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이젤 참사와 중앙위 폭력 사태
    [축덕후의 정치직관] 관중 39명 사망...후속조치 미흡 사건 재발
    By 시망
        2012년 05월 23일 03:3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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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년 5월 29일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헤이젤 구장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양식이 있던 축구팬들을 비탄에 잠기게 만들었던, 그리고 지리학적으로 대륙과 떨어져 있던 잉글랜드 축구를 실제 대륙과 떨어지게 만들었던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 대충 검색해보면 알겠지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유로피언컵 (지금으로 따지면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리버풀과 유벤투스의 대결로 벨기에 브뤼셀의 헤이젤 스타디엄에서 열린다. 그리고 킥오프 한 시간 전 갑자기 관중석의 7m 높이의 콘크리트 벽이 무너지면서 참사가 벌어진다. 사람들이 콘크리트벽에 눌리고 깔려 사상자가 발생하여, 39명의 사망자와 부상자 454명이 나오는 대참사로 연결된다.

    헤이젤 참사

    이렇게 간단한 정보이고 알만한 사람은 다 알법한 사건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나도 검색을 해보고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리버풀의 훌리건들이 만들어낸 사건이라는 정보가 거의 대부분인데, 그런데 ‘과연 그렇게 단순한 사건이었는가?’라는 의문이 들어서이다..

    본론 들어가자..

    훌리건들의 난동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였던가?

    먼저 사건의 원인을 살펴보면, 리버풀의 훌리건들이 단초를 제공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리버풀에서 브뤼셀로 넘어가는 배 안에서 이미 술에 꽐라가 된 놈들이 생기기 시작해서 브뤼셀을 헤집고 다닐 때에는 이미 만취가 된 놈들이 과장 좀 보태서 절반 이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훌리건들이 1차적인 책임이 있다는 점에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서 끝을 낸다.(실제 당시 잉글랜드 수상이었던 대처 내각도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문제를 풀어보겠다고 했지만 참사 하나를 더 부른 끝에 ‘축구 모르는 것’들이라는 비아냥을 듣는다..)

    그럼 내가 생각하는 다른 문제들을 더 짚어보겠다. 지금이야 TV를 통해서 보는 유럽의 경기장들은 현대적이고 깔끔하지만, 당시만 해도 스페인과 이탈리아 정도를 제외하면 경기장 노후화는 걱정스러운 수준이었다. 헤이젤 참사가 난 이후에 그 당시를 증언했던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왜 그런 경기장에서 그 큰 경기를 치뤘단 말인가?”라는…

    노후된 경기장과 그 이후의 대처들이 참사를 더 크게 만들었다.

    그랬다. 그런 낡은 경기장에서 술에 취한 훌리건들을 구경꾼으로 모아놓고 경기를 한다는 것은 이미 시한폭탄을 짊어지고 경기를 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벨기에 경찰과 UEFA의 대처방식도 대단히 미흡했다는 것이 양식있는 사람들의 의견이었다. 벨기에 경찰은 이미 브뤼셀 곳곳에서 폭력사태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넋 놓고 있다가 사고가 터진 이후에야 급 정리모드에 들어갔다는 점에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또한 UEFA는 경기장 안에서 양 클럽의 서포터들을 제대로 분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지금이야 철저하게 홈팀과 어웨이 서포터를 구분하지만, 당시에는 달랑 철조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방치했다..

    서로 이질적인 문화의 충돌이 사고를 키웠다.

    마지막으로 문화적인 충돌과 그에 대한 무지가 사고를 키웠다는 점이다.. 당시 잉글랜드에서 유행하던 응원방식이 바로 ‘내달리는 것’이었다. 상대 서포터를 향해 위협적으로 내달리는 것뿐이었고 이는 그야말로 내달리는 것 이상이 아니었다. 이런 행동이 폭력사태로 연결되는 일은 드물었고, 잉글랜드에서는 이를 응원의 한 방식으로 인정했었다.

    그러나 이는 그런 질주가 일종의 룰이었던 잉글랜드에서만의 이야기였다.. 잉글랜드에서 내달리는 것이 축구에 미친 젊은 애들의 문화로 이해가 됐던 것에 비해 브뤼셀의 유벤투스 서포터들에게 그것은 실질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에 대한 반응은 두가지로 나타났다. 이탈리아의 훌리건과 비슷한 종류인 울트라는 그 즉시 반격으로, 그냥 경기를 즐기기 위해 왔던 일반 관객들은 공포에 질려 출입구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사태는 이미 걷잡을 수가 없었다. 훌리건과 울트라들은 관중석 여기저기에서 난타전을 벌였고, 엄청난 숫자의 관객들이 출입구로 몰려들면서 노후한 경기장은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렇게 그 날의 대참사는 완성됐다..

    그 결과 잉글랜드는 국제대회 참가가 5년 동안, 리버풀은 7년 동안 금지됐다..

    결론 들어가자.

    고백하자면 이번 주제로 헤이젤 참사를 잡은 이유는, 사고가 있었던 5월 29일이 다가오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5월 12일에 있었던 통합진보당의 중앙위의 폭력사태를 본 후 이 주제를 다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이젤 참사가 있은 후 5년과 7년의 출장정지를 받았음에도 잉글랜드 훌리건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여전히 훌리건들의 질주는 계속됐고, 그저 위협이었던 것이 점점 충돌로 발전하는 일이 늘어갔다. 대처 내각 또한 ‘경기장 내 알콜 반입금지’, ‘지정좌석제’ 정도의 해법과 강경진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나이브함을 드러냈다.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내놓는 해법이 제대로 된 해법이 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수백명의 사상자를 내고도 문제를 제대로 짚지 못한채 시간은 흘렀고, 당연히 더 큰 참사로 이어졌다. 그렇게 힐스보로우 참사는 일어났다..

    힐스보로 참사 : 처방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결국 엄청난 인재로 이어졌다

    헤이젤로도 정신을 못 차리던 잉글랜드 정부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고 제대로 된 대안(테일러 리포트)을 내놓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1992년 프리미어리그 개막으로 이어지는 힘이 되었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그 동안 소위 당권파는 운동권 내에서 그들 방식으로 내달리기(패권적 행동)를 했을 뿐이었고, 그것이 또 내부적으로 무마된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이탈리아 클럽(국참계열)이라는 새로운 문화와 만나면서 대참사로 이어진 것이 바로 지난 12일의 중앙위였다고 난 생각한다.

    문제는 이후이다. 헤이젤 참사가 터진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요구했던 테일러 리포트(통합진보당의 혁신)가 나왔다면 그 보다 더 큰 힐스보로 참사로는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통합진보당이 지금 제대로 된 해법을 보여줘야 하는 이유를 헤이젤은 알려주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힐스보로우가 보여주고 있다

     

    필자소개
    지역 공동체 라디오에서 기생하고 있으며, 축구와 야동을 좋아하는 20대라고 우기고 있는 30대 수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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