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의 마음치유 이야기 ④
"용기를 내자, 내 안에 있는 힘에게"
    2012년 09월 28일 11: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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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에서 과정을 시작할 때 ‘나와 너의 수평적 만남을 통해 상처 입은 감정을 치료한다. 공감과 돌봄, 정직한 대면을 통해 자기 자신의 내면을 만난다. 억눌러 놓았던 분노를 표출하며 치유를 경험한다. 나와 동지를 신뢰하고 그 안에서 희망을 일깨운다.’ 라고 거창한 목표를 세워놓았다.

노동자, 경상도 남자, 바다 사나이들을 만나는 일이 만만한 작업은 아니었다.

맨 처음 한진에서 ‘아무래도 뭔가를 해야겠다.’고,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고용불안, 경제적 압박에 이어 가정도 흔들거리고 아이들도 어려워진다.’고 그룹상담을 제안할 때 용기를 내보고 싶었다.

욕심내지 말고 소박하게 매주 한 번씩 만나 마음 속 이야기라도 털어놓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함께 할 친구, 반달과 시내가 합류했다. 삐딱이까지 여자 넷이서 과정을 준비하고 실행하고 만들어갔다.

한진 동지들과의 단체 사진

우리가 과정을 하던 겨울, 김해 사택에 도착하면 누군가 항상 보일러를 틀어놓아 훈훈한 기운이 돌게 만들어주었다. 토요일 아침 사택 안으로 반가운 얼굴들이 하나 둘 모여 들었다. 항상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던 동지가 말끔한 얼굴로 등장하면 수염 기른 얼굴이 멋지다, 아니다 깍은 얼굴이 깔끔하다, 이런 저런 품평을 하기도 했다.

한 주간동안 서로 지낸 이야기들을 나누며 과정이 시작되었다.

주로 여전히 무기력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 집안에서 오고 간 이러 저러한 사건 사고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 이야기 중 아내에게서 자주 가식적이란 이야길 듣는다는 동지의 감정이 터져 나왔다. 아내가 자신에 대해 자랑스럽고 뚝심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런 자신을 또 나대지 말고 설치지 말라고 무시하기도 한다며 섭섭한 감정을 내보였다.

아내에게 어떤 이야길 해주고 싶냐고 묻자 ‘말해 뭐하느냐’고 ‘사는게 다 그렇지 뭐~’ 쓸쓸한 대답이 돌아왔다. 말 해서 뭐가 되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번 이야기나 시원하게 해보자며 동지들 가운데 아내와 가장 비슷한 느낌의 친구를 선택해 둘이 무릎을 맞대고 앉았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내 앞에 앉은 동지가 아내를 쳐다보지 못했다. 눈을 피하며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아내 자리에 앉은 동지가 자신을 쳐다보라고 하자 머뭇거리며 쑥스러워했다. ‘에이, 못하겠어.’ 라고 자리를 피하려고만 했다. 주위에서 그래도 시원하게 이야기나 해보라고 지지하자 이야길 시작했다.

‘다 그렇게 사는 거야. 뭐 별거 있는 줄 아냐, 부산역에 가봐라, 노숙자들도 많은데 이만하면 됐다.’ 아내를 밀치듯 이야길 내어놓았다. 아내가 쓸쓸한 표정으로 대꾸를 했다. ‘뭐 큰 거 바라는 거 아니다. 그냥 소박하게 살자는 거다. 밖에서 하는 것 반의반만이라도 안에서 해봐라.’ 그러자 동지가 거칠고 투박하게 ‘됐다’고 말하며 불편하게 장이 끝났다.

심정을 다 헤아리고 어떻게 사느냐고,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사는 거지 툭 던지듯 말하는 그 마음이 다가와 아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그 동지는 그 이후에 과정에 나오지 않았다. 여러 번 전화도 하고 보고 싶다고도 했으나 바쁘고 일이 많다며 슬그머니 과정에서 빠져버렸다.

아쉽고 속상했다. 어떤 감정이든 내어놓아도 되는데 만나면 오히려 가볍고 편안해지는데 싶었다.

내가 내 감정을 만났던 어느 과정이 떠올랐다. 이런 저런 상담 과정 중에 내 감정을 만나는데 어릴 적 장면이 눈 앞에 보였다. 내가 다섯 살인가, 여섯 살인가 정확하지는 않은데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방안, 아버지가 혼자 고개를 숙이고 방바닥에 뭔가를 손으로 끼적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무기력하고 기운 없어 보이는 쳐진 어깨의 아버지. 그 아버지를 바라보는 어린 내 눈은 오목하고 날카롭고 뾰족했다.

우리 아버진 형님 따라 남한에 내려왔다가 삼팔선이 생기는 바람에 이남에 남게 된 실향민이었다.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과 남은 형제를 평생 그리워하며 사셨다. 직장생활을 하시다가도 이북5도민 행사가 있으면 만사를 제치고 그 곳에 가야했고 그래서 여러 번 직장을 나와야했다. 다른 형제들이 이남 땅에서 자리 잡고 잘 사는 동안 우리 아버진 언제나 고향에 돌아갈 생각으로 이 땅에서 적응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엄마가 참 고생스러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짐을 정리하는데 이북 관련 신문 스크랩이 트럭 한가득 나왔다. 돌아가실 때까지 아버진, 북에 두고 온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성장이 멈춘 소년이셨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는 어린 딸, 돈 벌어오지 못한다고 구박하는 에미의 눈을 그대로 닮은 어린 딸의 매몰찬 눈매가 영상으로 내 앞에 펼쳐졌다. 엄마가 가엾어서 나는 천진하기 보다는 눈치가 빠꼼한 아이로 컸다.

날 상담하는 상담가가 숙제를 내주었다. 아버지를 만나보라고. 아버지에게 찾아가 하고 싶은 이야길 해 보라고. 어떤 감정이 내 안에서 물결치는지 그 감정을 만나 보라고.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를 다시 만나기 위해 혼자 아버지 산소를 찾아갔다.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던 아버지가 누워계신 동화묘지는 이북5도민 공동묘지로 파주 끝에 있다. 흰 꽃도 몇 송이 사고, 아버지 좋아하시던 떡도 한 봉지 사고 내가 마실 커피도 한잔 뽑아 들고 햇살이 가득한 어느 날 혼자 터벅터벅 아버지 산소에 간 날, 아버지 무덤에 앉아 아버지에게 이야기했다.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었느냐고,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으면 살림을 책임지고 가정을 일구어야지, 어떻게 아버지 하고 싶은 거만 하고 살 수 있었느냐고.’ 원망 섞인 목소리로 무덤에 누워 계신 아버지에게 이야길 했다.

하늘은 청명하고 맑았다. 묘지엔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날이었다.

무덤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미안하다고, 힘들었겠다고, 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노라고, 어머니가 그리웠다고, 그렇게 헤어져 평생을 못 볼 줄은 상상도 못했노라고, 돌아가면 우리 집이 있을 테니까 돌아가기만 하면 보듬어줄 가족이 있을 테니까 그리움으로 살았노라고, 그런데 그런 아비 때문에 힘들었겠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자 내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왔다.

‘미안. 아버지 힘들었겠다. 조그만 막내에게까지 그런 눈초리를 받았으니 참 쓸쓸했겠다.’ 고개 숙인 아버지가 날 쳐다보며 빙그레 웃는 것 같았다.

그리고 터벅터벅 산길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눈물이 났다. 다섯 살짜리 아이가 뭘 알았겠는가, 그저 어머니의 한숨이 가여워 그 눈초리로 아버질 쳐다봤겠지. 그 덕에 일찍 어른스러워지고 야물어졌겠지. 그렇게 커온 나 자신이 가여워 눈물이 났다.

그 감정을 만나고 나니까 굳이 어른스럽지 않아도 어린 아이 같은 천진함으로 세상을 살아도 될 것 같은 위로가 내 안에 올라왔다. 내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버지의 쓸쓸한 마음이 받아들여지고 도닥거려졌다. 그런 아버지를 바라보았던 어린 내 마음을 만나니 아버지도 가엽고 나도 가엽고 아버지도 괜찮고 나도 괜찮아졌다.

용기 내어 내 속의 감정을 만나면 그 안에 힘이 숨어있다는 걸 발견하곤 한다. 내 안의 힘이 나에게 어지럽게 엉켜있는 생각의 실마리를 찾아주곤 한다. 그 실마리는 사람을 살리는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한다. 묶여 있는 감정을 풀게 하고 상한 감정을 보듬게 한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을, 용기를, 나를 나답게 하는 지혜를 만나게 한다.

필자소개
이수경
홀트아동복지회 노조위원장을 지냈고 현재는 아리랑풀이연구소 그룹 상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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