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취와 반복에 대해서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 시인이 호명하는 대통령
        2012년 09월 21일 10:1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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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은 1,000여명의 교수 회원들로 구성된 교수단체이다. 87년 창립된 이후 현재까지 사회민주화와 교육개혁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을 해왔다. <문학으로 읽는 우리 시대>는 민교협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연재하며, 매주 1회 월 또는 화요일에 게재한다. 이 칼럼은 민교협의 홈페이지에도 함께 게재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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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 내가 이십대 말쯤이었을 것이다.

    시낭송회가 끝나고 시인들과 독자들이 종로 술집에 모여 술과 밥을 나누는 왁자지껄한 자리였다. 1987년 민주화시위가 끝나고 뭔가 새로운 희망이 봄나물 피듯 스멀스멀 움트던 시기였다. 지겹도록 오랜 기간 서로의 얼굴에서 어둠만 확인했던 사람들이 조금씩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던 무렵이었다. 사람들은 주전자에 담긴 막걸리를 조심스레 마시며 서로를 위로했다. 구석에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간간히 웃음을 흘리던 긴 머리 아가씨가 있었다. 작가들이 모이면 가끔 동석하던 작가지망생 중 한 명인 듯싶었다. 그녀는 늘 말수가 적었다. 아니 그녀가 말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밤을 꼬박 새워 졸린 눈 비비며 이제는 눈을 붙여야 할 동틀녘, 자리를 떠나려는 내게 긴 머리 아가씨가 말했다.

    “가는 길에 태워줘요.”

    집이 불광동 어디라고 했던가, 함께 가기로 했다. 얼마쯤 갔을까. 그녀가 말했다.

    “혹시 내가 지금 가장 가고 싶은 곳에 데려다 줄 수 있어요?”

    “어딘데?”

    “그냥……지금 소원이에요.”

    그 어디가 어디인지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짧은 말이 가볍게 들리지는 않았다. 모임에서 몇 번이고 보아왔던 그녀의 작은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녀는 경기도 파주 쪽으로 차를 몰아달라고 했다.

    안개가 통일로에 희뿌염히 가득 깔려 있었다. 그나마 통일로를 통해 북쪽으로 달릴 때는 괜찮았는데 좌회전해서 들길에 들어섰을 때, 안개는 더욱 짙어져 헤드라이트를 켜야 했다. 그리고 조금 지났을 때 내 차가 들어선 곳이 새벽의 공동묘지를 알게 되었을 때, 내 머리를 쭈삣해졌다. 그리고 긴 머리의 아가씨 옷이 하얀색이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일처럼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아가씨는 손짓만 했다.

    “여기요.”

    차를 세운 곳은 공동묘지 관리소 앞에 있는 주차장이었다.

    흰 치마의 그녀는 주차장에서 내려 길가의 꽃을 꺾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송이를 꺾어 무덤이 있는 사이로 걸어갔다. 나는 귀신에 홀린 듯 따라갔다. 그리고 그녀가 한 무덤에 서서 꽃을 무덤가에 놓았다. 그리고 무덤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그 무렵 다행히 햇살이 안개를 걷어내면서 두려움도 사라지자 내가 물었다.

    “누구야?”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녀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아빠.”

    “…. 왜 비석에 이름이 없지?”

    그녀는 아주 작게 입을 벌려 말했다. 들릴 듯 말 듯.

    “아빠…… 인혁당이었어.”

    내 마음을 지탱하던 기둥 하나가 툭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인혁당, 그녀의 아버지는 인혁당 사형수였다.

    1974년 당시 유신반대 투쟁을 벌였던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을 수사하면서 배후세력으로 ‘인혁당 재건위’를 지목해 국가보안법과 대통령 긴급조치 4호 위반 등에 따라 관련자들을 다시 기소됐다. 피고 중 8명은 1975년 4월8일 대법원에서 사형을 선고한 후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됐다. 부패한 정권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사형이 언도된 것이다. 죄없는 피해자에 대한 처형이 이뤄진 1975년 4월 9일의 인혁당 사건은 ‘사법 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되고 있다. 공교롭게도 1945년 4월 9일은 히틀러에 저항했던 본 회퍼 목사가 사향 당한 날이기도 해서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다.

    아직 찬 기운이 남아돌던 4월 어느 날, 돌아오면서 그녀에게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그녀가 간간히 흐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작가들 모임에 가끔 나와 한마디 없이 구석에 앉아 있는 그림자 닮은 모습이 저 슬픔에서 생긴 아우라라는 사실을 그때야 비로소 깨달았다. 상상할 수도 없는 그녀의 성장과정이 내 머릿속에 도저히 풀 수 없을만치 복잡하게 엉켰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 흘렸을 그녀 어머니가 떠올랐다. 온몸이 고문을 받아 푸르딩딩한 시체로 돌아왔다는 신문기사도 이후에 읽었다. 죄 없는 아버지가 국가에 의해 사형당한 깊디깊은 슬픔의 단 한 모퉁이를 나는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꿈인가 생시인가 서울로 운전할 때, 서서히 떠오른 아침햇살은 통일로의 안개를 완전히 몰아내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고 싶지 않아 했던 감추어진 역사의 안개를 밀어내고 있었다.

    칠쟁이를 밑씻개로 하자

    “진실은 돌연 누군가에게 한 대 맞은 듯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내쫓기고, 시끄러운 소동, 음악소리 혹은 도와달라는 소리 따위에 화들짝 놀라 깨어나기를 바란다. 누가 참된 작가의 내면을 갖춰진 경보기를 셀 수 있었겠는가?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러한 경고음을 켜는 것에 다름 아니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이「긴급기술지원대」(『일방통행로』)에 쓴 글이다. 파시즘과 독재가 스멀스멀 독가스를 도시에 흩뿌리고 있을 때, 조금씩 사람들의 영혼에 타들어갈 때, 어떤 시인이 자기 내면에 장착된 경보기의 숫자를 세며, 용기있게 ‘집필’이라는 행위로 비상경보기를 켤 수 있을까.

    베르톨트 브레히트

    독재시대는 인간을 전체주의의 도구로만 파악한다. 시인들은 파시즘 시대의 비극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본래 맑은 자유를 호흡하는 시인이란 존재는 탁한 공기가 조금이라도 틈입하면 숨막혀 고통을 호소한다. 파시즘이라는 가스가 유럽세계를 덮칠 때,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는 히틀러의 나치즘에 반대하며 시「칠쟁이 히틀러의 노래(Anstreicher Hitler)」를 발표했다.

    1
    칠쟁이 히틀러는
    말했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제게 일할 기회를 주십시오!
    그리고는 갓 만든 회반죽을 한 통 가져와
    모든 독일 집을 새로 칠했다네.

    2

    칠쟁이 히틀러는
    말했네, 이 신축가옥은 곧 완공됩니다!
    그리고는 구멍 난 곳, 갈라진 곳, 빠개진 곳들
    모든 곳을 모조리 발라버렸다네.
    모든 똥덩이를 온통 발라버렸다네.

    3
    오, 칠쟁이 히틀러여
    왜 그대는 벽돌공이 되지 않았나?
    회반죽이 빗속에서 발라지면 그대 집은
    똥덩이가 줄줄 흘러내리지 않나?
    온 똥덩이 집으로 말일세.

    4
    칠쟁이 히틀러는
    색칠을 빼놓고는 아무것도 배운 바 없어
    정작 일할 기회가 주어지자
    모든 것을 칠하기만 했다네.
    독일 전역을 칠하기만 했다네.

    히틀러가 브레히트 체포령을 발표하자, 그는 1933년 2월 28일 독일을 떠나 15년간의 긴 망명 생활을 시작한다. “구두보다도 더 자주 나라를 바꿔 가며”라는 그의 표현대로 이 나라 저 나라 떠다니던 브레히트지만 독재자 히틀러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덴마크에 망명하고 있던 브레히트가 “나의 내부에서 싸우고 있는 것은 / 꽃으로 만발한 사과나무에 대한 도취와 / 저 칠쟁이의 연설에 대한 분노이다 / 그러나 후자만이 / 나로 하여금 당장에 펜을 잡게 한다”라고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1939)에 썼듯이, 칠쟁이 히틀러에 대한 브레히트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브레히트는 학살과 전쟁의 주범이자 젊은 시절 화가 지망생이었던 히틀러를 ‘칠쟁이’로 희화화시킨다. 브레히트가 보기에 히틀러는 독일 전역에 폭력을 칠하는 칠쟁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김수영 시인

    압제자에 대한 시인의 분노는 유럽의 브레히트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지 않았다. 자본의 출판시장에서 세련된 모더니스트로 포장된 시인 김수영은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목도하며「우선 그 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1960. 4. 26)라는 천박한 제목의 시를 남겼다. 이 시가 쓰인 4월 26일 아침은 이승만 대통령이 사의를 표명했던 날이었다.

    우선 그 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 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이제야말로 아무 두려움 없이
    그 놈의 사진을 태워도 좋다
    협잡과 아부와 무수한 악독의 상징인
    지긋지긋한 그 놈의 미소하는 사진을―
    대한민국의 방방곡곡에 안 붙은 곳이 없는
    그 놈의 점잖은 얼굴의 사진을
    동회란 동회에서 시청이란 시청에서
    회사란 회사에서
    ××단체에서 ○○협회에서
    하물며는 술집에서 음식점에서 양화점에서
    무역상에서 가솔린 스탠드에서
    책방에서 학교에서 전국의 국민학교란 국민학교에서 유치원에서
    선량한 백성들이 하늘같이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우러러보던 그 사진은
    사실은 억압과 폭정의 방패였느니
    썩은 놈의 사진이었느니
    아아 살인자의 사진이었느니

    (……중략……)

    밑씻개로 하자
    이번에는 우리가 의젓하게 그놈의 사진을 밑씻개로 하자
    허허 웃으면서 밑씻개로 하자
    껄껄 웃으면서 구공탄을 피우는 불쏘시개라도 하자
    강아지장에 깐 짚이 젖었거든
    그놈의 사진을 깔아주기로 하자……

    4·19혁명이 일어난 뒤, 일주일이 지난 1960년 4월26일 이른 아침에 썼던 이 시는 자유를 희구하는 절정의 순간을 거칠게 호흡하고 있다. 김수영 문학의 매력이 폭력적으로 발휘된 시다. 짧은 행으로 빠른 속도를 읽게 만다는 가독성, 거칠게 난도질당한 의미들, 뜻밖의 우연한 표현들이 독자를 시원하게 한다. 김수영은 이 시에서 “민주주의는 인제는 상식으로 되었다 / 자유는 이제는 상식으로 되었다 / 아무도 나무랄 사람은 없다 / 아무도 붙들어갈 사람은 없다”고 썼다. 김수영이란 존재는 오직 자유를 위해 발버둥 친 시인이었다. 그렇지만 이 시를 쓴지 1년 뒤, 1961년 5월 16일, 이렇게 시를 쓰면 잡혀가서 고문 받는 18년간의 긴긴 어둠의 시대가 ‘반복’되며 다가오고 있었다. 김수영은 군인이 정권을 잡는 시대를 예언자처럼 이렇게 예언했다.

    철조망을 우리집은 닮아가고 있다
    바닥이 없는 집이 되고 있다 소리만
    남은 집이 되고 있다 모서리만 남은
    돌음길만 남은 난삽한 집으로
    기꺼이 기꺼이 변해 가고 있다
    ㅡ「의자가 많아서 걸린다」(1968.4.23)

    김수영은 권위주위와 압제, 검열과 고문이 ‘집’이라는 일상공간으로 다가오는 것을 시인의 더듬이로 감지했다. 행복해야 할 집이 아버지와 아들이 끌려가는 ‘난삽한 집’으로 변해가는 18년의 유신시대는 비극으로 끝났다. 그렇지만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한번 굴러가는 비극의 바퀴는 잠시 멈추는 것 같지만 제대로 막지 않으면 또 굴러온다.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과 함께 또다른 야만의 시대로 ‘반복’되며 이어졌다.

    잊혀진 과거의 반복

    시간의 흐름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그 흐름을 어디서 어디까지 취하는가, 곧 절취(截取)하는가에 따라 역사에 대한 해석은 전혀 달라진다. 그 떼어낸 부분을 우리는 부분대상(partial object)이라고 한다.

    박정희 시대를 평가하는 사람은 자신들의 입장에 따라 부분대상을 절취한다. 박정희 시대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따라 한강의 기적, 경부고속도로 건설, 포항제철 공장 건설 등의 사건을 ‘절취’하는 사람들에게 박정희는 나라를 구한 구국의 대통령으로밖에 보일 뿐이다. 그렇지만 반대의 부정적인 부분을 절취한 사람들에게 박정희는 부정적인 인물이 된다.

    식민지시대 모두 친일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람들이 외면하는 사진이 있다. 똑같은 식민지시대에 참을 길 없어 기관총을 들고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광복군 장준하(오른쪽), 김준엽(전 고려대 총장), 노능서 선생의 사진이다. 만주군 장교 출신이었던 박정희가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을 때 장준하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일제가 그냥 계속 됐다면 너는 만주군 장교로서 독립투사들에 대한 살육을 계속했을 것 아닌가.”

    만주군 중위 출신 박정희에게 광복군 대위 출신 장준하는 냉엄하게 반박했다. 장준하에게 ‘절취’된 박정희의 시간은 만주군 장교로 있던 시절이다. 이외에도 박정희의 조선노동당 가입 등 빤히 알고 있던 장준하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2012년 8월 대전에서 열렸던 한국작가회의 수련회에 시인 신경림 선생은 이 시대를 이렇게 증언했다.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게 해달라고 박정희에게 청원서를 냈던 1975년 61명 작가들이 모두 끌려갔어요. 끌려갔다가 나와서 독재에 싸우자 해서 만든 것이 자유실천문인협회예요. 고은, 박태순, 조태일, 염무웅 등 101명이 자유실천문인협회를 만들고 거의 모두 끌려가 박정희 정권이니 반쯤 죽도록 맞고 나왔지요. 이시영 송기영 시인은 그때 젊은 나이로 실무를 봤죠. 5년쯤 맞아가면서 모두 더욱 단단해졌죠.”

    작가란 표현의 자유를 희구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공산주의를 몰아낸다는 명목으로 민주주의의 모든 가치를 고문하고 무시했다. 브레히트와 김수영이 저주했던 시대가 다시 실현되었던 ‘비극적 반복’이었다. 이처럼 시인 신경림에게 ‘절취’된 박정희 시대의 부분대상들은 자유를 억압하는 기간이었다.

    박정희가 5·16쿠데타 직후 쓴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에는 “민주주의라는 빛 좋은 개살구는 기아와 절망에 시달리는 국민 대중에게는 너무 무의미한 것이다”라는 섬뜩한 언사가 있다. ‘민주주의라는 빛 좋은 개살구’라는 표현은 지독히 충격적이다. 누구든 이 말을 빌려 쿠데타를 일으켜도, 몇 놈이 죽든말든, 기아와 절망에 시달리는 국민 대중을 일으킨다는 명목으로 무력으로 정권을 잡을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 것이다.

    비단 이 일 뿐만 아니다. 5・16 쿠데타, 유신 쿠데타, 최종길 교수 고문 살인, 인혁당 조작 고문 살인, 장준하 암살, 김대중 암살실패 등 유신시대에서 ‘절취’된 참혹한 ‘부분대상’들은 단순한 두 치 혀의 사과로 끝날 수 없는 사건이다. 이러한 상황과 비교하여, 스탈린의 딸이 고백한 말을 들어보자.

    “우리 아버지는 독재자였고, 딸로서 침묵한 나도 공범자다. 이제 아버지는 세상에 없으니 내가 그 잘못을 안고 가겠다…. 아버지가 독재할 때 왜 여러분은 침묵하셨습니까? 그건 공모입니다. 나도 아버지가 잘하는 줄 알고 침묵했습니다. 나도 공모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이제 죽었습니다. 이제 아버지에 대한 비판과 욕을 나에게 하십시오.”

    스탈린의 외동딸 스베틀라나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런데 우리의 독재자들에게는 그런 자식이 없다. 오히려 그러한 시대가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아버지’가 계셨기에 조국이 근대화 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논리가 한국 사회의 기층세력에게 통하는 것은 비극적인 상황이다.

    한국인이 집단적으로 반복하는 하비투스[habitus, 習俗] 중 하나는 샤머니즘적인 충성심이다. 즉 카리스마 독재자를 숭앙하는 하비투스가 존재한다. 이러한 하비투스는 새마을운동이니 경부고속도로니 포항제철 등만을 높이 숭앙하는 태도와 이어진다. 반민주주의적 폭력과 상관없이 경제성장을 부분대상으로 취하여, 반복, 반복, 또 반복하여 박정희 시대를 숭앙하는 태도다. 이러한 부분대상에 취한 하비투스의 무리는 집단마취 되어 컬트적인 환호를 보낸다.

    그렇지만 그 이면에 있었던 인권말살은 도외시 하고, 마치 일본군 성노예와 독립군 고문학살을 저질러도 반성하지 않는 일본이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기에 근대화 될 수 있었다’는 논리를 주장하듯, 이 하비투스는 한국의 경제성장은 지도자 박정희 덕이라고만 강조한다. 부자가 된다면 인간은 돼지가 되어도 좋다는 논리와 어떻게 다를까. 과거의 역사를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박정희를 이성계에게 그리고 박근혜를 세종으로 비유하는 사람까지 있다. 이에 시인 고은은 이렇게 일갈(一喝)했다.

    “아주 무식한 혈통주의네. 박정희는 극복해야 될 인물이지 세습해야 할 인물이 아니에요. 다시 나타나면 안 될 시대를 의인화한 것이 박정희지. 고통스런 과거를 아주 희미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 그러면 안 돼…….어떻게 박정희와 박근혜를 이성계와 세종에 비유해! 범죄적 수준의 견강후회네. 아주 무식한 놈이나 지능범이 할 말이야. 세종의 위대성은 자기 아버지를 복제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를 내친 데 있어.”
    ㅡ고은,「박정희는 극복해야 할 인물이야」『한겨레신문』(2012. 7. 22)

    박정희 딸에게 5·16을 묻는 것은 세종대왕에게 할아버지인 이성계의 고려멸망을 묻는 것과 같다는 생각은 대한민국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민주공화국임을 망각한 망언이다. 대한민국을 무슨 왕조국으로 착각하는 치매다. MBC언론독재, 부패인권위원장 연임, SJM폭력 컨택터스에 대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은 한마디 언급도 없다.

    영화 <밀양>에서 가장 구토 나는 장면은 살인자가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며 피해자와 상관없이 웃으며 자위하는 장면이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살인자 윤수가 피해자 할머니를 뵙고 벌벌 떨며 통곡하며 잘못을 비는 장면이다.

    지금 박정희를 숭앙하는 이들의 광폭행보는 어느 쪽에 가까운가. 전태일과 인혁당의 가족들은 <밀양>에서 보았던 비루한 미소를 대하는 기분이 아닐까. 최저임금 얼마인지도 모르고, 전태일 벗들 수천명 구속한 박정희 동상 세우고, 전태일의 현재형인 쌍용피해자들 문전박대 하고 쌍용국정조사 외면하면서 갑자기 국민통합을 외치는 장면은 <밀양>의 미소를 상상케 한다.

    오랫동안 독재가 이어져 왔던 한국 사회 속에서 한 시인이 그리던 대통령의 모습을 인용해본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대씩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 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사색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 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ㅡ신동엽,「散文詩・1」

    시인 신동엽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지역의 북유럽 사회민주주의를 작은 풍경화 한 편으로 한국 사회에 제시하고 있다. 이 시에는 ‘석양 대통령’이라는 한없이 겸허한 지도자가 자전가 타고 등장한다. 전쟁 없는 평화로운 일상, 문화적 만족감이 ‘일상성’으로 존재하는 사회는 시인 신동엽이 꿈꾸었던 중립적이며 인간적인 사회였다. 고통스럽게 살아갈 것 같은 광부들도 릴케나 하이데거를 읽으며 만족스런 삶을 누리고, 포도밭 주인이 대통령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자신의 삶을 즐기는 사회다. 서민용 삼등열차를 기다리는 국무총리에게 비굴하게 굽신거리지 않는 역장은 자기 일에 충실하다.

    박정희 시대였던 1968년 11월, 시인 신동엽이 죽기 1년 전에 『월간문학』창간호에 발표한 이 시는 44년이 지난 지금도 의미를 갖는다. 이 시에서 시인이 꿈꾸는 사회는 “총 쏘는 야만”, “탱크 기지”를 거부할 줄 아는 국민이 주인 되어 있는 사회다.

    사실 우리에게는 이 시 속의 주인공과 비견될 수 있는 대통령이 있었다. 까마득한 절벽에서 몸 던져 아내와 가족과 자존심을 지켰던, 역사상 첫 자전거 대통령. 그러나 그는 환상이었다. 신자본주의를 적극 받아들여 빈부의 차가 발생하고, 평택 대추리에 살던 사람을 몰아냈고, 이라크 전쟁 참여했다는 등의 비판을 받지만 그는 잠시 한국의 대통령이 자기 마을로 돌아가 자전거를 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잠시나마 보여주었던 ‘실패한 환상’이었다.

    시인은 화재경보기

    이제 2012년 대선에 참여할 선수들의 윤곽이 드러났다.

    2012년 9월 15일 문재인 후보가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로 결정되었다. 9월 19일 안철수 교수도 대통령 선거 후보로 나섰다. 두 사람은 박근혜 후보와 경쟁할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후보 및 캠프는 지금을 30~40년 전쯤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대선이 90일도 채 남지 않았는데 긍정적인 부분대상만을 절취하고, 나아가 “인혁당에 대한 판단은 두 가지”라는 둥 사실 자체를 왜곡해서 왜곡된 과거를 고집하고 있다. 반면 인혁당 사건의 피해자들이 흘린 눈물은 끝나지 않았다. 아직 그 피해자의 자녀들은 미친 유령처럼 무덤가를 헤매고 있다. 살아있는 전태일들이 아직도 죽음을 향하고 있다. 자유를 꿈꾸는 시인들이 절망을 호소하고 있다.

    자유를 억압한 시대에 대해 반성이 없는 사람을 어떻게 선택할 수 있는가. 민(民)이 나라의 주인인 대한 ‘민국(民國)’에 살고 있지만, “국민이 악마인가요? 저항을 왜 해요”라고 말하는 제왕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이를 어떻게 선택할 수 있는가. 파시즘 시대를 ‘최선의 선택’이라 하고, 은연중 그 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는 후보를 국민은 선택하기 어려울 것이다.

    2012년 12월 19일에 투표함을 열어보아야 알겠지만, 이 글이 발표되고 남은 2개월 동안 역사를 만들어갈 주권자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히틀러 파시즘에 본 회퍼 목사가 저항했듯이, 박정희와 전두환의 독재에 문익환・서남동・안병무 목사님이 저항했듯이, 이제 다시는 그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예언자들은 정언(正言)을 전해야 한다.

    브레히트와 김수영 그리고 신동엽의 시에는 민주주의와 자유정신이라는 보석이 오롯하게 박혀 있다. 시인 말과 글을 모으자, 말과 글을 전하는 데 큰돈이 들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거짓된 정부, 영혼 없는 언론, 양심 없는 검찰 아래 백성 노릇 하느라 서러워 울지 말기 위해, 말을 전하자. 이제 문제는 좌편향이냐 우편향이냐가 아니라, 상식이냐 몰상식이냐, 진실이냐 거짓이냐 하는 문제다. “불이 다이너마이트에 이르기 전에 타고 있는 심지를 자르지 않으면 안 된다.”(발터 벤야민,『일방통행로』) 퇴행하는 역사는 비극이다. 역사는 사스락사스락 잠잠히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예언자는 비상경보기다. 시인은 화재경보기다.

     

    필자소개
    숙명여대. 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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