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쏘련 정말 못 살았을까?
    민중, 계획경제 주체 못돼 뼈아파
    [쏘련-미래를 향한 추억④] 레닌그라드, 강남 & 금천
        2012년 09월 12일 06:0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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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도 집단도 대개 자기 자신의 아픔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누구나 아프다는 점은 같지만, 세상이 다양한 만큼 아픔의 내용들도 다양하다. 다른 나라에 대한 소감도 결국 많은 면에서 ‘나’의 아픔의 소산인 경우가 많다.

    예컨대 유럽 일부 국가들의 실업률이 20~30%에 달했던 1930년대 초 대공황 시절, 많은 서구 노동자들은 쏘련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 당시 쏘련 노동자들은, 압축적 공업화의 고통 속에서 서구에서는 보기 어려운 빈곤 속에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평가를 내렸다.

    가난한 쏘련을 긍정적으로 본 이유

    1931년에 쏘련 노동자의 평균 월급은, 그 당시 화폐 단위로 약 120루블이었으며, 당시 배급소가 아닌 자유 시장에서 파는 버터의 1kg은 약 20루블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한 달 월급을 가지고 버터 6kg 정도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실제로는 배급소에서 나오는 빵으로 노동자 가족이 연명해야 했다.

    현대식 아파트도, 보장된 휴가도 없었던 1930년대 초반 쏘련 노동자들이 궁핍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음에도, 서구의 동료들이 쏘련의 ‘실험’을 그래도 좋게 볼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계획 경제인 쏘련에서는 실업이라는 괴물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쏘련 노동자와 인민들의 생활, 소비 수준이 서구와 좀 엇비슷해진 1968년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서구의 좌파들이 쏘련에 대해 냉담해졌다. 전후 자본주의 황금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던 시절에는 “실업으로부터의 자유”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권위주의’나 ‘개인의 자율성’이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농민이나 숙련노동자들의 출신인 쏘련 관료들이 ‘섹스의 자유’나 윗세대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왜 그리 좋은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서구 좌파의 시선은 차라리 문화대혁명이 난무했던 중국 쪽으로 옮겨간 까닭이기도 하다. 대약진 운동 시절의 중국 인민 수천만 명을 희생시킨 기아가 그 당시 서구 사회에서 상상조차 불가능했던 재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북한 무상교육 매력 잃은 이유

    한(조선)반도 주민들의 가장 큰 아픔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배고픔일 것이고, 우리는 이 차원에서는 중국인들과 대동소이하다. 불과 30여년 전만해도 보릿고개가 우리의 현실이었으며, 노동자의 평균임금이 기아선을 벗어난 것도 40여 년밖에 안 된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과일을 제대로 사먹을 돈이 부족한 빈민층 어린이나 하루 세 끼 식사도 매우 아껴서 만들어 먹어야 하는 가난한 독거노인들을 쉽게 볼 수 있다.

    ‘단순 생존’이 해결된 것 같긴 하지만 실제로 많은 이들에게는 아직도 사는 것 자체가 공포로 다가오고 있다. 한국은 아직 복지가 태부족한 사회인만큼, 가장 기본적인 생활수준인 ‘생존의 가능성’이 우리가 타자를 평가하는 기준 출발점이 돼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북조선은 아무리 민족적 명분이 좋고, 꿈같은 무상교육 등을 실시했다 해도, 1990년대 중반 이후의 대량 기근 사태는, 남한 사람들에게 인식된 북조선의 매력들을 거의 죽여 버리고 말았다. 본인 아니면 부모세대에 배고픔을 겪어본 경험이 있는 사회에서는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먹는 문제 해결에 실패하는 것은 집권 세력에게는 치명적이다.

    더 나아가 남한사회는 다른 나라들을 평가하는 데에는 ‘여유’가 있는지 여부에 늘 관심을 가진다. 마음에 드는 고가 소비재를 마음대로 살 수 있는 금전적 여유부터 아이들에게 원하는 교육을 시키고, 휴가를 잘 다녀올 제도적, 시간적 여유까지 말이다.

    쏘련식 아파트에 대한 상반된 평가

    필자가 지금 거주하고 있는 노르웨이가 한국 관광객들에게 좋게만 보이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유 있는 나라’라는 인상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 여유는, 예컨대 노르웨이 국영 석유기금의 돈이 투자된 삼성전자나 그 하도급 기업들의 노동자, 즉 노르웨이 자본에 국제적으로 착취당하는 이들의 존재 때문에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거기까지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반면 국제적 투자 행각을 벌일 일이 없었던 쏘련 등에 대해서는 흔히 ‘여유 없는 사회’라고 치부한다. 쏘련 하면 연상되는 것은 배급제와 식량품 가게 앞에 이어지는 긴 줄, 전혀 멋이 없는 옷과 신발, 남한에서는 필수품이 된 자동차가 거의 보이지 않는 도로 등이다. 한 마디로 쏘련은 “못 살았다”는 시각이 남한에서 지배적이다. 아직은 스스로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회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면 “못 사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며, 그 이상의 죄가 없다.

    소련시대에 지어진 서민용 아파트의 모습

    쏘련 시대 말기의 평균적인 쏘련 사람들은 정말 못 사는 사람이었을까? 아마도 예컨대 노르웨이 중산층 시각으로 본다면 조금 그랬을 것이다. 노르웨이는 약 60%에 이르는 다수 국민이 아파트도 아닌 단독주택에서 살고, 한 주택은 평균 4개의 방이 있으며, 평균적 주택 면적은 70㎡(21.2평)에 가깝다. 절반 넘는 주택들은 100㎡(30.3평) 이상이다.

    노르웨이에서 태어나 자란 필자의 10살짜리 아이만 해도, 가끔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그)에 가서 필자가 살았던 쏘련식 아파트를 보기만 하면, “너무 좁다”고 불평하곤 한다. 이 아파트는 2개 방이 있고, 넓이는 32㎡(9.7평)밖에 안 된다. 노르웨이로 치면 가족용이 아닌 개인용 원룸에 가깝다.

    유럽에서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다는 나라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린이의 시각은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과연 노원구나 금천구의 반지하나 지하방에서 자라온 아이의 입장에서도 그럴까? 그 아이들에게는 쏘련식 아파트도 아주 편안하고 좋게 보이지 않겠는가? 거기에다가 빚을 내서 그 아파트를 산 것도 아니고, 국가가 ‘무상주택 공급’ 차원에서 무료로 제공했다는 사실까지 알면 쏘련식 생활방식을 다소 선호하지 않겠는가?

    자기 집이라고 없는 사람들이 거의 절반이나 되는 남한은 그렇다 치자. 그 부유한 노르웨이에서 집 살 돈이 없어 소득의 20~30%를 주택 임대에 쓸 수밖에 없는 23%의 비교적으로 가난하거나 중산층 하부에 속하는 무주택 세입자 주민들의 입장에서도 누구나 집을 무료로 공급 받을 수 있었던 쏘련은 좀 좋아 보이지 않을까? 그러니까 세계적 먹이사슬의 ‘위쪽’ 시각에서야 좀 비좁고 가난하게 보일는지 몰라도 ‘아래쪽’ 시각은 좀 다를 수도 있겠다.

    육류, 바나나, 과학서적

    주택을 아무리 무상으로 배정 받아도 과연 배급량 이상 식품을 사먹을 수 없다면 행복하겠는가, 라고 물어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서방 언론이 만든 신화가 아닌 실제의 쏘련에서는 배급제는 1947년에 이미 폐지됐다. 참고로, 전후의 일본보다 2년 먼저 폐지된 것이었다. 북조선에서 배급제는 계속 존재해왔는데, 이는 ‘현실 사회주의’의 일반적인 사정이라기보다는 엄청난 국방비에 허덕이는 비교적 가난한 냉전 최전선의 국가의 특수한 사정의 반영이었다.

    1970년대 소련 식료품 가게의 모습

    말기의 쏘련 같으면 배급제가 없었을 뿐더러 기본 식량품은 비교적 저렴했다. 평균 저숙련 노동자 임금(약 200루블)으로는 쇠고기 (1kg당 약 2루블)의 거의 100kg을 살 수 있었다. 빵과 우유 등 기본 식량품의 가격들은 생산비용 수준 이하이었으며 좀처럼 인상되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기본 식량품 가격 안정 정책이 계획적으로 실시된 셈이다.

    그 덕분에 우유나 고기, 과일 소비량을 기준으로 보면 쏘련은 웬만한 서구 국가에 뒤지지 않았다. 예컨대 쏘련 망국 직전의 1인당 1년치 육류 소비량은 약 65kg이었는데, 이는 캐나다 수준의 약 85%밖에 되지 못했지만, 웬만한 남유럽 국가 정도 수준이거나 그 이상이었다. 빵이나 우유, 감자 등 채소 소비는 오히려 서구 수준을 상회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쏘련인의 식탁은 그다지 다양하지는 못했다. 치즈나 소시지, 육류 별로 다양하지 않았으며, 수입된 식량품도 일반적으로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쏘련산이 없는 바나나 같은 경우, 아주 드물게 수입 바나나를 파는 상점 앞에는 아주 긴 줄이 순식간에 생기곤 했다.

    기술이나 과학서적 등 보다 필수불가결한 것을 사기 위해 쏘련 관리인들의 손에 들어간 외화는 계획적으로 쓰이고, 사치품으로 분류되는 수입산 과일 등은 보기가 드물었던 것이다. 글쎄, 아마도 오늘날 남한 중산층의 입장에서 본다면 바나나가 ‘외국산 사치품’으로 분류되는 사회는 ‘좋은 사회’로 보이지 않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한데, 전쟁과 기근, 배급제를 겪은 쏘련인의 윗세대 입장에서는 예컨대 육류소비량의 꾸준한 증가(1960년대 후반만 해도 1년 1인당 40kg 정도이었다)만 해도 벌써 꿈같은 행복이었다. 아니, 그들이나 그들의 선조들이 살았던 시골에서는 고기를 배불리 매일 먹은 적이라도 있었던가?

    배불리 먹었는데 왜 망했냐고?

    이쯤 해서 쏘련의 생활수준을 회의하는 독자들은 아마도 필자의 약점을 찌를 것이다. “배불리 먹은 것까지는 좋은데, 그렇게 잘 살았다면 왜 망할 만큼 체제에 대한 인민의 불만이 누적됐는가? 그렇다면 혹시 내구재의 소비량이나 그 질에 불만이 있었던 게 아닌가?”

    이 지적만큼은 서양 언론이 생산한 ‘신화’가 아니고 현실의 가장 문제적인 부분을 잘 짚은 것이다. 그렇다. 종류의 다양성에서는 부족했지만, 단백질 등 필요한 영양소)와 칼로리 소비, 즉 ‘먹는 문제’ 차원에서는 쏘련인이나 서독인, 영국인 사이에 그다지 큰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보통 쏘련 가족 평균 예산의 약 절반 정도는 식량품 구입에 쓰였으며, 내구재 사는 것은 늘 문제였다. 먹는 ‘양’은 거의 엇비슷했는데, 평균적으로 쏘련인의 소비량이 미국인의 3분의 1, 서독인 내지 일본인의 약 2분의 1에 불과했던 것은 바로 내구재 소비량의 차이 때문이었다.

    1970년대 진열된 TV를 구경하고 있는 소련사람들

    일부 내구재 같은 경우 쏘련인의 소비는 선진권 국가보다 세계체제 주변부에 더 가까웠다. 예컨대 1983년 현재 쏘련인 1000명 당 자가용의 보유 대수는 36대였다. 미국의 552대나 일본의 226대에 비해 좀 초라해 보이지 않는가? 텔레비전 보유 대수는 1987년 기준으로 쏘련(314대)은 서독(385대) 등 서구 국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미국(811대)에는 크게 뒤졌다.

    내구재의 경우에는 양뿐만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 – 서구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 문제가 많았다. 라다 같은 쏘련의 일부 자가용이나 시계 등은 서구시장에서도 팔렸지만, 자원이 군수부문에 집중되고 기술적인 고립이 심해서 국제적 경쟁력이 있는 쏘련의 내구재는 1987년 당시 7~8%에 불과했다.

    내 기억에 후기 쏘련의 ‘최고 인기 상품’은 일본산 텔레비전부터 서독산 세탁기, 이태리산 신발 등으로 누구나 갖고 싶어 했다. 이런 것을 보면 쏘련의 소비경제가 얼마나 발달되지 않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최소 공급량 확보 경제

    상대적으로 고립되고 총생산의 약 20%를 국방비로 소모해야 하는, 덩치가 훨씬 더 큰 미국, 나토와 무장경쟁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버거웠던 쏘련으로서는 서방에서 볼 수 있는 소비경제를 발전시키기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일단 가용 재원이 부족한 상황에서는 소비재 공장은 ‘최소한의 공급량 확보’ 차원에서 계획하고 설립하는 것이 관례였다. 즉, 의류나 신발업체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품질 제고와 같은 경쟁의 순기능을 발휘했다기보다는 인민들에게 필요한 양의 공급 그 자체를 목적으로 했다.

    자원 낭비가 최악의 범죄로 인식됐던 내핍 경제인지라 소비재의 내구성 등은 국가의 독립적인 제품검사 기관에서 철저하게 확인했지만, 디자인이나 포장 등은 대개 형편없었다. 거기까지 화려하게 할 여유도, 그렇게 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외국산의 수입이 제한돼 있고, 국산 업체들이 상호 경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남한 사람들은 아무 의미도 없어진 공부 때문에 피곤하고, 취직 노력에 피곤하고, 실직 공포에 피곤하고, 그리고 그 모든 피로를 ‘상품 선택’이라는 자본주의적 근대인의 몇 안 되는 권리(?)를 통해서 순간적으로나마 해소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에 익숙해졌다.

    이들은 자기 자신과 소비사회의 환상들을 분리시킬 줄 모르며, 따라서 시중에 판매되는 팬티나 외투들이 모두 디자인이 비슷비슷하고 거의 대부분이 몇 안 되는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사회는 아마도 조금 답답해 보일 것이다. 게다가 대표적인 부족 상품인 자동차는 자유판매는 거의 안 되고 주로 직장단위에 판매할당이 주어져 있어서, 그걸 사려면 그 직장의 노동자들이 줄을 서서 몇 년이나 기다려야 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특히 자동차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도 없는 강남특별시(?) 주민들은 아마도 ‘악몽 같은 나라 쏘련’이라는 결론 내릴 것이다.

    최소 공급의 환경적 가치

    그런데 위와 같은 상황을 다르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자가용 생산, 판매가 제한돼 그걸 굳이 구매하려는 인민들은 줄을 서서 열심히 기다려야 했지만 (직장단위 소속이 없는 연금생활자들 같은 경우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자가용 살 ‘자격’ 자체도 잘 주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대중교통이 발전돼 실제로 도시민들이 자가용 없이도 문제없이 출퇴근하고 충분히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1970년대 여러가지 물품을 있는 가게 모습

    공기오염부터 석유자원 고갈까지, 아주 많은 방면에서는 자가용 생산, 판매의 자제야말로 인류 공동이익, 환경의 차원에서는 최적의 방안으로 보이기도 한다. 쏘련이야 고상한 환경적 고려라기보다는 자가용이라는 사치품 생산에 부족한 사회적 자원을 낭비할 수가 없어서 자가용 사회가 아닌 대중교통 사회로 자라났지만, 좌우간 미래지향적 차원에서는 이게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을까?

    경쟁이라고 찾아보기 어려운, 부문마다 필요 불가결한 분량을 최소한으로 공급해주는 몇 안 되는 공장만 있는 ‘낭비 방지에 총력을 다 하는 계획경제’는 소비사회 중독자에게는 그저 갑갑한 지옥이겠지만, 경쟁으로 인해서 낭비되어 소모되어지는 자원, 과도한 경쟁으로 인한 과잉생산 및 과잉생산 위기를 생각한다면, 이러한 방식의 생산, 소비 사회에도 미래지향적인 어떤 특징들이 내포된 것이 아니었을까?

    환경의 궁극적 파괴가 임박한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최소의 생산, 필요한 만큼의 최소의 소비” 등은 또 재평가될 수 있는 여지도 없지 않아 보인다. 모든 지구인들이 노르웨이인들과 똑 같은 양의 1인당 자원을 쓸 경우에는 지구 총인구를 위해 지금과 같은 지구가 적어도 4개 정도 필요할 것이라는 노르웨이 환경학자들의 예측은 잘 알려져 있다.

    엄청난 자원의 이용과 경쟁적인 과잉 생산, 과잉 소비에 기반을 두는 ‘노르웨이 모델’은, 나의 아들처럼 노르웨이에서 태어난 사람에게야 자연스러운지 모르겠지만, 보편성이 결여된 모델이다.

    예컨대 모든 인도인들과 모든 중국인들이 그렇게 살 것이라고 우리가 기대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필요한 만큼의 시장적 요소 – 예컨대 지금 현재 쿠바에서 도입되는 개인 자영업자들의 식당업이나 가게, 작은 소비재 공장 등과 함께 – 만 첨가된다면 쏘련 모델은 오히려 빈국들에게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에 대한 기대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쏘련 모델의 가장 중요한 ‘희망 요소’

    쏘련 모델에서의 가장 중요한 ‘희망의 요소’는 무엇보다도 무상교육과 무상의료이었다. 실제로는 이 두 시스템은 쏘련 역사상 상당 기간에 걸쳐 성사시키고 발전시킨 것이다. 예컨대 파쇼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하고 실제로 전쟁을 치른 기간과 전후 복구의 시기인 1940~1954년 동안 쏘련에서 고등학교와 대학교육은 무상이 아닌 유료였다.(단, 국정 학비의 인상 등은 없었다)

    무상의료는 1917년 10월 혁명 이후에는 그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대원칙이었지만, 1950년대 중반, 즉 탈스딸린화 이전까지만 해도 많은 시골에서는 병원은커녕 보건소도 없었다. 압축적 공업화시기에 의료 투자는 비교적 작은 것이었으며, 주로 유행병 방지와 군 의무기관에 집중됐다.

    서구와 비견될 수 있는 진정한 무상의료는, 병원에서의 병상 숫자가 약 두 배 늘어난 1950~80년의 기간에 발전된 것이었다. 1989년까지만 해도 전체 병원의 20%에 이르는 상당수의 시골 병원들은 따뜻한 수돗물 공급이 되지 않는 등 미비점들이 많았지만, 거주지역과 무관한 보편적인 무상의료 서비스는 일단 실시됐다. 지역 병원에서는 복잡한 수술을 못하는 경우 환자는 도회지 병원으로 이송되고, 어느 병원을 이용하든, 어떤 수술을 하든 무상서비스 원칙은 지켜졌다.

    이 같은 노력 덕분에 영아 사망률이 1955년의 1000명 당 100명에서 1991년의 17명까지 비교적 빠른 속도로 개선되는 등 다수의 삶이 나아지는 것을 사람들이 직접 체감됐다. 쏘련 의료체계의 골간을 받아들여 계속 발전시킨 쿠바는, 2012년 현재 미국(6명)보다 더 낮은 영아 사망률(5명)을 기록한 것으로만 봐도 쏘련식 무상의료체계는 나름의 잠재성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1990년에 필자의 모교인 레닌그라드 국립대에 최초로 유학 온 남한 학생들이 휴지조차 없는 화장실(그 당시에 휴지는 부족 품목이었다)부터 건물 면적 한계로 연구실도 없어 집에서 연구해야 했던 교수들의 신세까지 보면서 경악하는 분위기였지만, 1991년 망국 이후에 구 쏘련 출신 과학자들의 약 10만 명이 주로 서방 국가에 취직한 것을 보면, 휴지와 연구실 부족 속에서 이루어졌던 교육의 질이 꼭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쏘련에서 소비는 전체적으로 그랬듯이, 포장은 별로였지만 효능은 극대화돼 있었다.

    부자와 가난뱅이의 행복감

    결론 대신 다음과 같은 나의 생각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행복이라는 것은 주관적인 개념이다. 아마도 다수의 강남특별시(?)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자가용 구입은 물론 휴지 공급도 제대로 되지 않고, 넓은 주택이나 고급 자동차는 평생 기다려봐야 소유할 수 없고, 소비 개념보다 ‘필수품 공급’ 개념이 지배하는 사회는 엄청나게 불편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노원구나 금천구의 지하, 반지하 주민의 입장에서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 비록 좁긴 하지만 – 괜찮은 주택들이 공급되고 돈 없어서 병원 못 가는 일도 없고, 아이는 재능만 확인되면 SKY에 해당되는 모스크바 국립대나 레닌그라드 국립대에 들어가 무료로 공부할 수 있는 사회는 행복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부자의 행복감과 가난뱅이의 행복감이 다르다는 말이다. 나 같으면 바나나나 휴지의 부족도 자가용 구매 제한도 상점에서의 치즈 다양성의 한계도 다 행복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 사회에서 모든 물품과 서비스, 그리고 결정권에 접근하는 것이 완전히 평등하다면 말이다.

    그러나 쏘련 사회의 진짜 문제라면, 예컨대 의료나 교육에 접근하는 것까지는 비교적 평등해도, 다수는 민주적 결정권에서의 참여를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국가는 부족한 자원을 활용해 다수에게 상대적으로 평등하게 공급을 해주려고 노력했지만, 그 국가가 그 과정에서의 다수의 참여를 막고 있었다.

    민중은 계획의 대상이었지 계획경제 운영 주체는 되지 못했다. 쏘련 역사에서 나에게 가장 아픈 부분이라면 바로 이 부분이다. 만약 쏘련식 현실 사회주의가 민주적이기만 했다면, 많은 쏘련 시골에서 그랬듯이 평생 휴지 대신 옛 신문들을 활용해가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소비’ 대신 ‘필수품 공급’만이 가능한 사회에서.

    필자소개
    오슬로대 한국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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