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대혁명 이해가 중국 이해의 출발"
    첸리췬-백승욱 대담
        2012년 09월 19일 12:2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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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저명한 루쉰(노신) 연구자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문학자로 꼽혀온 첸리췬(전리군錢理群·73) 전 베이징대 중문과 교수를 만났다. 그는 ‘파주 북어워드’의 저작상을 수상하러 한국에 왔다. 올해 그의 저작 <망각을 거부하라: 1957년학 연구 기록> <나의 정신자서전>이 한국에서 출간되었고 최근에는 대표작 <마오쩌둥 시대와 포스트 마오쩌둥 시대(1949~2009): 다르게 쓴 역사>이 한울출판사에서 나왔다.

    첸 교수는 모택동주의자였다. 60년대 문화대혁명 당시 조반파(홍위병 중의 급진세력)로 활동하기도 했고, 조반파 학생들의 스승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모택동주의자가 아니다. 첸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모택동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과정은 어렵고 힘들었다. 그만큼 모택동은 뛰어넘기 힘든 거인이었다.

    지금 첸교수는 중국의 자유주의자들로부터는 모택동주의자라고 비판을 받고, 신좌파들로부터는 자유주의자라고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첸 교수는 “나는 양쪽에서 비판당하지만 양쪽에서 끌어가려는 사람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물론 그는 중국공산당이 기피하고 배제하려는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이기도 하다. 중공 당국이 중점 관리하는 블랙리스트 200명의 인사 중에서 한 때는 두 번째로 중요한 관찰 대상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대학 교수를 퇴직했기 때문에 당국의 관찰 중요도에서는 좀 떨어진 편이라고 한다.

    그는 베이징대 재직 당시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10명의 교수’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998년 공개강연에서 중국의 교육제도를 비판한 후 2002년 교수직 재계약을 하지 못하고 퇴임했다. 첸 교수의 지인 말로는 중국 당국이 첸 교수의 영향력이 크고 나이도 고령이어서 직접 첸 교수를 압박하지 않고, 첸 교수의 제자들을 핍박하고 탄압하는 방식으로 첸 교수에게 압력을 가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선택한 것이 조기 퇴직이다.

    이번에 한국에서 출간한 <마오쩌둥 시대와 포스트 마오쩌둥 시대(1949~2009): 다르게 쓴 역사>는 중국에서 출간되지 못했다. 대만과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 출판된 것이다. 정작 첸 교수가 자신의 책을 가장 읽어주기를 바라는 중국인들에게는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의 정책은 “언론에는 자유가 있고 출판에는 규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언론에는 민간언론이 있지만 출판사는 모두 ‘국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정부적이거나 정부에 비판적인 책의 경우는 중국 내에서 출판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 출판되더라도 상당한 검열과 삭제를 당한다. 출판 관련한 정부의 검열 지침이 있지만 문서화되어있지는 않다. 하지만 누구나 그 검열 기준과 지침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정부의 출판정책을 염두에 두고 “스스로 자기검열을 내재화하게 되는 것”이라고 첸 교수는 말했다. 자신의 책이 출판되어 문제가 될 경우 자신만 피해를 입는 것이 아니라 출판사 관련 사람들도 피해를 당하기 때문에 자기검열이 내재화된다는 것이다.

    첸 교수는 본인의 글과 책 중에서 스스로 삭제했거나 정부에 의해 삭제된 부분만을 모아둔 것을 갖고 있다고 한다. 기억하고 망각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삭제된 것만 책 3권이 넘는다고 한다.

    첸 교수는 문화대혁명을 비판하고 모택동을 비판하지만 그 비판의 기준과 잣대는 서구 자유주의의 잣대가 결코 아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책들이 “반공주의로 오독되는 것을 걱정”한다고 했다. 오히려 좌파적 비판이고 내부적 내재적 비판의 성격이 강하다. 현재의 중국공산당이나 정부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지만 자유주의적 접근과는 결을 달리한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첸리췬 교수

    그래서 첸 교수의 중국공산당과 정부에 비판적 의견을 듣고 읽는 사람들이 정부의 중상층 관료 중에도 있다고 한다. <염황춘추>라는 공산당의 구좌파 성향 사람과 지식인들, 자유주의자들이 주로 읽는 잡지에 편집인으로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첸 교수의 지론은 위의 관료나 공산당, 정부의 변화와 아래에서의 민간사상과 실천이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첸 교수의 관심과 애정은 후자에 있다. 그리고 올바른 변화는 첫째, 인민의 이익과 이해에 기여하는가 둘째, 실천과 실험에 근거하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첸 교수는 공산당 당원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중국의 가장 명문이라고 하는 베이징대학교의 교수를 지냈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그의 부친이 공산당의 적대세력인 중국 국민당의 고위 간부였다고 한다. 49년 공산당이 신중국을 건국할 당시 그의 부친은 국민당을 따라 대만으로 가서 일생을 보냈다. 그런 출신과 가계를 갖고 있는 첸 교수가 베이징대 교수가 된 것이다. 한국의 경우와 비교를 하면, 북한 정부와 북한 조선노동당의 고위간부를 지냈던 부친을 둔 사람이 남한에서 서울대 교수를 하고 있는 경우이다. 우리 사회에서 그런 경우는 거의 불가능하다. 첸 교수의 인터뷰 내용과 더불어 이것이 끝까지 기억에 남는다.

    첸 교수와의 정식 대담은 백승욱 중앙대 교수가 진행했다. 백승욱 교수도 첸 교수와 마찬가지로 중국을 이해하고 사회주의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근본적 이해와 평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오랜 시간 연구를 해 온 학자이다. 백 교수도 최근에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그린비)라는 책을 냈다. 두 학자의 격조있는 대담을 백 교수의 양해를 얻어 레디앙에 싣는다. 아래의 대담 내용은 경향신문 온라인판에서도 볼 수 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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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 먼저 한국의 독자들에게 어떤 책이 되기를 바라는지 궁금합니다.

    전: 이 책(<마오쩌둥 시대와 포스트 마오쩌둥 시대>)은 중국 공화국 역사에 대한 서술입니다. 사실 이 글쓰기의 특징은 역사 당사자이자 정리자의 역사쓰기라는 것입니다. 나의 개인의 성장 과정과 이 역사는 함께 걸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한국의 독자에게 역사의 정리자이자 학자라는 이중적 신분의 사람이 쓴 역사에 대한 관심을 소개하는데, 나는 역사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한국 독자들이 이 역사에 대해 인식을 복잡화하여 ‘풍부화’된 중국을 알게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목적입니다.

    백: 복잡화와 풍부화가 결여되어 있는 역사서술은 어떤 것인가요?

    전: 현재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 중국 내부에서든 아니면 국제적으로든 전면적 부정 또는 긍정, 이상화 또는 악마화와 같은 이러한 이원적 대립의 주류를 이룹니다. 나는 이를 바꾸려고 시도했습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그렇게 간단한 부정하거나 간단한 긍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주 복잡한 것이지요. ‘얽혀 있는 것’, 나는 이 말을 좋아합니다. 이러한 얽힘 배후에 풍부한 것이 있습니다. 중국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 경험 경험에서 희귀한 것인데, 이러한 경험이 중국이나 다른 세계에서도 교훈이자 거울이 될 수 있습니다.

    백: 중국의 역사가 매우 희귀하다는데 동의합니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는 또한 중국인의 역사일 뿐 아니라 우리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중국의 역사 경험을 우리의 역사 속에 가져올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목소리 서로 다른 해석’을 말했습니다. 한국인의 시각에서 중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다를 것입니다. 어떻게 새로운 사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자신의 모순과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저는 이런 고민을 합니다. 우리는 동시대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선생님은 한국의 노신 연구계 속에서 매우 유명합니다. 저는 노신연구자가 아닙니다. 사실 저는 제가 중국을 이해하고자 할 때, 어떤 공백을 느꼈고, 특히 아래로부터의 운동이라는 부분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민간이단사조와 상층 사이의 복잡한 관계 분석을 접하고 아주 의미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우리는 왜 과거 사회주의 시기로 돌아가 연구하는 의미는 무엇이고. 상층과 하층의 복잡성을 연구하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요?

    전: 민간 사조에 대한 연구는 외국에 비교적 낯선 것이고, 중국 내부의 상황은 더욱 심각합니다. 민간은 억압된 것이어서, 본래 사료가 아주 적습니다. 또 다른 특징은 흥기하자마자 바로 진압되었다는 것입니다. 역사가 준 시간이 너무 적습니다. 1957년 북경대학 학생들의 사회주의 민주운동의 경우 20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론적 결핍이 초래됩니다.

    문제를 제기하지만, 역사를 통해서 전개해나갈 시간이 없이 요절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민간사조는 새롭게 발굴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조가 왜 재발굴되는가? 제가 보기에 역사에는 내재적 동인이 있는데, 현재 중국의 경우 좌익의 자원을 새롭게 발굴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나는 이 점에 주목하게 되었고, 결국 현재의 민간운동에 이론적 자원을 제공하기 위해 민간사상 발굴작업을 해왔습니다. 동시에 나를 가장 매료시키는 것은 이를 통해 어떻게 중국 혁명과 중국 개혁개방에 대한 해석력 있고, 비판력 있는 역사서술을 제공할 수 있는가 입니다.

    백: 민간 운동에 사상적 자원을 제공하는 측면 외에, 이러한 과거 역사의 역사로 회귀한다는 것은 어떤 장점을 갖나요?

    전: 중국 사회주의를 얘기할 때, 대부분 모택동의 사회주의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민간의 사회주의가 새롭게 발굴되어 중국 사회주의에 대한 복잡한 이해를 갖게 됩니다. 이는 중국의 역사 발전이 그렇게 필연적이고 단선적이 아니라, 다른 가능성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측면입니다.

    모택동은 공산주의 운동에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모택동주의는 스탈린주의와 달랐습니다. 일반 통치자들은 기존 질서를 지키고자 하지요. 그러나 모택동은 체제에 불만족스러웠습니다. 문혁 시기를 보세요. 전복시키려고 합니다. 우리가 문혁중에 모택동에게 이끌렸던 것은 바로 모택동의 이런 측면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다른 사회주의 체제와 다른 측면입니다. 이러한 통치자는 매우 희귀합니다. 이는 중국에 특수성을 부여해줍니다.

    그리고 그는 현행 체제 하에서 반드시 민간의 지지를 통해서만 이런 불만을 표출하고 반영할 수 있었습니다. 민간이라는 새로운 자원에 기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의 관료 체제에 대해 불만을 가지면, 당 외부에서 지지 역량을 찾아냅니다. 당외에서 민주당파를 찾았던 반우파운동과 문혁 시기의 청년 학생들이 그렇습니다. 조금 이상합니다. 노동자, 농민은 직접적인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현실주의적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체제의 총체적 불안정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청년학생에게 기댔던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학생이나 민간의 측면에 대한 이해 없이는 모택동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백: 저도 모택동의 특수한 위치에 주목합니다. 그는 아래로부터의 민간 사조를 흡수하고, 나아가 당의 관료화를 정돈하고 이론화하지만, 그는 이어 당국가체제의 수호자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한다. 그런데 결국 아래로부터의 맹아를 짓밟게 됩니다. 이는 아주 모순적입니다.

    전: 이는 참으로 중요하고 흥미로운 역사 속 상황입니다. 중국의 민간운동은 표면적으로 보면 별 역할을 못한 것 같지만, 사실 특수한 형식으로 작용합니다. 그들은 억압되지만 그들이 제기한 명제는 살아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억압한 자가 후에 그들의 명제를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등소평과 1957년 학생우파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등소평은 57년 우파를 진압한 핵심인물입니다. 모택동이 기획자라면 등소평은 집행자였지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절대 복권되지 않습니다. 개혁개방 이후에 쓴 가장 중요한 ‘국가와 당의 지도체제’에 관한 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이를 57년 우파들의 주장과 일일이 대조하고 나서, 그의 중국 정치 체제개혁의 강령적 내용이 대부분 당시의 우파와 민간의 자원을 흡수한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여기에 진압자가 피진압자의 유서의 집행자가 되는 역설이 있습니다. 따라서 민간은 이런 식으로 역사를 추동합니다. 그들 자신의 운명은 매우 비극적이고 현재까지도 역사적으로 인정 받지 못합니다만, 역사는 그들이 전진시킨 것입니다. 이 역시 중국의 특수한 측면인 것 같습니다.

    백: 민간이단 사조와 상층의 억압 사이의 모순이 가장 첨예한 시기는 문혁 시기라고 봅니다. 제가 선생님의 책을 읽는 방식은 문혁의 기원, 문혁의 과정, 문혁의 후과로 나누어 읽는 것입니다. 중국 사회주의의 모순이 집중적으로 폭발한 것이 문혁 시기인데요. 사회주의와 그 안에서의 문혁에 대한 선생의 사유로 볼 때, 다른 역사서술과 어떤 차이를 갖는다고 보는지요?

    전: 주류 역사 서술에서는 민간이 전혀 없습니다. 나는 처음으로 민간을 역사 속에 넣은 사람이지요. 저의 이런 서술에는 희생자에 대한 추도의 의미도 있습니다. 주류적 역사서술은 관점이나 입장이 앞섭니다. 그래서 모든 사실을 마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사실을 기록하고, 대면하고, 모든 것을 드러냅니다. 이는 제가 추구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모순이 있을 수도 있지만, 독자에게 그 모순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 긴장을 보여줍니다. 나의 주석과 본문 사이에 자주 모순이 있기도 합니다. 나는 이것이 어떤 긴장을 만들어내기를 바랍니다. 이는 입장과 관점이 분명한 역사서술과 다릅니다. 역사학은 법칙을 해석합니다. 이는 기존의 관념과 법칙에 역사를 꿰맞추는 것으로 아주 문제가 많습니다. 이것이 나의 역사서술이 갖는 차이입니다. 또 하나의 큰 차이는 나 자신의 주체성이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역사서술에서 금기 같은 것이지요.

    올해 이미 출간되었던 첸리췬 교수의 책

    백: 네. 특히 망각된 과거에 대한 사실이 그렇습니다. 말씀하신 두번째 특징인 자신의 이야기를 넣는 점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선생은 문혁 시기의 활동가이며, 모택동 사상 속에서 살았던 전형적인 모택동주의자로서, 그 후 문혁에 대해 성찰하여 유의미한 비판을 진행하였습니다. 종종 모순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보통 회고와 반성은 어떤 편견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러한 긴 역사 서술 속에서 선생은 어떤 원칙으로 성찰을 진행하는지요.

    전: 문혁과 문혁 이후에 대한 나의 사상적 역정은 민간 사상가 또는 문혁 중의 이른바 ‘조반파’와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다음과 같은 과정이 있습니다. 문혁 이전에 우리는 모두 사회와 어떤 모순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모순은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택동이 우리의 현실적 불만을 이론적 수준으로 올려줬습니다. ‘당내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가 그것이지요. 우리는 그래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독재 하의 계속 혁명’이라는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모택동의 사회적이고 대중적인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택동은 일정정도 우리에게 사상해방을 안겨줬습니다. ‘모든 것을 회의하라’. 이는 우리에게 엄청난 해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상을 수용한 후, 이를 끝까지 밀어 부치면, 모택동에 적용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나옵니다. 논리적으로는 필연적이지만, 모택동은 허용하지 않지요. 모택동주의자가 모택동과 당에 대한 회의를 급진화하고 철저화하면, 이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택동으로부터 빠져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일정한 과정이 필요했습니다. 나는 조금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너무 깊이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시 모택동에 성찰해야했지만, 또 등소평과 주은래도 비판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문혁 직후의 나의 고민이었다.

    그런데 문혁 이후 내가 알지 못했던 상당량의 자료들이 공표되면서, 결국 나중에 나 자신의 모택동에 대한 판단이 오류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스로는 사상해방이라고 여겼지만, 사실상 숭배아저 일종의 정신적 노예가 되었던 것임을 깨닫고 나서, 아주 고통스럽게 빠져 나오는 과정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실 나의 모택동 서술은 변화합니다. 우리는 80년대에 문혁과 모택동에 대한 회고 및 성찰했고, 모택동에 대한 비판자였습니다.

    그런데 90년대에 와서 변화가 발생했습니다. 80년대의 문제는 모택동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것, 즉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면, 90년대, 나아가 21세기 초는 중국의 자본주의화와 양극화의 문제를 대면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모택동을 보게 되었고, 모택동은 매우 복잡해집니다. 간단히 부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일정한 합리성도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90년대 후기 나는 현실에서의 문제와 위치가 모순된다. 80년대에 전제적 사회주의를 돌파하고자 했다면, 90년대 이후에는 전제적 사회주의가 자본주의화된 것이었습니다. 나의 사상의 복잡화는 이러한 배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노신을 연구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리했습니다. 노신은 20세기 초에 이중적 비판을 했습니다. 완년에는 자본주의도 비판했고, 사회주의 이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신을 통해 나 자신의 위치가 갖는 모순을 해명할 수 있었고, 모택동에 저항하고 비판할 수 있었지요. 나의 모택동관은 이러한 과정 속에서 발전되어 온 것입니다.

    백: 우회라고 할 수도 있고, 실마리를 찾았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신을 통한 이런 길을 걸은 이후 모택동이 달라졌다고 했는데, 지금 보기에 모택동은 80년대와 90년대의 모택동과 또 다를 것 같습니다. 지금은 모택동을 어떻게 보나요?

    전: 어떤 곤경이 있다. 자본주의화에 대해면해서 나는 자본주의화에 반대합니다. 이는 내가 청소년시절부터 견지해온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주의의 현실적 형태, 즉 북한, 중국 등의 전체주의 문제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신좌파는 나를 전체주의 비판자로 규정짓는데.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파는 나를 모택동주의자로 보는데, 내가 이를 어렵게 성찰을 통해 모택동을 빠져 나왔다는 점을 부정합니다. 나는 어떻게 이러한 극권 사회주의 역사 속에서 합리적인 것을 찾을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된 것이 바로 민간 사회주의의입니다. 그런데 이는 매우 제한적이고,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또 매우 의미 있는 것입니다.

    백승욱 교수와 대담 중인 첸리췬 교수

    백: 질문과 답을 나누어 본다면, 문혁으로 돌아가 볼 때, 문혁 시기 제기된 문제가 지금은 제기되지 않습니다. 조반파의 질문은 여러 쟁점이 있는데, 그들의 질문은 보편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특히, 당과 대중의 모순, ‘무엇이 사회주의인가’, 자율적 정치주체의 성립, ‘자율적 주체는 구조를 변혁할 수 있는가?’ 등이 그렇습니다. 보편적인 측면에서는 이러한 질문도 제기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문혁 시기 민간 이단사조를 통해서 그들은 무엇을 하려고 했다고 보시나요? 목적은 무엇이었고, 왜 실패했으며, 그 비극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전: 중국의 경험은 각국의 반자본주의 운동과 관련 있습니다. 하나의 교훈을 말씀드립니다.당의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의 신앙을 갖는 당이 권력을 잡으면 기득이익자의 대변인 집단이 됩니다. 이는 정당정치의 가장 첨예한 모순입니다. 대만을 봐도, 민주진보당은 ‘민주’와 ‘진보’라는 신앙을 가진 정치 집단이지만, 정권을 잡고 나서는 기득이익집단을 대변합니다.

    이러한 과정은 보편적 의의를 갖습니다. 기득이익으로 되는 것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가? 대중의 측면에서 보면, ‘전도된 역사를 다시 전도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억압자가 다시 억압자가 되는 것이지요. 나는 다른 이를 억압하는 자는 자유가 없다고 봅니다. 이는 중요한 명제이지요. 자신의 자유로운 주체적 지위를 얻는 노력은 정확한 것이지만, 다시 타인에 대한 억압자가 되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내가 책에서 정리한 것처럼, 모택동주의자 스스로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나중에 모택동으로부터 빠져 나왔는데, 여전히 모택동식 사유에서 나오지 못한 것이 그것이지요.

    백승욱 교수가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의 양희광의 경우가 전형적입니다. 여전히 모택동의 방식, 즉 계급투쟁과 폭력혁명이라는 사유를 버리지 못합니다. 이는 이상주의자의 모순이기도 합니다. 이상을 위해 자유를 희생하는 방식입니다. ‘나는 진리의 담지자이므로, 그래서 진리에 이견을 갖는 자는 적이고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타격은 계급투쟁의 방식을 취합니다. 모택동주의자와 모반자는 다들 크고 작은 모택동입니다. 급진주의자의 문제이기도 한데, 그들은 너무 멀리 나가서 대중으로부터 유리됩니다. 내 경험을 얘기하자면, 문혁 후기 대부분의 대중은 물질조건을 변화시키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당시 이러한 민심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상 속에서 살았지요. 이것이 우리가 실패한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등소평의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백: 문혁 시기 모택동의 문제를 제기해 봅니다. 역사서술의 방법론과 문혁 시기 모택동 해석과 관련되는데요. 기존의 역사서술을 비판하면서 문학과 역사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는데. 모택동 해석에서의 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전: 모택동은 모순은 그의 이중적 신분에서 옵니다. 체제의 대표이자 기득이익자의 대표이지만, 그 자신이 모반적 성격이 있습니다. 파리코뮨 등에 전거하는 측면이 그렇지요. 그런데 모택동은 당의 문제에서 막힙니다. 상해코뮨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당은 어떡하는가’라고 제기합니다. 당의 지위가 흔들리면 더 나갈 수 없습니다. 당신이 제기했듯이, 이러한 상황에서 모택동은 더 이상 청년 학생에게 의지할 수 없어, 그들을 농촌으로 하방합니다. 그러나 그는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다시 노동자를 찾아냅니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조건에서 불가능한 것이지요. ‘노동자가 모든 것을 지도한다’는 것은 당시 이미 불가능해진 상황이었습니다. 포기했지만, 또 아쉬운 상황에서 찾아낸 것이 사상적 근거입니다. 노동자들의 자주적 관리는 기술, 문화적 수준이 담보되어야 합니다. 그러되지 않는 상황에서. 결국 이는 헛소리가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그는 죽기 직전에도 100년 후 큰 인물, 작은 인물 등등의 이야기를 합니다. 영원히 저항을 버리지는 않지요. 절대적 평등, 이상 등의 유토피아를 버리지는 않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모택동에 대해 어느 정도 존경을 표합니다.

    백: 이 역사에서 반복되는 규칙이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역사 속의 구체적 모순이다. 68년의 경우, 중요한 문제가 파리코뮨 원칙과 노동자의 문혁 참여, 즉 노동자 자주 관리였다. 모택동의 모순과 관련되는데 구체적 진행은 매우 복잡하다.

    전: 이는 우리 연구의 선천적 한계와 관련된다. 당안이 공개되지 않아 연구하기가 아주 어렵다. 상해코뮨 시기 모택동이 반대했는데, 왜 그랬는가. 이는 모택동의 모순일 뿐 아니라 그 주변의 상황 등을 모두 분석 연구해야 하는데, 모택동이 전제주의와 유토피아라는 현재적인 이해는 이러한 제약 속에서의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연구는 선천적 부족 속에서의 문혁 연구이다. 지금 많은 회고록이 출현하고 있는데, 나는 학자로서 그들의 회피하는 것들을 나름대로 고려하면서 이용할 수 있다. 회고록은 아주 많은 신뢰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백: 이러한 성찰을 통해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전: 현재 마르크스가 말했던 것과 유사하게 문혁의 그림자 또는 유령이 중국을 뒤덮고 있다. 문혁의 민간운동은 어떻게 특권계급출현을 방지할 수 있는가를 제기했다. 그런데 이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57년에 시작되었고, 90년대 이후 전면적으로 특권사회가 형성되었다. 권력과 자본/시장이 결합되자 이 특권계급, 즉 권력자본의 문제가 아주 심각해졌다.

    현재 중국의 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박희래(보시라이)와 같은 모택동파들은 문혁과 모택동의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부패 해결하는 것은 제1인자/제1서기의 독재를 통한 해결방식이다. 그런데 이는 대중적 기초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문제는 중국 각 계층 사이에 아주 심각한 불안감, 불신임, 원한과 적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상층의 모택동, 하층의 작은 조조라는 상황이다. 또 다른 방식의 문혁이 출현할 위기가 있다. 결국 간단히 말해서, 민주, 법제, 등으로 온건적 개혁을 하거나, 아니면 대대적 동란을 다시 겪거나 하는 방향이 있지 않을까 싶다.

     백: ‘모택동 열’을 어떻게 보나? 자본주의화에 대해 비판하면서 모택동을 다시 되살려낸다.

    전: 중국의 특이한 현상이다. 중국은 80년 주은래, 유소기 등이 인기가 있었지만 신이 되지 못했는데, 모택동은 이미 민간의 신이 되어 있다. 농민들의 가정 일상에 들어와 있다. 나는 3대 민간운동. 권리방어운동, 인터넷 운동, 비정부조직을 제기했다. 여기에 영향이 큰 것이 자유주의 사조이고, 둘째가 모택동이다. 노동자들은 예전에 자주 모택동 깃발을 들었는데, 요즘은 법제를 많이 든다. 이러한 상황은 사실상 지식인의 책임방기가 초래한 것이다. 새로운 사상자원을 제공하지 못했다. 인터넷의 경우 상당수 모택동주의자가 활동한다. 지원자의 우수한 자원이 농촌에 간 다음 모택동 숭배자들과 함께 하게 된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좌파의 영향력은 크지 않고, 사회 민주주의는 거의 영향력이 없다.

    백: 신좌파에 대한 우경화라는 비판과 관련해서, 그 변화는 최근의 변화인가 근본적인 문제인가?

    전: 나는 체계적으로 그들은 연구하지는 않았다. 친휘와 왕휘 사이에서 나는 모호한 위치에 있다. 중국 자유주의는 변화하고 있다. 처음에는 현실의 수호자였지만, 지금 그들은 평등의 깃발을 들고 나온다. 그러나 나는 신좌파가 원래부터 민족주의였다고 보지는 않는다.

    백: 그들의 주요한 문제는 어디에 있나?

    전: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이 중국의 현실, 실제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3대 민간운동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론적 논쟁 및 국제 좌파와 대화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종종 중국 또는 문혁을 이상화한다. 왕휘가 반현대화의 현대화를 이야기했는데, 서방에서 매우 인기가 좋다. 우리 국내에서 보면 현실과 별 관련이 없다. 그들은 국가를 대표하는 위치에서 국제적인 역할을 하기를 좋아한다. 완전히 현실을 떠난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들이 지금 가장 우수한 학생들, 븍경대, 청화대 학생 등의 선생들인데, 참으로 곤혹스럽다. 그들 젊은이들은 아주 강한 이론적 심취를 갖는다. 그들은 한국과 달리 사회운동과 무관하다. 그들은 일정하게 책 속에 그리고 국제 시야 속에 있는 좌파이다. 그들은 입장이 먼저 있다. 그래서 입장에 위배 되면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론으로부터 출발하여 이런 한계를 갖는 것이 모종의 좌파의 공통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중국 지식인의 중산계급화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백: 문혁 시기는 40년 전 일이고, 개혁개방 이후 변화가 많았다. 지금 우리가 문혁 연구를 한다는 것, 나아가 과거를 연구한다는 의미는 어떤 것인가?

    전: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과거의 체제가 변화하지 않았다. 문혁은 역사가 아니라 현실이다. 둘째,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현실에 비판적 사상자원을 제공한다. 방금 얘기했는데. 나의 책의 또 하나의 목적은 중국이 g2가 된 후, 한국 등 주변국가들이 중국에 대해 관심이 많다. 나는 공화국 60년이 중국이 중국의 100년 동안의 3가지 목표(독립, 통일, 경제)를 해결했고, 물론 아주 많은 대가를 지불했는데, ‘이러한 중국이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제기했다고 본다. 다들 중국의 상황이 분석 불가능하다고 느낀다. 나는 중국의 체제에 대한 독립적인 정리(57체제, 6.4체제)가 하나의 분석 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외국의 친구들이 중국의 현실을 이해할 때 필요한 역사적 맥락을 이렇게 제공하고자 한다.

    57체제는 모택동이 57년 반우파운동이 제기한 당이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것이다. 1) 당이 정부를 관장. 당의 정법위가 법원보다 높다. 보시라이의 부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보라. 2) 당이 군대를 관할. 2) 당은 유일자. 당 외에는 어떤 사회조직을 허락하지 않는다. 4) 당은 사상의 통일. 5) 당은 기층까지 모든 제1서기의 독재로 구성됨. 6.4체제는 새로운 계급과 계층을 형성했다. 상층 권력자본계층, 지식엘리트, 민영기업가. 하층 하강노동자, 실업노동자, 무토지농민, 농민공 등. 이 체제는 기득이익집단이 자신의 이익을 공고히 하는 체제이다. 간단히 말해 권력과 이익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백: 마지막 질문이다. 앞으로 어떤 계획은 어떠한가?

    전: 두 개의 3부작을 준비하고 있다. 민간사상사 3부작으로, 이미 나온 것은 <망각을 거부하라: 1957년학 연구기록>이 있다. 앞으로 쓸 계획으로 있는 것이 <문혁 민간사상사>, <80년대 민간사상사>이다. 이는 민간사상사 역사서술의 계보를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이후는 다음 세대에게 맡길 수 밖에 없다. 나는 청년들이 이러한 계보를 통해 자신의 사상 자원을 얻기를 바란다. 또 하나의 3부작은 지식인 정신사이다. 전형적인 지식인에 대한 3부작인데, <1948:천지현황>이 이미 나왔고, 1949년에서 문혁후기까지를 다루는 저작을 준비 중이다. 8~90년대에 대해서는 <나의 정신자서전>으로 출판되었다.

    백: 중국과 한국 사이에 유사한 문화적 배경이 있지만, 이미 낯설고 오해하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 어떤 제안을 할 수 있겠는가?

    전: 이 책을 포함해서 올해 3권의 책이 한국에서 출판되어 너무 기쁘다. 한국의 지식인들이 중국에 대한 인식을 더욱 복잡화할 수 있기를 바란다. 백승욱 교수가 이런 주체적 접근을 하는 것도 매우 반갑다. 나의 책의 운명이 늘 그렇듯이, 국내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서로 다른 반응이 존재하는 것 같다. 나는 더욱 복잡한 이해가 가능하길 바랄 뿐이다. 한편, 중국은 한국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대국주의와 관련된다.

    앞으로 중국의 학자가 한국과 많이 교류하길 협력하길 바란다. 과거 한국에서 강연에서 한 가지 걱정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한국의 공장이 중국으로 이전하는 문제가 좋은 점도 있지만, 중국 내부의 모순을 심화하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었다. 내 생각에 나의 책이 한국에서 출판된 것처럼 한국의 책이 중국에서도 많이 출판되길 바란다. 중국의 학자들이 한국에 대해 먼저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교류가 있었으면 좋겠고, 이를 통해 불필요한 오해를 풀기 좋겠다. 개혁개방 이후 경제적 교류가 늘어날수록 갈등도 늘어난다. 이런 점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민족주의의 문제에 대해 양쪽의 지식인들이 모두 국내 민족주의에 대한 경계해야 한다. 민족적 정서는 아주 쉽게 비이성화를 초래한다. 노신이 말했듯이, 양국의 깨어있는 지식인들 사이에서 교류가 있기를 희망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젊은 세대들을 키워내고 서로 교류하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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