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대 신용불량자 2만명 시대,
    다시 읽는 기형도의「대학 시절」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 그때와 지금은 다른가?
        2012년 10월 02일 11:3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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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은 1,000여명의 교수 회원들로 구성된 교수단체이다. 87년 창립된 이후 현재까지 사회민주화와 교육개혁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해왔다.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는 민교협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연재하며, 매주 1회 월 또는 화요일에 게재한다. 이 칼럼은 민교협의 홈페이지에도 함께 올라간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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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경향신문》을 구독한다. 지난 9월 24일자 1면 하단에서 〈대기업 매출 149% 늘 때 고용 32% 늘어〉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었다. 기사의 첫 단락은 이렇다. “국내 10대 주요기업의 매출액은 지난 10년간 2.5배 늘었지만 종업원 수는 1.3배 느는 데 그쳤다. ‘고용 없는 성장’이 심화되는 것이다.”

    기사의 제목을 볼 때부터 벌써 마음이 무거워졌다. 취업이 안 되는 제자들의 처지가 자연스레 겹쳐졌기 때문이다.

    사실 현재 대학교 4학년에 적을 두고 있는 청년들은 기형적으로 많다. 예컨대 취업이 되지 않아 졸업을 일부러 미루고 있으니 한 학년 40명 정원인데 그 수가 70~80명에까지 이르는 학과가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현상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일반적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졸업에 대한 대학생들의 두려움은 그만큼 크다.

    기형도 시인

    구체적인 맥락에서 따져보면 차이가 있겠으나, 일단 그 차이를 무시하고 전개하자면, 대학교 졸업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를 일찌감치 토로했던 시인이 있다. 『입 속의 검은 잎』을 유고시집으로 남기고 다른 세상으로 떠나간 기형도다. 시는 「대학 시절」.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기형도는 1980년대 전반기를 연세대학교 교정에서 보냈다. 그 시절에는 깊고 아름다운 “은백양의 숲” 그늘에 앉아 있어도 결코 편안할 수 없었나 보다. 하기야 그럴 만도 한 것이, 군부정권의 야만적인 폭압은 일상적으로 자행되었고, 의식이 깨어있는 자라면 이를 순순히 용인하기 어려웠으리라. 그렇다면 “은백양 숲”에서 누리는 안락이란 엄혹한 현실에 눈감은 소시민 의식 위에서나 가능해진다는 자의식이 발동할 만하지 않은가. 그럴 때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는 저 나뭇잎들은 날카로운 바늘처럼 ‘나’를 따끔따끔 찌르는 무기로 다가온다.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아름다운 숲을 지나치는 청년들이 할 수 있었던 선택이란 무엇인가. 먼저 “플라톤”을 독파하는 일이 불가했으니 관념세계(이데아)로의 이월 가능성은 애초에 봉쇄되었다고 봐야 하겠다. 그렇다면 ① 현실에 저항하거나(“감옥”) ② 현실로부터 도피하거나(“군대”) ③ 현실에 영합하는(“기관원”) 일만이 가능했던 셈인가. 어느 길로도 선뜻 나서지 못했던 시인은 결국 “외톨이”로 남아있다. 그렇지만 이 기간도 그리 길게 지속되지는 못할 터인데, 대학을 졸업하는 순간 세 가지 길 가운데 하나를 택하여 현실과 맞대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두려움은 이러한 상황에서 솟아올랐다.

    나는 우리 시대의 상황을 기형도의「대학 시절」위에 겹쳐 읽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라. 나무의자 밑에 가득 “버려진 책들”은 체제를 옹호하는 죽은 지식의 상징일 터인데, 실용적인 정보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기능적인 지식인’이 지금 도처에서 득세하고 있지 않은가. 대학생들에게는 깊고 아름다운 “은백양의 숲”을 누릴 만한 여유가 주어지기는 커녕, ‘나뭇잎조차 스펙으로’ 만들어야 하는 무한 경쟁만이 펼쳐져 있다. 이 체제에서는 아름다운 숲을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치는 청년만이 살아남게 된다. 그러니 “플라톤”을 따라 읽으며 인문학적인 가치를 추구할 때마다 ‘자본의 채찍’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경박하게 그러나 사납게 울릴 것이다.

    그렇다면 선택의 폭이 달라졌는가.

    ① 현실에 저항할 경우 “감옥”의 문이 열리는 대신 무거운 ‘벌금폭탄’이 안겨진다. 다음은 같은 날 《경향신문》 11면 머리기사의 일부이다. 8월 ‘반값 등록금’에 참가했다가 항소심에서 벌금 30만원을 선고받은 정씨는 “이 외에 지난해 9월 반값 등록금 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받은 벌금 200만원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다. 그는 대학에 다닐 때 1000여만 원의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어렵게 졸업은 했지만 매일 아침 10시면 대출이자를 갚으라는 2통의 문자메시지를 받는다.”

    ② “군대”로 건너갈 경우에는 엄혹한 현실이 잠시 유예될 따름이다. 17면 머리기사의 제목을 보라. “작년 1000만 원 이상 고액 학자금 대출 22만 명” 이러한 현실은 날로 심각해져만 가니 제대하고 학교로 돌아오면 더욱 커다란 벽과 직면할 것이다. “수천만원대 대학 학자금 대출을 받은 학생의 수가 최근 3년간 급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③ 따라서 현실에 영합해야 하는 방안만이 확실하게 다가온다. “20대 청년 2만명 ‘신용불량 상태’로 사회 첫 발”(17면 하단기사 제목)이 현실이니, 생존을 위해서는 달리 대안이 없지 않겠는가. 자, 이를 두고 현실이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형도가 견디어 낸 「대학 시절」은 엄혹하였고, 이 위에서 현실의 모습을 겹쳐 읽어낼 수 있는 시대는 불행하다. 나는 대학의 교수를 직분으로 삼아 밥벌이하고 있는 사람. 누군가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지 장담할 수 없으나, 나 역시 원체 말이 없어서는 곤란하겠기에 몇 마디 첨언하며 글을 맺어야겠다. 이를 위하여 글이 시작하는 처음 단락으로 되돌아가 보자. “국내 10대 주요기업의 매출액은 지난 10년간 2.5배 늘었지만 종업원 수는 1.3배 느는 데 그쳤다. ‘고용 없는 성장’이 심화되는 것이다.”

    앞에서 선택의 가능성으로 살펴보았던 ①, ②, ③은 개인의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다. 반면 ‘고용 없는 성장’이란 신자유주의에 편승한 정부의 정책이 어떤 내용이었던가를 짐작케 한다. 그렇다면 다른 대안을 봉쇄해 버리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정부의 정책을 문제 삼는 것도 중요하게 고려해야만 하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곤란하며, 제로섬 게임을 넘어서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지난 정부에서 대통령의 입으로 자처했던 유시민 의원은 정부에 대한 기대를 버리라며 “취업은 각자가 책임지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아니다, 그는 틀렸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정당화할 것이 아니라, 열린우리당이 집권하기 위해 내걸었던 청년실업 해소와 일자리 2만개 만들기를 공약을 실천했어야 했다. 방향이 잘못된 것은 현 정부도 마찬가지다. 일자리는 만들어 내지 못하면서 대학 평가에 취업률을 적극 반영하는 방식으로 사태에 접근하고 있는데, 이는 현실을 호도하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학교’라는 외피를 한 겹 걸쳐 입었을 따름이다. 제로섬 게임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20대 신용불량자 2만 명 시대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제로섬 게임을 문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무한경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시각부터 교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무력하지만, 아무 말 없이 현 상황을 회피하기에는 너무나 미안하기만 한 내가 전하는 첫 번째 메시지다.

    필자소개
    가톨릭대학교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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