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협동조합, 사회적경제 얘기에 앞서"
    [리에쥬에서 쓰는 편지①] 편지과 답장을 통해 더 풍성해지기를
        2012년 09월 25일 10: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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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선생님께

    오랜만에 연락드립니다. 안녕하신지요? 올 여름 동안 한국에 무더위와 몇 번의 강한 태풍이 있었다는데, 큰 피해없이 여름을 보내셨나 모르겠네요.

    이번 편지를 포함해서 앞으로 다섯 번 정도 선생님께 편지를 쓰려고 합니다. 안 그래도, 지난 5년 동안 이곳 벨기에에서 공부하고 경험한 유럽의 협동조합, 사회적경제 그리고 사회적기업에 대해 이제는 누군가와 나눌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올해가 UN이 정한 세계 협동조합의 해이고, 동시에 한국에서는 2012년 12월부터 새로운 협동조합법의 실행을 앞두면서,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덕분에 많은 분들이 제게 유럽의 협동조합과 사회적경제에 대해 질문을 하시더군요. 이런저런 질문들에 답을 하면서, 이 글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먼저, 제가 왜 J선생님께 편지를 드리는 방식으로 이 글의 연재를 시작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왜 주제와 상관없는, 글의 형식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의아해하실 것 같군요.

    필자인 엄형식씨

    사실 제가 지난 5년 동안 사회적경제에 대해 공부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사회학 연구자로서 ‘사회적경제’라고 불리는 이 사회현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해야 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점차 사회학 연구의 ‘소재’ 자체뿐만 아니라, 현재의 형태로 소재가 구성된 ‘맥락’, 그리고 이러한 소재와 맥락을 이해하고 있는 ‘연구자의 시선’ 모두를 가능한 투명하게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척 해야 하는 학술적인 글을 쓸 때, 연구자의 시선을 투명하게 밝히는 것이 쉽지만은 않지요. 하지만 온라인 매체를 통해 많은 분들과 만나는 이런 자리는 새로운 글쓰기를 실험해볼 수 있는 기회라 생각되어 과감하게 시도해보고자 합니다.

    벨기에에 온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 당시 한국에서 한창 뜨고 있던 사회적기업에 관련한 많은 질문을 받았고, 또한 여러 분들의 현장방문을 도와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때 받은 질문 중 상징적인 것이 “유럽의 사회적기업은 어떤가요?”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멋도 모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점점 더 이 질문이 갖는 무게를 느끼게 되었고 결국 이런 종류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 질문에는 세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유럽’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유럽연합 가입국 28개국을 뜻하는가? 지리적 의미의 유럽을 의미하는가? 유럽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정보와 자료는 모든 주제에 따라 갖추어져 있는가? 더욱이 제가 살고 있는 벨기에의 경우, 사회적기업들에 대한 제도 대부분이 연방정부가 아닌 지방정부의 권한입니다. 따라서 유럽은 단순한 국민국가들만의 조합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는 점점 더 “유럽은…”이라는 표현으로 유럽을 참칭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무거운가를 실감하게 된 것이죠.

    둘째, 사회적기업은 또 뭐냐는 거지요. 이는 사회적경제와 협동조합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기업이라는 용어 자체가 특정한 실체를 가리키는 용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도리어 1970년대 이후 주요하게 서유럽을 중심으로 등장한 특정한 사회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1990년대 후반 일군의 유럽학자들이 사회적기업이라는 개념을 제안함으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개념이지요.

    그러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사회적기업이라는 용어가 조금 다른 의미에서 미국과 유럽에서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일부 유럽국가 정부들, 특히 2000년대 초반 블레어 수상 시절의 영국정부는 사회적기업이라는 용어를 공공연하게 정책적인 용어로 채택을 하게 되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의 사회적기업’을 특정하는 것은 어떠한 개념정의를, 어떻게 해석함으로서, 어떠한 실재의 조직이나 프로그램을(그것도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특정하는 행위가 되며, 이를 이야기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무한한 부담을 지우는 정치적인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학술적이거나 실용적인 접근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조작적 정의’를 해야 하는데, 문제는 이 개념을 둘러싼 복잡한 현실을 명백히 밝히지 않고, 실용적인 이유로 이루어지는 (특히 이는 정책이 개입을 하게 되면서 더욱 심해지죠) 조작적 정의는 의도하지 않은 혼란을 부추기게 되죠. 물론 이러한 혼란이 상존해야 저 같은 사람들도 먹고살고, 세상도 재미있어지는 것이지만, 가끔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의 두 가지 문제는 사실 사회현상에 대한 연구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학문이라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늘 목의 가시처럼 따라다니는 문제이기도 하지요.

    가장 복잡한 것은 세 번째 문제입니다. ‘어떠냐?’ 

    대개 이러한 질문은 알고자하는 정보를 잘 모를 때 던지게 됩니다. 답을 해야 하는 사람은 참 곤혹스럽지요. ‘뭐가 어떠냐는 건지…’ 하지만 더 복잡한 것은, 적지 않은 경우, 알고 보면 질문을 하신 분들이 이미 듣고 싶은 답을 가지고 있더라는 겁니다. 단순하게는 사회적기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장점과 성공비법을 듣고 싶은 분과 비판하기 위해서 문제점과 한계를 듣고 싶은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분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 두 측면을 모두 듣는 것 같지만 결국 입장에 따라 다르게 무게 중심을 두게 되지요.

    복잡하게는 사회적기업이 고용과 사회복지에 미친 효과, 정부 및 지자체의 사회적기업 지원정책, 어느 정치세력이 사회적기업에 우호적인가 등등의 주제를 알고 싶어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이런 이슈들은 유럽 현지에서도 여전히 많은 쟁점이 있는 해석투쟁의 영역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경우, 결국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가설을 확인해주는 정보를 중심으로 정보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문제는 그 정보를 제공하는 제가 1차적으로 제 가설을 가지고 정보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한국에서 오신 방문객들과 함께 통역을 하거나, 이곳저곳에 원고를 써 보내고 나면, 제가 책임지지 못할 일을 저질렀다는 일종의 죄책감에 며칠을 몸살을 앓아야 했습니다.

    이 고민은 지난 5년간 제 공부와 활동을 이끌어온 화두가 되었고, 덕분에 사회적경제라는 소재 자체보다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관찰하며,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관련된 인식론과 방법론의 문제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왔습니다. 더 나아가, 한국사회에서 사회적경제와 협동조합, 사회적기업이 좀더 좋은 방식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인식론과 방법론의 문제가 보다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국가와 시장은 상당 정도 제도화되어서, 이와 관련된 특정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나름대로 합의된 의미를 가지고 서로 이해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물론 늘 다르게 해석된다는 점에서 제도 자체가 ‘정적’이고, ‘객관적’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지요.

    그러나 협동조합, 사회적경제, 사회적기업 더 나아가 사회운동, 시민사회와 같은 개념들은 행위자들에 의해 실현되고 있는 분명한 ‘현상’이지만, 제도화된 개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덕분에 이러한 현상들은 제도화와 개념화 이전에 존재하는 사람들의 역동적 삶에 기반하여, 제도화된 현실에 문제제기하고 새로운 개념을 던짐으로서 현실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는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는 것이겠지요. 반대로 그만큼 잘 정돈된 개념도구들을 통해 간단명료하게 설명되기 어려운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유럽의 협동조합과 사회적경제는 이러저러하다’라고 제가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이는 바라보는 위치와 관점이 다른 해석에 의해 반박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 이야기나 다른 해석 모두 절대적으로 맞는 것이라, 또는 틀린 것이라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렇듯 이해하기 어렵고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을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하기 위해, 저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볼텅스키 등이 제안한 ‘실용주의 사회학(sociologie pragmatique)’의 인식론과 방법론에 기대어 최소한 다음과 같은 전제를 하려고 합니다.

    첫째, 모든 사회현상을 그 자체가 살아움직이는 ‘무엇’이 아니라, 매순간 다른 판단과 행동을 하는 매우 다양한 개개인들에 의해 경험되고, 해석되고, 그들의 실천을 통해 실현되어 결국 관찰자에게 ‘인식되는 것’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따라서 협동조합, 사회적경제, 사회운동 등의 개념은 그 자체로 의지를 가진 역사적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 시대와 공간적 조건에 처해있는 주체성을 가진 개개인들의 인식과 행동에 기반하여, 관찰자들(또는 행위자 스스로들)에게 인식된 특정한 현상을 가리키는 ‘개념적 도구’로만 사용될 것입니다.

    둘째, ‘실용주의 사회학’에서는 사회현상을 관찰하고 이해하기 위해, 그 사회현상을 경험한(또는 관련된) 개인들의 해석을 주요하게 기본적인 자료로 삼습니다. 현상 자체가 개개인들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들의 해석을 매개로 하여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가 앞으로 쓸 글들은 제가 경험한 유럽의 협동조합, 사회적경제, 사회적기업에 대한 ‘개인적 해석’이 될 것입니다.

    J선생님께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쓰여질 이 편지 형식의 글은 앞으로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가 제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유럽의 협동조합, 사회적경제, 사회적기업에 대한 저의 개인적 해석임을 ‘명백히’하고자 함입니다. 아마, 앞으로의 글에서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런 측면도 있지만, 아닌 측면도 있다’는 애매한 표현을 많이 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경험하고 이해한 현상 그 자체니까요. 개인적인 편지글의 형식을 취함으로서 ‘그렇다’라고 써야 하는 부담으로부터 벗어나서, 정말로 제가 느낀 그대로를 나눌 수 있으리라 기대해봅니다.

    조금 바뀔 수도 있겠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주제들로 다음 편지들을 이어볼까 합니다. “유럽에는 정말로 협동조합, 사회적경제, 사회적기업이 발달해 있을까?”, “협동조합과 사회적경제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변혁운동일까?”, “몬드라곤, 볼로냐, 릴… 사실일까, 과장일까?”, “협동조합, 사회적경제, 사회적기업은 정말 아름답게 작동할까?”

    질문이나 의견을 담은 답장을 주시면, 다음 편지에서 저도 그에 대한 의견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의 해석과 여러분의 해석 사이의 상호작용이 서로의 새로운 해석을 더욱 풍요롭게 하리라 믿습니다.

    곧 추석이군요. 넉넉하고 즐거운 한가위를 기원합니다. 벨기에 리에쥬에서 드립니다.

     

    필자소개
    대학생시절부터 진보정당의 꿈을 갖고 지역활동에 참여하면서, 소속되었던 정치조직에서는 개량주의자로, 활동하던 지역에서는 좌파꼴통으로 몰려 늘 소수파의 위치를 고수해옴. 노동자협동조합을 바탕으로 한 대안경제의 교두보가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자활사업에 참여하였으나, 뭔가 잘 안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사회적기업과 사회적경제에 대한 실험에 참여함. 현재 벨기에 리에쥬 대학 사회적경제센터에서 박사과정연구원으로 있으며, 파트타임으로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국제노동자협동조합/사회적협동조합연맹에서 조사통계담당으로 일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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