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난 속에 꽃핀 새로운 변화의 힘
    [서평]『이 폐허를 직시하라』(레베카 솔닛/ 펜타그램)
        2012년 09월 15일 10: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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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부터 2005년 뉴올리언스를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이르기까지 99년 동안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발생한 다섯 건의 대형 재난을 심도 있게 연구 조사하여, 대재난 속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보인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독특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한 책이다.

    지은이는 1980년대부터 쉼 없이 정치사회적 이슈에 대해 발언하고 사회운동에 참여해온 진보적 저널리스트로, 국내에서는 전작 《걷기의 역사》와 《어둠 속의 희망》으로 이름을 알린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이다.

    지은이가 책에서 5부로 나누어 살펴본 주요 대재난은 다음과 같다.

    1906년 4월 18일, 샌프란시스코 대지진과 화재
    1917년 12월 6일, 캐나다 노바스코샤 주 핼리팩스 항구에서 발생한 무기수송선 폭발
    1985년 9월 19일, 멕시코시티를 안팎으로 뒤흔든 대지진
    2001년 9월 11일, 뉴욕 세계무역센터 붕괴
    2005년 8월 29일, 뉴올리언스를 초토화시킨 허리케인 카트리나

    재난 하면 어떤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약탈과 파괴와 살인과 폭동, 상실과 고통과 비애로 가득한 디스토피아를 떠올릴 것이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재난의 역사를 더듬고, 관련 학자들의 주장을 검토하고, 수많은 재난 경험자의 육성을 들어본 뒤, 재난에 대한 기존의 통념에 도전하는 파격적인 주장을 제시한다.

    통상적인 재난 이미지들은 소수 권력자들의 두려움(엘리트 패닉)이 불러일으킨 상상이며, 미디어가 더욱더 강화하고 널리 유포한 이미지일 뿐,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오히려 재난 속에서 많은 이들이 강렬한 ‘기쁨’과 사랑, 연대의식을 경험하며, 그러한 경험은 재난이 일어나기 전 사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와 약점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재난은 지옥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어떻게 믿고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이 지옥은 유토피아를 향해 열린 문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지은이의 주장에 따르면, 기존 사회질서가 갑작스레 무너진 이 폐허 속에서 사람들은 그동안 중요하게 여겼던 모든 가치에 의문을 갖고 더 본질적인 무언가를 응시하게 되며, 그 결과 놀라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다.

    또한 재난 속에서 사람들은 이타주의라는 ‘인간 본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내고, 자발적으로 형성된 공동체는 뛰어난 임기응변 능력을 보여주며, 그 속에서 따뜻한 연대와 상호부조가 꽃피고, 활발한 시민사회가 부활한다고 한다. 이러한 양상은 축제 혹은 혁명과 유사한 측면을 공유한다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요컨대 재난은 기존의 체제를 파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사회변화를 일구는 추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을 도출하기까지, 지은이는 주요 연구 대상으로 삼은 위의 다섯 가지 대재난 외에도 세계의 다양한 재난(최초의 현대적 재난으로 통하는 1755년 리스본 지진, 일본 관동 대지진, 중국의 지진,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혁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마나과 지진,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 사고,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런던 대공습, 1973년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 사건, 2001년 아르헨티나의 경제 붕괴 등) 관련 자료를 검토했다.

    또한 핼리팩스, 멕시코시티, 뉴욕, 뉴올리언스의 수많은 재난 경험자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자료로 남겨진 그들의 육성에 귀 기울여, 현장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반영했다.

    이 책은 그 구성 요소들이 방대하고 다채로운데다 현장 묘사와 분석이 병행되어 있어, 때로는 명쾌한 논문 같고, 때로는 사색적인 철학 에세이 같으며, 때로는 박진감 넘치는 르포 같은 속성을 보인다.

    우리는 지금 심각한 기후변화와 2008년 이후 가속화되고 있는 경제위기(공황)로 나날의 생활이 재난인 시대에 이미 들어서 있다. 재난의 정치사회적·철학적 의미를 고찰한 이 책은 향후 우리에게 펼쳐질 세상에서 우리가 깊이 고민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신선한 지적 충격을 선사할 것이다.

    ‘1부 황금시대의 우애 :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의 내용을 보면 지진이 난 지 몇 시간 뒤에 펀스턴 준장이 이끄는 군대가 샌프란시스코를 점령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재난 대응을 진두지휘한다. 하지만 군대는 시민들을 폭도 혹은 적으로 취급하고 부적절하게 대응하여 지진 후 남은 것마저 불에 타거나 폭발하게 만드는 오류를 범한다.

    한편 권위적인 엘리트와 달리, 평범한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무료 급식소와 응급 처치소를 세우고, 자신에게 남은 물건과 공간을 다른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내주고, 평소와 달리 활기차게 대화를 나누며 침착하게 대응한다. 샌프란시스코 지진은 현대 재난에서 나타나는 모든 양상을 보인 원형과 같은 재난이다. 이 지진을 통해 미국 실용주의 철학의 태두, 윌리엄 제임스는 ‘인간 본성’에 대한 생각에 큰 변화를 겪었으며, 어린 시절 캘리포니아에서 지진을 겪은 도로시 데이는 이후 평생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급진적 가톨릭 사회운동을 추진했다.

    “재난은 습관적이고 제도화된 행동 양식을 중단시키고 사람들을 사회적·개인적 변화에 따르게 하는 일종의 사회적 충격을 낳는다.”
    -찰스 프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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