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철수, ‘생각’과 행동이 다르다?
    문재인, ‘정책의 정치화’ 실패해
    [인터뷰-정태인 원장①] “진보시대 열렸는데 스스로 자멸”
        2012년 10월 04일 10: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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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과 연구원들은 지난 5월 “18대 대통령이 꼭 해야 할 16가지 개혁 과제”라는 부제가 달린 책 『리셋 코리아』를 펴냈다. 이 책을 본 것이 분명한 홍사덕 전 의원은 “저서를 읽어보니 담론 중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지혜가 많이 있다”며 정태인 원장에 대한 영입 의사를 밝혔다.

    안철수+이헌재=매우 위험

    홍사덕의 ‘농담성’ 발언에 대해 정 원장은 “초조하긴 초조한 모양”이라고 말하며 넘어갔지만, 이는 한국 사회의 현단계 문제점과 대안이 적어도 ‘국민 눈높이 수준’에서는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는 대목이다. 마치 복지를 모든 후보가 내세우는 이유가 그런 것처럼.

    정 원장은 자신들이 책에서 제안하는 내용과 가장 근접한 정책을 가진 후보로 안철수를 꼽았다. 하지만 안철수 후보가 책에서 말한 자신의 ‘생각’과 출마선언문에 밝힌 내용이 같지 않으며, 달라진 내용은 이헌재의 영향력 때문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안철수의 변화, 특히 이헌재가 ‘매개’된 변화에 대해 “매우 위험하다.”고 우려했다.

    정 원장은 문재인 후보 진영의 경제 분야 인물들이 다른 후보들에 비해 가장 탄탄하고, 정책 생산능력도 앞서지만, 여러 가지 정책들 가운데, 우선순위와 강조점을 고려해 이를 정치화하는 데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평가를 내렸다.

    『리셋 코리아』에서 주장하는 한국 사회 개혁의 내용과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등 주요 대선 후보 캠프에 참여한 경제 분야 인선과 현재까지 발표된 공약에 대한 평가, 진보진영의 대선 전략에 대한 정태인 원장의 견해를 들어봤다.

    인터뷰는 지난 달 28일 새사연 사무실에서 이뤄졌으며, 이광호 <레디앙> 대표 겸 편집인이 진행하고 정리했다. 전문을 두 차례 나눠 싣는다.

    * * *

    이광호 : 홍사덕씨가 정태인 원장에게 구애의 신호를 보냈다. 여당에서 정 원장에게까지 그런 ‘시늉’을 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실수에도 배경이 있는데, 왜 그런 얘기가 나온 거 같나?

    정태인 : 홍 전 의원이 “책을 읽었다”고 했는데, 『리셋 코리아』를 보고 얘기 했을 거다. 책 이름을 말했으면 판매에라도 도움이 됐을 텐데…(웃음) 과거 내가 방송을 할 때 그를 본 적이 있다. 이런 저런 이미지와 계기로 그런 얘기가 나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광호 : 대선 후보 쪽 어디서건 같이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 있나?

    정태인 : 요즘 전화를 일체 안 받는다. 그런 요청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연구원들이 내가 어디로 갈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기도 했는데, (홍사덕의 구애 해프닝으로) 그런 의구심이 사라지고 다시 존경을 받는 원장이 됐다.(웃음)

    수출 위주 전략 더 이상 불가능

    이광호 : 『리셋 코리아』에서 제안하는 한국사회 개혁 방향, 핵심 가치, 주요 정책 대안은 무엇인가? 책 한 권을 짧게 요약해 달라는 무식한 요구이긴 하나, 아직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최대한 간단하게 요약 좀 부탁한다.

    정태인 :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양극화 현상은 95~9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절에도 일관되게 시장에서 양극화가 벌어졌다. 다만 두 정부는 복지를 늘려서 양극화를 완화시켰다. 하지만 복지를 웬만큼 늘려가지고는 상대적으로 괜찮았던 80년대 후반기와 90년대 초의 소득 분배 수준으로 가기는 어렵다.

    양극화 현상의 근본적 원인은 생산성과 임금의 괴리에서 비롯됐다. 생산성 상승분에도 못 미치는 임금 인상이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산업 양극화 현상의 복판에는 재벌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2008년 국제 경제위기 이후 확실해진 것은 한국 사회가 더 이상 수출 위주의 전략으로 갈 수는 없게 됐다는 점이다. 미국과 유럽 경제가 처한 위기의 성격이 쉽게 해결되기 어렵고, 선진국 경제는 장기 침체로 접어들었다. 박정희 정권 이래 채택됐던 수출 주도 전략은 더 이상 통할 수 없다.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결국 내수를 늘리는 전략으로 가야 되는데, 그것의 핵심은 ‘밖으로부터, 위로부터’의 성장에서 ‘안으로부터, 아래로부터’의 성장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최저임금, 평균임금 50% 수준으로 올려야

    구체적 정책을 보면, 내수는 기본적으로 노동과 자본의 세력 관계가 만들어낸 결과이기 때문에 노동자의 실질 임금을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 중에 최저 임금을 노동자 평균임금의 1/2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 가장 간명한 정책이다.

    또 근로장려세제(EITC. Earned Income Tax Credit)라든가 복지를 늘려서 아래로부터 수요가 늘어나게 하는 게 아래로부터의 성장을 위한 정책이다. 이것이 위기를 벗어나는 첫 번째 방법이다.

    두 번째 재벌 개혁을 통해 산업간 힘의 불균형을 시정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보면 재벌개혁은 세 가지 정책 범주를 설정할 수 있다.

    재벌 개혁의 첫 번째는 이해 당사자들의 세력화다. 재벌 개혁은 특정한 경제 정책 모델을 통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세력 간 균형이 이뤄져야, 그들이 알아서 시장에서 자기 몫을 찾을 수 있다. 특히 힘이 약한 당사자들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 하청기업 단체협상권 보장, 소비자 권리 강화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주주자본주의론에 입각한 재벌개혁은 지나치게 지배주주 대 소액주주의 문제로 접근했기 때문에, 협소한 정책을 도출할 수밖에 없었다.(주주자본주의론에 기초한 대표적인 이론가인)김상조 교수도 시장에 의한 재벌 개혁 또는 지배주주 견제라는 전술이 별로 효과 없다는 것을 깨닫고 최근에 방향을 바꾼 것으로 알고 있다.

     재벌개혁은 세력 간 힘의 균형 이뤄야 가능

    두 번째는 재벌 시스템에서 만들어진 이윤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부분은 이윤 공유제, 종업원 지주제를 통해 풀어나가야 하는데, 이런 제도는 노동자들이 경영에 함께 참가할 때만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예를 들어 노동자가 이사회에 참가할 경우 복잡한 지배구조 전체를 바꾸는 것이 어려우면, 간단한 개혁부터 출발할 수 있다. 종업원 지주제의 경우 국유기업을 민영화할 때 노동자가 기업을 인수하는 방식을 사용할 수도 있다.

    재벌 개혁을 통한 이해 당사자 간, 산업 간 힘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것은 참여정부 때 시도는 했는데 정책도 못 만들고 대통령이 그만 두라고 해서 하지 못했다.

    다음은 흔히 재벌개혁 하면 떠올리는 정책들인데, 특히 재벌이 너무 커져서 경제 시스템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는 소지를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돼서는 금산분리가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순환출자 제한도 필요하다.

    재벌 개혁을 한다고 할 때 하도급 단가 ‘후려치기’라든가, 재벌이 중소기업 영역을 침범하는 것을 막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중소기업 자체의 생산성을 높이는 것도 필요하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사실 대출이나 신용보증의 경우 국제 비교를 보면 우리나라 중소기업이 총량 기준으로 적은 편이 아니다. 우리나라 중소기업은 약 50%가 하청기업이기 때문에 재벌 수탈이 가장 큰 문제다.

    다음으로는 중소기업 간 네트워크 구축과 생산성 향상이며, 이런 과제는 정부가 도와야 하는 것들이다. 흔히 혁신 클러스터 모델이 제시돼 왔고, 참여정부 때 국가균형발전전략을 채택했으나 실패했다. 그 이유는 전국을 모두 실리콘 밸리로 만들겠다는,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를 내세웠기 때문이다.

    아래로부터, 안으로부터 성장이 중요

     『리셋 코리아』에는 이탈리아 협동조합 도시인 에밀리아 로마냐 지역에서 영세 중소기업의 네트워크를 구축해서 경쟁력을 유지한 방안이 소개돼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단기적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이와 함께 ‘아래로부터, 안으로부터’ 성장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사회적 경제다. 다행이 지난 2011년 협동조합 기본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이후 현재 전국적으로 협동조합에 대한 붐이 일어나고 있다. 양적으로 보면 협동조합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적 경제가 굉장한 성장의 가능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정부는 이들이 지역 공동체에 뿌리박고 제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간접적인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민운동과 지방정부가 함께 정책을 만들고 협동조합이 이를 수행하는 ‘퀘벡 모델’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 보편복지 시행의 중요성을 이 책에서 얘기했다. 우리나라도 장기 저성장 국면에 들어갈 텐데, 마침 국민들이 현재 제기하고 있는 보편복지, 경제 민주화와 협동조합의 붐은 위기 타개를 위한 올바른 방향이다. 정권을 잘 바꾸고, 정책을 잘 만들면 세계적 장기 침체 속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복지국가는 가능하다. 이런 것들이 우리 책의 중요한 내용이다.

    덧붙이자면 내가 별로 얘기를 하지 않아서 책 내용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게 있는데, 그것은 자본 통제를 주요 경제 정책으로 채택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미국이 3차 양적 완화 정책에 들어가면서 우리나라로 달러 유출입이 심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토빈세를 부과해서 세수를 늘리고 자본 이동에 의한 경제의 변동성을 낮추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와 동시에 동아시아의 금융협력을 한 단계 높여서 외환보유고를 공동 관리할 경우 동아시아 역내의 수요를 늘릴 수 있어, 우리나라의 외환 감소분을 보충할 수 있다. 우리가 『리셋 코리아』를 작년 말에 썼는데, 현재까지 예측대로 경제가 움직이고 있다. 우리의 성장률이 떨어지고, 중국도 마찬가지다. 대중국 수출도 지금보다는 어려워질 것이다.

    정권교체에서 시대교체로

    내수확대는 이제 국민 스스로가 참여해서 결정하는 기업이나 협동조합을 운영하는 경제시스템으로 변화해야 가능하다. 이런 시스템으로의 전환이 없으면 살아날 방법이 없다.

    (총선이 있었던) 지난 2008년만 해도 국민들은 특목고나 뉴타운 같은 투기적인 부분에 스스로 빠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편 복지와 경제 민주화를 요구할 만큼, 같이 살아날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걸 시행하는 게 정부다.

    이제야말로 드디어 진보시대가 열렸는데… 진보는 자멸했다. 우리 책의 1장 제목이 ‘정권교체에서 시대교체로’다. 지난 2007년 민주노동당 내부 대선 경쟁에서 심상정 캠프에서 내걸었던 내용이다. 시기적으로 그때는 너무 빨랐다. 이제 문재인이 ‘시대교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문 후보 측에서 우리 책을 본 것 같다.

    이광호 : 한 가지만 보충 질문하자. 생산성과 임금의 괴리 문제를 얘기하면 자본은 기업의 부담 가중, 국제 경쟁력 하락에 따른 수출 감소 등의 주장을 전가의 보도처럼 들고 나올 것이다.

    정태인 : 앞으로 수출은 어차피 안 된다. 그런 논리는 수출 주도 경제에서 나오는 이론이다. 임금이 올라가면 국제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반면 임금이 인상되면 인플레이션이 나타난다는 논리는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제조업 평균 제조 원가 중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4.7%로 5%에도 못 미친다. 따라서 임금 인상이 인플레이션에 미치는 영향은 별로 없다. 90년대만 해도 10% 수준이었다.

    경제 위기 대책, 대선 주요 쟁점될 것

    이광호 : 노동소득 분배율에도 영향을 줬을 건데.

    정태인 : 노동소득 분배율은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의 경우 임금은 생산성 향상 비율과 거의 같은 비율로 올라갔다. 노동자들의 물질적 삶이 윤택해졌던 시절이다. 그러나 95~96년을 지나면서 생산성과 실질 임금 사이의 격차가 벌어졌다.

    그러면서 IMF가 닥치면서 격차가 더 벌어지고 이런 추세가 굳어졌고 노동운동은 약화됐다. 노동운동이 강할 때는 지니 계수가 개선된다. 노동운동이 약해지면 수출은 늘어도 고용은 늘지 않고 기업만 산다. 여기에 최근에는 수출까지 안 돼서 실업자가 늘어나는 것이다.

    앞으로 남은 대선의 주요 쟁점 가운데 하나는 경제 위기 대책이 될 것이다. (저성장 시대에 접어든 한국에서) 성장이 2% 수준으로 떨어지면, 위장된 실업의 대부분인 영세 자영업이 실업자로 잡혀서 실업률은 더 높아질 것이다. 그 폭은 선진국과 우리의 실업률 차이만큼 될 것이다. 2% 성장 시대에는 영세 자영업이 붕괴하고 실업률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확실한 건 자영업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주기가 빨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새로 창업하는 자영업자 대부분이 은행 대출을 통해서 창업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들이 무너지면 가계부채 문제가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저성장 시대, 자영업 붕괴 심각할 것

    가계 부채 얘기를 잠깐 하고 넘어가야겠다. 가계 부채는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정말 가난한 사람들, 사채까지 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경우다. 이들은 가장 심각하지만 부채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다. 정부가 복지 차원에서 해결하든, 은행에서 흡수하든 빠른 속도로 처리를 할 수 있다.

    두 번째 경우는 집과 연관된 대출, 즉 돈을 빌려서 집을 산 하우스 푸어의 경우다. 이는 어떤 기법을 사용하든 정부가 그 집을 사주고 이를 다시 임대해주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국민연금은 어차피 노후 복지 때문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연금을 동원해 구매하고, 공공 주택 공급을 늘리면 해결의 가닥을 잡을 수 있다. 은행도 이런 방법이 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대출자 집을 사주거나 임대해주겠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째는 집을 담보로 잡히고 있는 자영업자들의 경우다. 이들 자영업자들이 파산할 경우 어떻게 할 것인가? 복지로 감당하기는 너무 규모가 크다.

    이들 자영업자들의 진로와 관련한 바람직한 방법은 (영세규모 개인 기업에서) 협동조합으로 형태를 바꾸는 것이다. 유럽의 경우처럼 협동조합 체인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하지만 시간이 걸리고 사람들이 이 같은 전환에 동의하기도 현재로서는 어려운 상황이다. 국내에서 그런 시도가 있긴 했으나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지방자치체인 서울시나 정부가 나설 경우 그런 방향을 잡을 수는 있지만, 이 같은 정책이 단기적 효과를 낼 수는 없다.

    재정으로 풀어야 할 것을 금융으로 때우려

    이광호 : 박근혜 후보도 최근 다소 변형된 방법이긴 하지만 하우스 푸어들을 위한 정책을 내놓았다. 지분 일부를 공공 기관에 매각하는 방식이 제시되기도 했는데.

    정태인 : 박근혜 쪽이나 다른 후보들도 모두 금융을 이용해서 문제를 풀려고 하는데 이는 위험한 발상이다. 금융이라는 게 무슨 요술방망이가 아니다. 미국과 유럽도 금융 능력을 믿었다가 위기에 빠진 것이다. 세금(재정)으로 할 일을 금융으로 하려 한 셈이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발생한) 미국이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을 올리거나 정부의 공공주택 공급을 늘이는 방식을 선택하지 않고, 금융적 해법을 선택했다. 실제로 그러면 해결 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결국 금융 위기가 터진 것이다.

    유럽의 경우 각 나라 간 경제 격차로 인해 경상수지 적자 국가가 생길 수밖에 없는데, 같은 돈(유로존 국가들의 경우)을 사용하기 때문에 환율 조정을 통한 정책을 쓸 수가 없다. 재정 정책은 통합재정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선택할 수가 없다.

    그리스 경우 유럽 차원의 재정적 해결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채권 발행으로 문제를 봉합하고 메우다가 문제가 터진 것이다. 그리스 발행 채권을 인수한 프랑스와 독일 은행도 위기 상황을 맞을 수밖에 없었고, 위기는 전 유럽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모두 재정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금융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가 결국 일이 터진 것이다.

    우리 내부도 마찬가지다. 복지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금융으로 해결하려 했다. 은행들이 소매, 가계금융으로 살 길을 찾다가 가계부채 문제에 봉착하게 됐다. 신자유주의라는 게 결국 세금은 낮추고 가능하다면 금융 정책과 활동을 통해서 사람이 살기 좋아질 거라는 믿음이다. 그런 환상을 사람들에게 심어준 거고, 이런 환상은 국내 차원이나 세계적 수준에서 이미 깨졌다.

    안철수, 새사연 제안과 가장 가깝지만…

    이광호 :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등 주요 대선 후보 진영의 인물 영입이 경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완성도 높은 공약들은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해서 현재까지 나온 것으로 볼 때 『리셋 코리아』에서 제안한 내용과 가장 거리가 가까운 정책을 제시한 후보는 누구인가?

    정태인 : 큰 기조에서는 보면 안철수 후보가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안철수의 생각』에서 했던 얘기와 그의 캠프 인선 내용이 안 어울린다. 또 『안철수의 생각』에서 했던 얘기와 출마선언문이 다르다.

    내가 이헌재와 안철수의 조합에 대해서 의심하고 또 공식적인 글은 아니지만 페이스 북에 심하게 비판적으로 언급한 것은, 안철수 후보가 혁신경제를 강조하고, 분배뿐 아니라 성장 동력도 강조한 시점과 이헌재를 만난 시점이 겹친다는 점을 주목했기 때문이다. 안 후보의 이런 얘기들이 구색용일 수도 있지만, ‘생각’에는 없었던 이런 내용이 출마선언에는 들어갔으며, 이것이 이헌재와의 만남과 깊은 연관이 있을 거라고 본다.

    최근 이헌재 씨가 낸 두 권의 책(『경제는 정치다』, 『위기를 쏘다』)의 핵심 내용은 결국 ‘이헌재 펀드’다. 기타 자질구레한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헌재 펀드는 그가 부총리 시절에도 한 얘기다. 사모펀드를 말하는 것이다.

    그걸 가지고 임대형 민자 사업(BTL : 민간 자본이 공공시설을 건설한 후 정부나 자방자치단체에 넘겨주고 일정 기간 동안 건설비와 일정 수준의 이윤을 분할 상환 받는 방식)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사모펀드의 제국을 만든다?

    그런데 그걸 방향을 좀 틀어서 국민연금이 들어간 사모펀드를 수천 개 만들어서 벤처에 투자하자는 이헌재의 제안과 안철수의 혁신경제가 이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안 후보는 벤처기업을 해본 사람이고, 자본이 없어서 고생을 한 경험이 있다.

    국민연금을 동원해 대규모 펀드를 조성하고 이를 통해 창업 열기를 일으켜 문제를 해결하자는 이헌재의 말에 안철수가 넘어간 것이고, 이게 결국 안철수 버전의 혁신경제로 나타났으며, 안 후보가 이헌재에 대해서 “위기 때 필요한 사람”이라고 얘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발언이라고 짐작한다.

    그런데 내가 대학원 때 전공한 것이 실리콘 밸리다. 물론 벤처 캐피탈은 중요하다. 하지만 수많은 나라에서 실리콘 밸리를 모방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 이유는 그 나라들이 돈이 없어서 그런 건 분명 아니다. 정부와 기업 사이의 네트워크, 기업과 대한 사이의 지식 교환 시스템이 훨씬 중요하다. 돈도 중요한 것은 맞지만 쏟아 붓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만약 국민연금이 들어간 사모펀드가 조성되면 펀드의 안정성이 높아져서 일반 투자자들이 대거 달라붙을 것이며, 결국 엄청난 규모의 금융 버블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이건 혼자 생각해본 건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국민 연금은 쉽게 투자를 했다가 쉽게 빠질 수 없다.

    근데 (사모펀드인) 벤처 캐피탈의 경우는 다르다. 벤처기업의 성공률이 5% 수준이라는 안철수 자신의 말처럼 위험성이 높은 곳에, 민간 펀드의 움직임은 손쉽게 털고 나가거나 달라 붙을 가능성이 높아서, 결국은 국민연금이 다 책임을 져야 하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

    국민연금 볼모로 사적 자본 수익성 확보

    결국 국민연금을 볼모로 삼아 사적 자본의 수익성 확보를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심하게 표현하면 모피아가 금융정책 만들고 시장에서는 이헌재 사단이 사모펀드로 금융 장악하는 것인데, 이건 정말 위험한 상황이다.

    만약에 이런 우려가 확인된다면 나는 정말 완전히 실망할 것이다. 캠프 인선을 봐도 정부를 끌고 갈 능력이 없는 것 같다. (그는 이 부분에서 안철수 캠프의 정책 생산 능력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표시했다)

    문재인 캠프의 경우 경제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상당히 탄탄한 사람들이다. 내가 알기로는 정책도 오랫동안 준비해왔다. 하지만 캠프 전체적으로 보면 정책을 만든 이후, 정무적 판단에 따라 정책 발표 순서와 강조점 등이 드러나야 되는데 이 점이 취약한 것 같다. 윗선의 정무적 판단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특정 정책이 그만큼의 파괴력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후발 꼴찌 후보의 입장에서는 치고 나가야 되는데, 마치 1등 후보라도 되는 듯 부자 몸조심하는 느낌이다. 현재의 정무 담당자들이 청와대에 있었거나, 참여정부 마지막 시기에 장관급 인사들로 대통령을 ‘모시던’ 사람들이라서, 꼴찌 후보가 아니라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을 문재인 후보한테 요구하는 것 같다. 도전이 아니라 안전성을 강조하는 데 이러면 국면을 치고 나가는 힘이 부족하게 될 것이다. 이런 것들이 문 후보의 고유한 ‘박력 부족’과 결합되다 보니 ‘파워’를 보여주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 같다.

    하지만 진짜로 더 안타까운 건 진보진영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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