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자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삶이 어떤 것인지는 이 소설에서 제시되어 있지 않다. 자본주의가 파멸된 다음에 어떤 삶이 나타날 지는 우리가 판단하여야 한다.

    나는 [필경사 바틀비]에 나오는 바틀비를 통하여 자본주의에 대한 소극적이지만 절대적인 저항을 본다. 나는 바틀비를 흉내 내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자본주의 체제의 윤활유가 잘 쳐진 부속품이 되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나는 전봉준이나 레닌 만큼 큰 인물도 아니지만 바틀비 만큼 자본주의의 질서를 흔들어버리는 자기 파멸을 완벽하게 수행하지도 못한다. 그저 분노하면서 구차한 삶을 꾸려간다.

    필자소개
    중앙대, 영어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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