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령화 사회, 재래시장 귀환시키다
    [일본의 일상] 유통업계의 치열한 전쟁과 변화 몸부림
        2012년 05월 23일 10:1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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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SM, 시장, 편의점

    작년 초까지 집에서 반경 1km 안에는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유명한 편의점이 두 개, 지방체인 슈퍼마켓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작년 초에 집근처에 큰 도로가 생기고는 좀 달라졌다. 편의점 두 개, 농협직판장 하나, 저가형 슈퍼마켓이 한 개 늘었다.

    도로는 계획된 지 삼십 년 만에 완공되었고, 주변의 변화는 6차선 도로가 생겨서 통행량이 늘고 사람이 다니기가 도리어 좀 불편해졌다는 정도이다. 그런데 도로가 생기자 그 도로변을 따라 이런 것들이 생겨난 것이다.

    기존의 감각으로 편의점은 주로 젊은 층이 많이 이용하는 유통 업체였는데, 미국 발 모기지론 사태를 기점으로 다양한 변화가 생겼다. 물론 변화란 단순히 한 가지 요소에 의해 결정되지는 않는다.

    그 시점에 미국 발 모기지론 사태와 몇 가지 맞물리는 것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유통업 의 변화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SSM의 부진과 편의점의 변화, 재래시장의 활성화다. 또 다른 하나는 뉴타운의 몰락. 일본에서 말하는 뉴타운은 계획된 주거단지 지구 조성을 말하는 것으로 한국처럼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별로 없는 일본에서는 일종의 고유명사에 가깝다.

    어쨌든 편의점의 변화는 유통대기업의 합병과 혼란 속에서 유도되었다. 주로 역 근처에 포진하는 로손은 미츠비시 산하에서 일본우편으로 민영화된 우체국과 합병해서 우체국이면서 편의점인 점포를 만들었으며, 채소를 취급하는 채소 전문 로손을 만들기도 했다.

    도쿄의 가장 비싼 땅 긴자의 뒷골목 상점가.

    미국 발 경제 위기와 유통업계

    제일 큰 편의점 체인 세븐일레븐은 이토요카도(미츠이물산) 산하로 들어갔으며, 그룹 내에서 전자화폐를 유통하는 은행을 만들었고, 패밀리마트는 세이부 백화점 그룹의 산하로 들어가서 그 힘으로 더 저렴하고 다양한 PB(Private Brand. 유통업체 자체 상호) 상품을 개발했다.

    이 현상은 미국 발 모기지론 사태로 벌어진 경제위기 속에서 유통업체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기업이 빠르게 합병과 인수를 하면서 벌어진 일이고, 살아남기 위한 변화였다. 일차적으로는 열 개의 도시은행이 정리 통폐합하여 다섯 개로 줄었고, 은행의 통폐합이 다른 여타 기업의 통폐합 내지 합병을 이끌었다.

    군소기업도 역시 변화를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로손처럼 역 근처 소규모 점포의 전략을 갖고 있는 바이더웨이나 미니스톱은 전문점 커피와 샌드위치를 내세워 기존보다 점포 크기를 키우고 그 외의 군소편의점도 역시 젊은 층보다 지역 특색에 맞는 저마다의 색깔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주택가 편의점들은 반찬과 채소에 주력하게 되었고, 새로 도로가 난 내가 사는 집 근처는 졸지에 대형편의점 체인의 격전지가 되어버렸다.

    이 변화의 또 다른 축은 고령화 사회이다. 몇 년 전 통계에 의하면 65세 이상 고령인구가 드디어 30%가 훌쩍 넘어버렸다. 고령인구가 늘어나면 장보기 동선이 짧아진다. 운전이나 많은 짐 들기도 부담스럽지만 무엇보다 소비할 가족이 없다.

    도시 외곽 대형유통업체의 위기

    더구나 점점 늘어나는 75세 이상 초고령 인구 중에 배우자가 없이 혼자 사는 독거노인이 늘어나면서 대형슈퍼마켓 장보기는 거의 의미가 없어진다. 집 근처 슈퍼에서도 눈에 자주 띄는 것은 노인층이 빵과 음료수, 도시락을 구입하는 모습이다. 혼자서 요리를 해먹기에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고령층의 인구가 오히려 빵 소비의 가장 큰 시장이 되어버렸다.

    특히 고령 남성들은 장바구니는 매우 가볍다. 오후에는 컵 술(뚜껑만 따면 컵 모양이 되기 때문에 그대로 마실 수 있는 병에 담긴 술)이나 맥주와 도시락만 달랑 들고 줄 서는 남성들이 많이 보인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한동안 승승장구하던 시 외곽에 위치한 대형유통업체 SSM이 점점 위기에 몰리기 시작했다. 시 외곽에서 주로 자동차로 통근하며 아이들을 키우는 세대는 줄어들었고, 도시에 사는 고령인구는 더 이상 운전도 대량구매도 하지 않는다.

    문 닫은 가게가 너무 많아서 셔터마을로 불리던 재래시장(동네마다 소규모 재래시장이 있고 통칭 상점가라고 불린다) 거리가 드디어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주로 늘어난 고령인구를 대상으로 하는 정육점, 반찬가게, 채소가게, 옷가게, 신발가게, 우동 집, 빵가게, 화과자가게 등 일상생활에 아주 밀접한 가게들이 문을 열고, 간혹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특색 있는 가게도 문을 열었으며, 또 상점가 안에 아예 편의점이 포진하기도 한다.

    물론 고령층뿐만 아니라 젊은 주부들도 이전에 비해 경제사정이 나빠져서 소비를 줄이고 차를 사용하지 않게 되거나, 이전보다 맞벌이에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귀가하면서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장을 보게 되었다.

    긴자의 중심에 자리잡은 미츠코시백화점. 몇 년 전 외관을 바꾸기 전 모습.

    중국인, 한국인 관광객이 먹여 살려

    유통전쟁 속에서 백화점만 독야청청할 리 없었다. 모기지론 사태 훨씬 이전부터 백화점은 엄청난 매출 부진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유통업체들의 전면적 변화를 주도한 편의점을 산하에 둔 이토요카도, 세이부 등의 대형백화점 그룹들이 빠르게 유통 전체의 새로운 질서를 세워갔고 그 와중에 몇 개의 백화점이 통폐합됐다.

    후쿠오카의 유명한 백화점 이와타야는 미츠코시 산하로 들어가서 본점을 팔려고 내놓고 뒤편으로 점포를 옮겼다. 일본에서 백화점 고정고객(카드회원)이란 각 백화점의 특징을 바탕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합병한다고 섣불리 점포를 폐쇄하지 않고 회원카드를 합친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일원화를 시도하였다. 결국 본점 건물은 후쿠오카의 가장 중심가에 위치했으면서도 사려고 나서는 업체가 없어서 근 5년 이상을 닫힌 채로 있었다. 그 정도로 백화점 불황은 심각했다.

    최근에야 후쿠오카는 중국인 관광객에 힘입어 유통업이 살아나서 도쿄 중심이었던 한 유통업체가 옛 이와타야 자리에 들어섰다. 지금 일본의 백화점을 먹여 살리는 층은 한국인, 중국인 관광객이다.

    특히 중국인 관광객은 부유층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때문에 평균 소비액수는 여타 국가들의 두 배에 달한다. 중국 도시노동자의 평균임금이 일본 도시노동자의 10분의 1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매우 놀라운 일이다.

    백화점, SSM, 편의점 등이 한 줄로 손을 잡고 각각 계열을 만들고 있는 와중에 SSM은 지역 슈퍼체인을 합병하면서 이전처럼 덩치에 주력하지 않고 유통합리화를 꾀하는 중이다.

    한국과 다른 점

    한국의 거대 유통 마트가 떡볶이나 피자를 팔면서 골목상권을 위협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게 자체 상품(PB)을 개발하고, 합병한 지역 군소 슈퍼체인이 이미 지니고 있는 점포들을 통해 유통시키면서 이익 보전에 힘쓰는 한편, 기존의 대형 점포에는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며 운전하는 세대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바꿨다.

    시 외곽의 대형 점포는 가구전문점이나 어뮤즈먼트(게임이나 놀이) 전문업체, 해외브랜드 업체 등과 한 울타리를 사용하거나 아웃렛마켓을 형성하거나 운전학원 등을 병행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적극적인 마케팅에 나섰다.

    일본 최대의 SSM 유통업체 이온그룹의 매장.

    유통업계 전반의 변화는 인구 변화, 경제위기,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 특히 고령화라는 과제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진행될 이슈이며, 또한 동시에 한국에도 닥칠 변화이기도 하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것에 따른 변화이고, 또한 항구적인 변화이다. 고령화는 소비나 행정, 지역사회에 방대한 영향을 끼치는 변화이고, 또한 사회 디자인을 새로이 형성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일본사회에 가져왔다.

    나는 경제학을 공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짧은 글 안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를 전부 설명하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그저 내 일상의 변화와 일본사회 전반의 변화를 연결해서 짚어보면서 한국사회 변화에 대처하는 힌트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글을 쓰고 있다.

    고령화 사회로 인한 변화, 신자유주의를 적극 추진했던 고이즈미 총리 시절에 단행된 우체국 민영화나 버블 붕괴 이후 헤이세이 불황과 나란히 걸어온 백화점의 오랜 불황, 오래 전부터 있던 협동조합 유통과 그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현상인 비영리 사회적 기업의 성장 등등은 변화의 이어져있는 고리들이다.

    특정한 한 변화가 다른 수많은 변화들을 어떻게 유도하고 있는지 앞으로도 또 글을 이어가려고 한다.

    필자소개
    일본 후쿠오카에서 14년째 살고 있으며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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