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신의 추억-12
    “겉은 육영수, 속은 박정희”
        2012년 09월 21일 10: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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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박근혜의 ‘현대사 인식’에 대한 발언으로 파문이 그칠 날이 없다.

    박근혜는 5․16을 “아버지로서는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하고, 유신에 대해서는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고 회피하는 것도 모자라, 장준하 선생 의문사에 대해서는 “이미 조사가 끝난 사건”이라고 호도하는가 하면 이번에는 8명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해 “두개의 상반된 판결이 있다”느니 “다른 증언도 있다”느니 하면서 유신의 폐해를 인정하지 않고 회피하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듯하다.

    1975년 4월 9일 인혁당 관련자들이 처형당한 소식을 들은 가족들이 망연자실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를 박근혜가 “독재자의 딸”이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그 이상으로 보인다. 박근혜는 육영수 여사가 죽은 74년부터 퍼스트레이디였을 뿐만 아니라 유신 후반기 박근혜의 활동상을 보면 그녀가 유신의 선봉에 서 있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박근혜는 유신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유신 시절 아버지는 라디오에서 “대통령 영애 근혜, 근영 양은 ~~”이라는 보도가 나올 때면 약간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박대통령에게 영애라는 딸도 있나 보지?”라고 말씀하시면서 웃곤 했다.

    박근혜는 74년 육영수 여사가 죽고 난 이후 육 여사가 수행하던 퍼스트레이디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언론에 자주 나왔던 것 같다. 박근혜는 죽은 육영수 여사를 떠올리게 하면서 독재자 박정희에 대해서도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하는 역할을 잘 수행했을 것이다.

    연세 드신 분들, 특히 여성들 중에 “아이고 불쌍도 하지. 육영수 여사가 그렇게 돌아가셨는데 얼마나 억울할까. 참 불쌍도 하지 그려~” 이런 말이 자주 나왔다는 건 박근혜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기본적으로 잘 수행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아버지는 이에 대해 특별히 할 말이 없으셨는지 앞에서 말한 그런 우스갯소리 이외에는 별 말씀이 없으셨다. 덕분에 당시 초딩이었던 나에게도 박근혜에 대한 호불호의 기억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 (오히려 대통령 영식 박지만에 대해서는 이후 마약 혐의 등으로 구설수에 자주 올라 이러저러한 부정적인 기억이 많이 남아 있다.)

    당시 언론을 보면 박근혜는 77년에 들어서면서 스스로 “조용한 정신혁명”으로 평가한 ‘새마음갖기운동’을 본격화한다. 마치 아버지가 추진했던 새마을운동의 2편이 시작것 같았다. 구국여성봉사단, 새마음봉사단 등의 총재를 맡아 최태민이 총재를 맡은 ‘새마음갖기국민운동본부’에 지역별, 사업장별로 조직을 만들고 각종 결의대회를 개최하면서 대중캠페인을 전개한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새마음갖기전국학생본부’를 정점으로 학교별 조직을 구성한다. ‘새마음의 길’이라는 책도 발간하여 전국에 보급한다.

    이 정도 시끄러웠으면 나에게도 어떤 작용이 왔을텐데 별 기억이 없으니 오히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새마음갖기운동의 내용이 ‘물질문명에 휘둘리지 않고 충 효 예를 실천하는 것’이었다고 하니 당시 귀에 박히도록 듣던 충효의 강조가 그 일환이었나 하고 추측해 볼 뿐이다.

    새마음 장학생도 선발하여 장학금도 주고 학교별 결의대회도 하는 등 난리였으니 나보다 더 나이 먹은 분들의 기억 속에는 어떻게든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가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추진한 새마음갖기운동은 10․26사건이 발생한 지 불과 한 달도 안된 11월 20일에 새마음갖기국민운동본부가 슬그머니 해산하면서 사실상 중단된다. 당시 언론을 보면 본부가 해산한 지도 모르고 있다가 지역조직이나 공단조직 등이 뒤늦게 해산을 결정했다는 기사가 나오는 모습은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유신시절 박근혜의 역할은 이 새마음갖기운동을 볼 때 퍼스트레이디 이상의 역할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우기 박근혜가 추구하고자 했던 새마음갖기의 내용이 ‘전통적인 충 효 예’였다는 사실은 당시에도 그녀가 미래지향적인 인물이기보다는 유신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전통사상 운운하면서 국민 의식을 호도하고자 한 구시대적 인물이었음을 웅변해주는 대목이다.

    박근혜가 시대를 선도하는 사고를 가졌다기보다는 구시대적 사고에 물들어 있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다음의 인터뷰 내용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경향신문 75년 10월 16일자 기사에는 박근혜가 뉴욕타임스지와 한 단독 인터뷰 내용을 보도하는데 “결혼에 대해서는?”이라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생전에 어머님은 나의 결혼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좋은 사람을 소개해 주겠다고 말씀하셨읍니다. 나는 이를 승낙했고 어머님이 나를 위해 고르실 분은 매력적인 사람일 것이라고 굳게 믿었었지요.”

    마치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 여성의 답변이 아닌가 착각할 정도이다. 요즘도 대구에 가면 조선시대 무슨 왕비나 공주를 맞듯이 큰 절을 올리는 아주머니나 할머니가 등장하는 장면이 연출되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박근혜는 유신 시절이나 지금이나 소설가 조정래가 적절히 비유했듯이 “겉은 육영수, 속은 박정희”로서 변함없이 우리 앞에 서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이상으로 12회에 걸친 유신의 추억 1부를 마친다. 

    필자소개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장, 진보신당 동작당협 위원장을 역임했고, 현재 친구였던 고 박종철 열사의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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