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 몽타주가 이뤄내는 한권의 지도
    [책소개]『생각의 지도』(진중권 /천년의 상상)
        2012년 09월 22일 02:0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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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만의 ‘생각의 지도’를 그려라

    ‘존재’나 ‘사실과 허구’, ‘정체성’ 등에 관한 철학적 질문이나 ‘미 의식’, ‘미디어’, ‘기술과 문명’ 등에 관한 시사적이거나 정치적인 질문이 있다. 살면서 한 번쯤 떠올려봤더라도 쉽사리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지식이 부족하거나 배움이 짧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만의 생각’을 해보려 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SNS라는 매체가 등장한 이후로 자기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공간은 많아졌지만, 그곳에 진정한 자기 생각은 희소하다. 슬프게도 이 시대는 남과 다르면 ‘적’이 되는 이분법적 사고가 횡행하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서 욕 안 먹고, 손가락질 안 받고 사는 방법은 간단하다. 자기 머리는 비워내고 남들의 생각을 대신 채워 넣으면 된다. 앵무새처럼 ‘대다수’의 의견을 떠들면, 안위는 보존할 수 있다.

    여기, 미학자 진중권이 내미는 한 권의 ‘생각의 지도’가 있다. 그는 철학이란 삶이 어떻고 죽음이 어떻고 떠드는 형이상학적이고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신선놀음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주제에 관한 다양한 생각 조각들이 몽타주처럼 모인다면, 그것은 ‘그림’보다는 ‘지도’에 가까울 것이라고 전한다. 그 지도는 자기가 사유해온 방향과 자기가 살아나갈 방향에 대해 간명하고도 명쾌하게 알려줄 것이다.

    저자가 우리에게 내민 지도는 절대적 ‘정답’이 아니다. 자기 사유의 궤적을 내보임으로써 그가 요청하는 것은, “나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사유를 하라”라는 계시가 아니라 “당신이 그릴 생각의 지도를 보여 달라”는 요청에 가깝다. 즉, 철학은 먹고사는 일과는 아무 관련 없는 고리타분한 일이 아니라, 나와 우리와 사회와 세상과 삶을 보는 자신만의 잣대와 관점을 마련하는 일이라고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 그동안 내가 어느 지점에서 사유를 하고 있었는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이는 내 자신도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철학이란 결국 세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글쓰기로 표현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파편들의 몽타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라기보다는 한 장의 ‘지도’, 그것도 기억해야 할 부분만 표기한 한 장의 약도에 가까울 것이다. 한마디로 철학적 글쓰기는 생각의 ‘기술(記述)’보다는 ‘매핑(mapping)’에 가깝다.
    ─ 머리말 중에서

    ‘에세이’에서 철학과 인문학의 내일을 찾다

    현대의 ‘에세이’라는 말은 ‘수필’과 동일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글에 설령 철학적 또는 시사적 내용을 담았더라도 에세이는 논문에서는 멀고 문학에서는 가까운 존재다. 논문이라는 글의 형식이 어찌 보면 일반 대중과 너무나 떨어져버린 반면(논문 한 편을 ‘재밌게’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에세이는 가벼움이라는 그 막강한 힘을 바탕으로 대중과는 가장 밀접한 글의 형식이 되었다(베스트셀러 랭킹에서 학술서나 순수문학을 찾기는 어렵지만, 각종 에세이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동일한 공식을 인문/철학서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의 부흥기, 철학의 대중화 시대를 맞이하여 수많은 책들이 출간됐다. 당연히 대중을 겨냥한 입문서 개념의 책이 많은데, 내용은 쉽게 쓰려고 노력했을지언정, 그 형식은 여전히 논문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경우가 적잖다. 대중에게 다가가려고 대중이 가장 낯설고 불편해하는 형식을 취한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만 것이다.

    반면, 《생각의 지도》는 부제에서 밝힌 바와 같이 ‘에세이’임을 알린다. 즉, 이 책은 에세이라는 형식의 힘을 빌려 독자에게 쉽게 다가가고 있다. 그러나 에세이라고 해서 다루는 주제나 내용에 깊이를 갖추지 않은 것은 아니다. 철학과 미학이라는 묵직한 학문과 지금 현실에서 부딪히는 문제의 접점을 찾아냄으로써 현재를 새롭고 낯설게 볼 수 있도록 돕는다.

    저자 진중권은 이 책의 형식을 “논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필도 아니며, 굳이 말하자면 논문과 수필을 뒤섞어 놓은, 아주 특별한 의미에서 ‘에세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이 책은 철학과 문학의 형식을 결합한 일종의 ‘변종’을 통해 인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해보고 있다. 인문학/철학의 부흥과 함께 상상력, 창의력에 대한 갈증도 생겨났다. 이 목마름을 풀어줄 해답은, 어쩌면 ‘아직 없던 것에 대한 실험’에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저자는 이 ‘에세이 쓰기로서의 인문학’에서 인문학의 또 다른 내일을 꿈꾸고 있다.

    하지만 인문학의 미래는 철학적 논문과 문학적 수필이 구별되지 않는 글쓰기로서 ‘에세이’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 (…) 문자문화의 인문학이 인간을 ‘합리적 존재’로 만들려 했다면, 영상문화의 인문학은 그 합리적 존재를 다시 ‘창의적 존재’로 진화시키려 한다.
    이러한 인문학적 기획의 전환은 여러 가지 변화의 양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매체의 측면에서는 영상과 문자를 결합시킨 새로운 표현수단이 등장할 것이고, 내용의 측면에서는 이미 있는 것의 ‘기술’과 아직 없는 것의 ‘상상’이 어우러진 새로운 주제 영역이 열릴 것이며, 형식의 측면에서는 철학과 문학의 형식을 결합시킨 글쓰기를 실험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 머리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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