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기자회견문 읽기
진보, 볼라벤 앞에서 선풍기 틀지마라
[말글 칼럼] 그가 말한 것과 말해야 할 것들
    2012년 09월 20일 11: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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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간결한 문체

화려하지 않아서 돋보입니다. 어려운 한자어 같은 게 거의 없고, 문장이 짤막짤막하군요. 과장 섞인 수식어가 거의 없습니다.

이래 쓰면 내용으로 다가가겠다는 거지요. 솔직하다는 인상을 심어줍니다. 특히 따옴표를 단 간접화법이 많은데, 함께 하겠다는 말을 뒷받침하지요.

수식어만 없는 게 아니고 접속사도 거의 없습니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수식어나 접속사는 글 읽는 데 방해만 됩니다. 이를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일본말 접속사를 갖다 썼다 칩시다. 강렬하지요. 그러면 사람들 눈길은 여기 꽂힙니다. 내용 전달이 안 되지요.

안철수가 직접 작성한 듯싶습니다. 그는 자기 생각을 전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군더더기 없이 곧장 내용을 집어넣는 스타일입니다. 당장엔 무미건조해 보이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길게 남깁니다.

구체적인 사람으로 다가가기

자기가 직접 만난 사람들 얘기로 시작합니다. 그들의 고통을 봤고, 그들에게서 희망을 얻었답니다. 자연스럽게 그들, 고통 가운데서도 희망을 여는 이들이 안철수를 지지하는 사람이 됩니다.

사실 여기 해당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이로써 안철수는 모든 것을 해결할 사람으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희망이어야 할 사람들을 대표하여 나서는 셈이 됩니다. 신의 부르심에 따르는 것이 ‘소명’이라면, 안철수는 그의 신인 국민, 그것도 고통과 희망을 겸비한 국민의 부름을 받은 거지요. 그런 뉘앙스를 만들어 낸 겁니다.

국민을 전면에 내세우다

이처럼 안철수는 메시아 되기를 마다합니다. 대신 국민의 정치쇄신의 열망을 표현하는 통로 구실을 하겠다지요.

여기가 박근혜나 문재인과 갈라지는 포인트입니다. 이후의 모든 쇄신과 경제적 어려움을 함께 헤쳐 나가잡니다. 그를 위해서 직접 대안을 내세우기보다는 선거 과정에서 국민의 생각을 모으겠다지요. 이로써 다른 후보처럼 온갖 대안을 쏟아내는 무리수를 피합니다.

긍정의 화법

그가 내거는 것은 크게 ‘낡은 체제와 미래가치의 충돌’입니다. 그런데 회견문 통틀어 ‘낡은’ 2번, ‘옛날’ 1번 나옵니다. 대신 ‘미래’ 9번, ‘변화’(쇄신, 바꿈) 11번, ‘희망’(열망), ‘통합’, ‘진심’ 같은 말들로 뒤덮습니다.

낡은 것과 싸우되, 거기 얽매이지 않고 국민의 열망을 모아 나아가겠다는 겁니다. 그를 위해서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거지요. 구체적인 개혁과 쇄신 방안을 내놓을 때도 시종 긍정의 화법입니다.

선거개혁

“국민의 반을 적으로 돌리면서 통합을 외치는 것은 위선.” 이 말은 흑색선전 같은 낡은 정치는 하지 않겠다는 말로 이어지고, 두 후보에게 선의의 정책 경쟁 할 것을 국민 앞에서 약속하자는 제안으로까지 나갑니다. 선거 후에도 서로 돕잡니다. 여기에 ‘덧셈의 정치, 통합의 정치’라는 이름을 달았습니다.

어찌 보면 두 후보에게 교묘하게 낡은 이미지를 씌우는 것이기도 합니다. 박근혜와 문재인이 각각 절반씩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아는 거지요. 더불어 흑색선전하는 놈을 낡아빠진 놈으로 규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검증 쪽으로 가면, 문재인보다 불리할 것 같다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약점을 강점으로, 강점을 약점으로

경험과 조직이 없다는 항간의 우려와 비난은 이렇게 처리합니다. 그래서 빚진 것도 없다, 그러니 전리품처럼 공직을 나눌 일도 없다는 거죠.

공직 비리가 조직 논리에 따르는 정치행태 때문이라고 말하려는 겁니다. 요소요소에 있는 각자의 역할 시스템에 이미 답이 있답니다. 낡은 정당정치에 기대지 않겠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셈입니다.

절묘(나쁘게 보면 교묘)합니다. 제 약점을 강점으로, 남 강점을 약점으로 둔갑시킨 거지요.

결정적 승부수, 당선에 목매지 않는다

지금 당장 후보 단일화에 목매지 않는다는 말을 했지요. 회견문에서 ‘당선 여부보다는 잘 해낼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했고요.

저 보기에, 이 말이 그의 승부수입니다. 그리고 이 승부수야말로 정공법이요, 그가 살 길입니다.

단일화 쪽으로 가는 순간, 보수 쪽 유권자를 몽땅 잃습니다. 이어 단일화 방안을 둘러싸고 지루한 공방이 벌어질 터고요. 어느새 그만의 강점은 사라지고 말겠지요.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그 역시 당선에 목매는 똑같이 낡은 정치인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런 점에서 단일화에서 벗어난 행보를 하겠다는 것이야말로 그의 장점을 잘 살릴 수 있는 현명한 결정으로 보입니다.

회견 효과

제가 이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고 참 놀랐습니다. ‘좋아요’와 댓글이 폭발적이었거든요. 특히 ‘페친’ 아닌 분들의 호응이 더 크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그 분들 사진 보니 대부분이 젊더군요. 페친 안희경은 이를 일러 ‘자기공간을 찾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라더군요. 그렇지 싶었습니다. 트위터에서는 ‘안철수가 대통령이 되면 해야 할 일’이란 주제로 말이 돌더군요.

하나의 회견문으로 다 파악할 수야 없겠지만, 아무튼 안철수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정치인이라는 점, 옛 방식으로만 판단했다간 계속 헷갈릴 수밖에 없는 인물이라는 점, 그만의 화법으로 타깃을 포착할 줄 아는 인물이라는 점을 느낍니다.

말하지 않은 것

이헌재가 동석한 걸로 뭐라고들 하지만, 좌우의 평론에 구애받지 않고 제 길을 가겠다는 결의를 한자락 보인 거라 봅니다. 그렇더라도 배경으로 ‘흘러간 인물’을 깔았으면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합니다.

국민들과 함께 풀어나가자고 했지만, 그래도 허전합니다. 그래도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어째 제 말을 않는가, 이런 생각이 절로 듭니다. 혹 ≪안철수의 생각≫에 다 써놨다는 식이라면 이건 아주 건방진 겁니다. 그 자리는 ‘책임’을 져야하는 자립니다. 책임지려는 사람은 당연히 자신이 할 일을 내놓아야지요.

제가 무엇보다 궁금하고 또 께름칙한 게 하나 있습니다. 책에도 나와 있는 ‘민주화’와 ‘산업화’의 공존 비슷한 얘기요. 그 둘이 그렇게 나란히 가는 건지, 정말로 우선 순위가 없는 건지 묻고 싶습니다. ‘배부른 독재’냐 ‘배고픈 민주’냐는 식으로 가를 건 아니라 보거든요. 배부른 처지가 돼선지 몰라도, 배가 터지더라도 독재는 싫거든요. 사실 상대적 허기는 어느 때보다 심하기도 하고요. ‘미래’를 외치는 안철수 ‘후보’라면, ‘교수’나 ‘원장’일 때와는 달리, 이 문제에 대답을 해 줘야 합니다.

무엇보다 ‘포인트’가 없습니다. 미래, 미래 하지만, 그 미래를 위한 터닝 포인트를 당신은 뭘로 잡느냐 묻고 싶습니다. 은근한 희망을 주는 걸로는 성에 차지 않습니다. 안철수, 하면 떠오르는 뭔가가 있어야지 않을까요?

아, 진보여

회견을 보고 나니 우리 ‘좌파’가 돌아봐집니다. 김진숙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자는 움직임이 있다지요. 그래 당사자는 핸드폰마저 끄고 잠적했다는 얘기도 들리더군요. 어째 이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본심은 모르겠지만, 전 그를 크레인에서 내려오게 한 희망버스, 거기 탄 사람들 중 상당수가 안철수에 열광하는 걸 압니다. 그러면 그의 성향과 무관하게 대결하라고 하는 건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게도 ‘민중후보’가 아쉬우면, 이왕이면 나서겠다는 사람(홍세화)을 밀어줘야 하는 것 아닌지요.

허나 그것도 아닌 듯싶습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볼라벤’ 앞에서 선풍기 틀고 자빠졌냐는 비난을 듣기 딱 좋지 싶어서요. 이정희도 나선다지요? 3%로 흥정하겠다고요? 저 장담합니다. 아무리 많아도 1% 못 넘깁니다. 망하려면 나서라, 별 관심도 없으니까요.

안철수를 보면서, 누구는 무임승차라지만, 좌파가 철저히 깨져야겠구나, 합니다. 최소한의 요구를 들고 어떻게든 그것을 관철시킬 수 있는 쪽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안타깝지만, 그게 지금 우리 처지지 않나 합니다. 모쪼록 스스로에게 솔직했으면 좋겠습니다.

필자소개
우한기
민주노동당 활동을 하였고 지금은 진보 무당파이다. 거의 20년째 논술 전문강사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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