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피 흘리는 정치
정치는 피 흘리지 않는 전쟁
[서평]『십자군이야기』(시오노 나나미/ 문학동네)
    2012년 09월 29일 09:0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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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피 흘리는 정치이고, 정치는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이다’

[전쟁론]으로 유명한 독일의 클라우제비츠와 중국의 혁명가 마오쩌뚱이 했다는 말이다. 클라우제비츠가 먼저 활동했던 사람이니 마오쩌뚱이 그를 인용하였을지도 모르겠지만, 현대사회인 지금도 전쟁의 본질은 정치이고, 가끔 정치는 전쟁으로 현상하고 있다. 정치는 내치와 외교가 있겠지만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이며 정치의 실현체였던 전쟁은 참혹하기는 하지만 과학의 진보 뿐만 아니라 문화의 교류와 발전을 수반하기도 했다.

대륙을 기준으로 보면,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경우 위,촉,오 삼국을 통일한 사마염의 진(晉)나라가 분열한 후 흉노, 선비, 갈, 저, 강족 등의 ‘다섯 오랑캐’들이 서로 싸우면서  중원에 ‘열여섯 나라’를 세운 이른바 ‘5호16국’ 시대가 있었고, 이 과정을 통해 동아시아 대륙의 문화가 더욱 발전했다는 역사학적 견해도 있다. ‘중화주의’라는 왜곡된 중심주의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들이 서로 대립, 침투하면서 사회가 발전했다는 역사관이다.

유럽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고 아랍도 아직 없었던 중세 서구, 로마교황은 그리스도교의 이름으로 현세에서 신의 대리인이었고 신성로마제국황제와 프랑스왕, 각국의 제후들은 속세의 권력자로서 교황의 교시로 군사를 움직이고 정치를 하던 시기.

‘카노사의 굴욕’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 7세로부터의 파문은 면하지만 지능적으로 교황을 고립시켜 로마로부터 떠나도록 한 후 ‘대립교황’까지 내세워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켰고, 1095년 11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Deus lo vult)!’는 말로 민중들을 선동하여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던 예루살렘을 피로써 탈환하자는 교시를 내린다.

물론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므로 십자군 전쟁의 본질은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교황 우르바누스와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제국을 지키려는 비잔틴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의 ‘정치외교’적 결과이기도 했다.

유럽의 중세는 제후와 기사의 시대라고 한다. 왕과 제후들의 수많은 영토확장 전쟁 속에서 여러 유명한 왕들이 있었다.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 프랑스 카페왕조의 ‘존엄왕 필리프’, ‘성왕 루이’, ‘미남왕’ 필리프, 신성로마제국의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와 그의 손자 프리드리히, 이들은 유럽 내에서도 영웅이었으나 총8차례를 거친 십자군 원정 과정에서도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가장 순수했고 열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제1차 십자군 전쟁에서 왕들은 출전하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많은 제후 ‘영웅’들이 출현했다. 당시 이슬람 세력내에서는 형제간에도 영토를 놓고 분열이 끊이지 않은 상황이었고, 유럽과 아랍이라는 개념도 없었으니 각각 서로를 ‘프랑크인’과 ‘사라센인’으로 칭하던 시기,  ‘프랑크인’의 십자군은 ‘사라센인’ 이교도를 ‘성전’의 이름으로 타도하기 위해 1차 십자군 원정을 시작했고, 종교전쟁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내부 분열만 거듭하던 이슬람 세력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모두의 성지였던 예루살렘을 빼앗기고 만다.

이 과정에서 북유럽 로렌 출신 고드푸르아 드 부용과 보두앵, 남부 이탈리아 노르만의 보에몬드와 탄크레디, 프랑스 툴루즈의 레몽 등 ‘십자군 영웅’들이 등장했고, 이들이 바로 중근동에서의 그리스도교 영지 약200년의 역사를 연 주인공들이었다.

그러나 모든 운동에는 대립물이 있는 법, 역사도 예외는 아니다. 이슬람 측도 내부 분열을 극복하고 이슬람 통일의 기초를 다진 태수 장기와 그의 아들 누레딘, 바그다드 아바스 왕조의 실질적 지도자 누레딘으로부터 이집트 파티마 왕조에 파견된 후 파티마 왕조를 멸하고 아이유브 왕조를 연 후 ‘지하드’, 즉 성전을 명분 삼아 이슬람 세력을 하나로 통일한 살라딘이라는 이슬람 영웅에 의해 그리스도교들은 예루살렘을 다시 빼앗긴다.

이슬람 최고의 영웅인 술탄 살라딘은 이후 계속된 십자군 원정 과정에서 ‘사자심왕’ 리처드와 치열한 전투 끝에 강화를 맺게 되고, 십자군 전쟁 약200년 간 대부분의 시간은 중근동에서 ‘프랑크인’과 ‘사라센인’들이 공존하는 시간이 지속된다.

결론,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를 멸한 ‘노예왕조’ 맘루크 왕조의 술탄들의 성전인 ‘지하드’에 의해 중근동의 그리스도교가 모두 쫓겨나면서 총8차례에 걸친 200여년간의 십자군 전쟁은 막을 내린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교 이전에 경제인’으로서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세력을 확장했던 베네치아, 제노바 등의 경제강소국들의 문화적 중개 역할, 템플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 튜턴 기사단 등 신비스런 종교기사단의 헌신적인 역할 등이 빛을 발한다.

특히 교황을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납치한 ‘아비뇽 유수’를 통해 교황권을 약화시킨 프랑스 ‘미남왕’ 필리프가 오랜 십자군 전쟁의 책임을 가장 헌신적이고 원칙적이었던 템플기사단에게 뒤집어 씌워 잔인하게 말살한 과정은 종교기사단의 신비로움을 가중시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한 장면이기도 하다.

고대와 중세의 정치는 근현대에 비해 더더욱 피를 흘려야 하는 전쟁으로, 당시의 국가는 피를 매개로 한 폭력으로 유지되었을 것이다. 보통 ‘암흑의 시대’라 불리는 중세에는 종교와 신앙의 이름으로 유럽과 서아시아의 문화권이 각각 고립되어 있었지만, ‘십자군 전쟁’을 통해 결과적으로는 유럽과 아랍이 다양한 문화적 공존과 교류를 이루었고, 나아가 유럽과 동아시아 연결의 매개 역할도 했다.

그래서 간접적이나마 르네상스라는 몇 백 년 후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가능케 한 작은 돌파구를 내는, 역사 발전의 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단 당시 권력자들이 저지른 ‘피 흘리는 정치로서의 전쟁’과 대규모 살육에 대한 역사적 책임은 별개로 본다는 조건이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이지만.

필자소개
현재해상화재보험 노동조합 수석부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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