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의 대안 될 수 없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두가지 비평② - 부정의 시선
        2012년 05월 23일 10: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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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두가지 비평① – 긍정의 시선

     

    장하준·정승일·이종태은『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이하『선택』)에서 일종의 성장을 위한 타협을 제시한다.『선택』은 경로의존성의 측면에서도 재벌이 한국 산업자본의 중심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재벌에 경영권을 보장하되 실물 경제에 대한 투자를 촉진하도록 함으로써 경제성장과 안정된 일자리를 공급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보편적 복지를 공급함으로써 노동의 불안을 해소해야 하며, 노동조합은 경쟁력 강화에 협력함으로써 일자리 안정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택』은 정부는 적극적 경제개입을 통해 재벌이 한국 사회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도록 한편으로 압박하고 한편으로 지원함으로써 ‘성장을 위한 타협’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벌을 적대적 세력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장점을 활용하되 단점을 억압함으로써 한국 사회에 기여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택』의 논리는 중도좌파의 관점에서 제시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엄연히 지속되는 현실 속에서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고 사회적 안정과 불평등을 해소하는 길은 실물경제의 성장을 통한 안정된 일자리 제공 말고 다른 무슨 대안이 있겠는가? 경제 성장과 복지, 노동의 안정이야말로 계급타협의 조건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선택』은, 지금까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어 온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새로운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재벌을 타협의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서 이전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논자들과 차이가 있다.

    사진=노동과세계

    중도좌파의 수렴 :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선택』에 대한 정태인, 이병천 등의 비판도 근본적으로 같은 맥락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들도 한국의 대표적인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옹호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병천선생이나 정태인 선생 모두 실물 성장, 보편적 복지, 금융억압, 노동조합의 참여와 일자리 안정에 동의한다. 이들은 『선택』의 중도좌파 논리를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간의 실질적인 차이점은 어떻게 하면 재벌이 한국 사회에 생산적으로 기여하도록 할 것인가에 대한 이견에서 비롯된다. 이 점에서 『선택』은 매우 취약하다. 『선택』은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고 정부가 정책적으로 이를 추진하면 재벌이 그 과정에 능동적인 참여자가 될 듯이 서술한다.

    이병천 교수의 비판은 이와 같은 순진한 발상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병천 선생은, 재벌이 이미 과잉 성장한 권력이기 때문에 반재벌동맹을 통한 집합적인 저항이 없다면, 재벌에 대한 사회적 통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정태인 선생이 ‘삼성의 모가지를 비틀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병천 선생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선택』은 주장은 그럴듯한데,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중도좌파들의 관점은 대동소이하다. 그들의 공통점은 체제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주어진 자본주의적 현실 속에서 대안을 마련하려고 하다 보니 노동참여적인 성장을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중도좌파들은 신자유주의 위기에 대한 심층적인 원인을 분석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은 필연적으로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현실을 수용하는 중도좌파로서는 그와 같은 급진적인 입장에 설 수 없다. 중도좌파의 고유한 한계는 신자유주의의 원인에 대해서는 눈 감고 그 효과를 어떻게 약화시킬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쟁점은 여기에 있다.

    마르크스주의적 비판 : 이윤율의 경제학을 위하여

    『선택』은 한국 경제의 위기를 주주자본주의에서 찾고 있다. 『선택』은 주주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업의 경영권을 공격하고, 구조조정을 일삼으며, 적대적 M&A를 시도한다고 비판한다. 기업의 투자회피도 주주들의 위협 때문이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도 주주자본주의로 인해 강화된다고 비판한다. 주주자본주의는 전가의 보도처럼 위기의 원인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선택』은 주주자본주의가 왜 나타났는가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주주자본주의로부터 재벌의 경영권을 보호함으로써 현재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제도적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택』은 경제의 금융화 자체의 원인은 분석하지 않고 단지 이것이 위기의 원인이라고만 할 뿐이다.

    그러나 경제의 금융화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경제의 금융화는 자본의 이윤율 저하에서 비롯된다. 자본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고정자본에 과잉투자하게 되며, 이는 필연적으로 자본생산성 하락을 초래한다. 이윤율은 자본생산성 과 이윤배분율의 곱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자본생산성의 하락은 필연적으로 이윤율 하락을 초래한다. 이는 자본주의의 일반 법칙이다. 이윤율 저하는 자본으로 하여금 투자를 줄이게 한다. 이윤이 확보되지 않는 상황에서 누가 새로운 자본을 투자하겠는가?

    경제의 금융화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특징

    경기침체기가 심화될수록 기업들은 사내유보금을 늘이거나 유동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기업들은 은행 대출을 줄이고 금융자산에 대한 투자를 확대한다. 금융권 역시 기업에 대상으로 하는 도매 금융을 통한 이자획득보다 주식이나 채권 같은 자산 투자를 통해 이윤을 확대 한다. 여기에 덧붙여 연기금과 같은 기관이 주식시장에 본격 진입한다. 지오바니 아리기가 [장기 20세기]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윤율의 하락은 필연적으로 경제의 금융화를 초래하는 것이다. 이는 20세기 후반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16세기부터 지속되어 자본주의의 구조적 특징이다.

    주주자본주의는 이런 고도금융 단계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일 뿐이다. 자산소득을 추구하는 사모펀드나 기관투자자들은 주주이익 극대화를 위해 다양한 투자를 감행한다. 금융권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금융상품을 개발하여 이런 잉여자본을 동원한다. 금융으로 자금 유입이 많을수록 주가 총액은 상승한다. 더불어 금융부분 이윤이 생산을 통한 이윤을 추월하게 된다. 고도금융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산업을 지배적 형태로 갖는 초국적 자본들에게조차 금융 부분 이윤이 산업생산 이윤을 초월한다. 파산직전 미국 자동차 회사 GM과 전자회사 GE가 바로 이런 상태에 있었다. [자본의 세계화]에서 프랑스와 셰네의 주장처럼, 경제의 금융화는 순수 금융자본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을 지배적 요소로 갖는 초국적 기업이 주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금융주도적 축적국면의 풍경이다.

    『선택』은 금융억압을 단행함으로써 기업투자와 경제구조의 고도화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현재의 위기에 대한 구조적 요인을 간과하는 것일 뿐이다. 현재와 같은 위기 상황에서 아무리 금융억압을 단행한다 해도 재벌은 투자하지 않는다. 케인즈의 말마따나 기업가들은 동물적 본능으로 투자하는데, 그들이 보기에 예상이윤율이 낮으면 아무리 잉여가 축적되어 있어도 투자는 회피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택』이 주장하는 재벌 투자 중심의 발전주의 전략은, 이윤율이 하락한 현재의 국면에서 아무런 실질적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재벌을 통한 고도성장, 불가능한 전략

    더군다나 『선택』은 산업자본 중심의 재벌과 주주자본주의를 대립적인 존재로 부당 전제한다. 앞에서 썼듯이 현재의 경제구조는 산업을 지배적 요소로 갖는 초국적 자본이 금융부분 성장을 주도 하고 있는 것이다. 재벌 역시 산업을 지배적 요소로 갖고 있지만 금융적 축적의 핵심 세력이 된다는 말이다.

    『선택』은 재벌이 주주자본주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배당을 늘린다고 하지만 재벌 역시 주주자본주의의 핵심적인 이해관계자인 것이다. 재벌은 주주자본주의의 주체가 되었지, 금융적 축적에 대립하는 자본분파가 아니라는 점이다. 재벌이 금융자본주의의 전위가 되어버린 현실을 자각하면, 『선택』이 주장하는 재벌 체제를 통한 고도성장이라는 경제 전략은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비단 『선택』의 한계만이 아니라 중도좌파 전체의 한계를 보여준다. 이병천 선생이나 정태인 선생 또한 실물자본 중심의 성장을 주장한다. 이를 위해 국가가 능동적으로 금융 억압을 단행하고, 복지를 공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재벌을 어떻게 복속시킬 것인가를 두고 『선택』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생산을 통한 타협, 복지를 통한 타협이라는 점에서는 이들은 대동소이 하다. 그러므로 『선택』의 고유한 한계는 이병천 선생이나 정태인 선생의 한계이기도 하다.

    금융세계화의 상징인 뉴욕증권거래소

    이병천 선생이나 정태인 선생의 글 어디에도 이윤율의 저하로 인한 자본의 투자회피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은 없다. 이윤율의 문제를 건드리는 순간 정책대안이 갖는 한계는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이다. 체제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지닐 때만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을 비판할 수 있지만 이들은 그런 대안을 포기하거나 아예 상정조차 하지 않는다. 오늘날 지식인 사회에서 반체제적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주류적 담론으로부터 배제를 감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이들이 그런 모험을 단행할 가능성은 아주 낮다.

    구조적 위기에서 계급타협은 가능한가?

    1절에서 보았듯이, 『선택』 뿐만 아니라 이들을 비판하는 이병천 선생이나 정태인 선생 모두 성장을 통한 타협을 제안하고 있다. 이들은 재벌의 실물투자와 정부의 복지공급, 노동조합의 참여를 통한 타협을 현실적인 대안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 간의 방법상의 차이는 있지만 공동된 점은 한국 경제의 경쟁력 유지와 이해관계자의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축제체제의 구성이다.. 이는 전형적인 중도 좌파식 계급타협의 논리이다.

    그러나 계급타협에 대한 중도좌파의 주장도 근본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윤율이 저하되는 국면에서 기업들은 이윤회복을 위해 노동을 체계적으로 공격한다. 자본은 투자회피 즉 자본파업을 통해 실업을 조직함으로써 노동을 약화시킨다. 노동시장을 분절시켜 정규직을 최소화 하고 비정규직을 확산시키는 것은, 불황기 자본의 경제정책의 핵심을 이룬다. 이는 『선택』이 주장하듯이, 주주들의 요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윤율 회복을 위한 부르주아의 계급투쟁일 뿐이다.

    『선택』이나 그들을 비판하는 정태인 선생이나 이병천 선생 모두 독일과 같은 북유럽 자본주의 국가가 한국의 모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북유럽 국가들이 한국보다는 제도적으로, 사회적으로 훨씬 발전된 사회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 이들 국가들 또한 신자유주의적 개혁의 중심에 서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독일이나 북유럽에서도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 복지에 대한 공격은 지속되고 있다. 이제 독일 제조업의 경쟁력 유지가 노동의 지속적인 양보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의 상식이 되었다. 더군다나 독일 금융자본이 남유럽 국가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독일자본도 상당부분 금융화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구조적 불황국면에서 선진국을 따라잡고, 쫓아오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한국 자본이 얼마만큼의 양보를 할 것인가에 대해 냉정하게 따져 보아야 한다. 재벌이 계급타협을 선택할 것인가 지금처럼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을 통해 경쟁력을 유지할 것인가를 두고 판단한다면 어느 누구도 전자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중심부 자본주의조차 계급타협을 실현할 수단이 고갈되고 있는데, 반주변에서 계급타협의 가능성을 염두 해 두고 제도적인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한다.

    『선택』을 비판하는 이병천 선생이나 정태인 선생 역시 현실은 자본주의의 장기적 침체의 원인에 대해 분석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책임이나 이명박 실정만 계속 외칠 뿐 무엇이 노동자계급을 실질적으로 배제하고 있는가에 대해 침묵한다. 한국 사회의 노동자 배제가 단지 재벌의 억압적 성격이나 한국 자본주의의 예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중도좌파들은 이렇게 믿고 싶을지 모르나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와 연동되어 있을 뿐이다. 중도좌파의 정책대안이라는 것도 이 체계적 위기에 직면하는 순간 아무런 실질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중도좌파 진영의 똑똑한 학자들이 애써 이 현실을 무시함으로써 정책대안을 주장할 수 있을 뿐이다.

    현실에 굳건히 서되, 반체제적 상상력을 지녀야 한다.

    지금 노동자운동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의 힘을 강화하는 것이지 계급타협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게 아니다. 정권교체와 재벌 통제가 노동자운동에게 새로운 탈출구를 제공할 것이라는 기대 역시 한갓 미망에 불과하다. 현재의 민주노총처럼 야권연대에 목매달고 얼토당토 않는 재벌개혁에 올인 한다면 그것은 노동자 운동의 붕괴를 촉진하는 것일 뿐이다.

    더불어 좌파는 본격적으로 반체제적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반체제적 상상력을 보여주는 것이 자본주의가 자동적으로 붕괴한다거나 경제위기가 좌파에게 더 큰 기회를 줄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기대하자는 말은 아니다. 구조의 분석과 대안에 있어서 체제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지니되 두 발은 굳건히 현실에 딛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필자소개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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