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신의 추억10 - 바리깡과 두발단속
        2012년 09월 11일 10:3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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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유신의 끝 무렵인 78년도에 중학교에 입학했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걸어서 40분 정도 걸리는 인근 읍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리는 입학하면서부터 일제시절부터 내려오던 검은색의 교복과 교모를 준비했고, 머리도 빡빡 밀었다.

    요즘 아이들은 머리를 개성 표현의 수단으로 생각하면서 ‘헤어스타일’에 관심이 많지만, 나는 그때 머리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을 갖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시종일관 스포츠형 머리였고, 중학교에 가면 의례히 머리를 빡빡 깎는 것을 당연시 하는 ‘범생이’였다.

    다만 머리를 빡빡 밀면서 어렸을 때 머리에 종기가 많아서 생긴 듬성듬성한 구멍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게 좀 창피하다는 생각을 한 정도였다.

    머리 깎는 일도 이발관이 아니라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듬직한 수탉 한 마리를 팔아 장만한 바리깡과 이발용 가위로 가족의 머리를 직접 깎아 주셨다. 어머니의 이발 솜씨는 동네에도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러던 나에게 ‘두발 자유화’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유신의 종말을 알린 79년 10월 26일의 총성이 울리고 난 다음해, 이른바 ‘서울의 봄’ 시절이었다. ‘서울의 봄’은 이제 막 유신 압제에서 벗어난 온 국민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대한민국 전체를 들썩들썩하게 만들었다. 그 훈풍은 마침내 내가 살고 있던 충남 당진의 시골동네에까지 불어 닥쳤다.

    내가 다닌 중학교는 농업계 고등학교와 교정을 함께 사용하고 있었다. 먼저 움직인 사람들은 머리가 더 큰 고등학생들이었다. 그들은 ‘두발 자유화’ 등을 요구하며 데모를 하려다 실패했는데, 그 소문이 중학생인 우리의 귀에도 들어왔다.

    일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고등학생들의 사건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리 중학교에서도 두발 자유화를 요구하는 데모 시도가 좌절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나는 3학년 1반 반장을 맡고 있었다.

    아침에 등교한 후 한 친구가 와서 3학년 반장이 다 모이기로 했다면서 옥상으로 오라는 연락을 해왔다. 무슨 일인가 했지만, 나는 다른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게 데모를 위한 예비모임의 성격이었고 앞서 준비한 친구가 어설프게 일을 추진하다 학교 측에 정보가 사전에 새면서 거사를 해보지도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결국 유급생이었던 주모자가 퇴학당하는 것으로 끝나버리고 말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아직도 유신의 몰락에 대한 ‘국민적 기대’와 유신의 부활을 알리는 신군부의 등장으로 인한 그 ‘기대의 좌절’을 동시에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아 있다.

    70년대 경찰에게 강제로 머리를 깎이는 모습

    두발단속은 유신시대의 과거형이 아니다

    후진 국가일수록 권력을 장악한 자들은 국민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갖가지 통제를 자행하고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게 마련이다. 거기에 집권자의 취향에 따른 획일화를 강요하는 경향도 강하게 마련이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그 대표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국민의 머리카락조차 감시하고 통제하는데 열을 올렸다. 이는 물론 중고등학교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젊은이들이 다양한 ‘헤어스타일’로 자신의 멋과 개성을 뽐내는 것을 유신정권은 용납하지 않았다. 유신정권은 ‘미풍양속을 해치는 퇴폐적 풍조’라며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기 위해 전 경찰력을 동원했다.

    특히 서울은 툭하면 일제단속이라는 걸 하면서 시내에 임시 이발소까지 설치하여 즉석에서 머리를 강제로 깎아버리기도 했다. 남자의 경우 머리는 귀와 옷깃을 덮으면 장발 단속의 대상이 됐다. 여성의 경우는 치마 끝이 무릎에서 17cm 이상 올라가면 단속대상이 됐다. 민생치안에 힘써야 할 경찰이 바리깡과 자를 들고 다니는 ‘우스운 광경’이 일상화되었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76년에는 단속을 피해 달아나던 한 재수생이 종로 전철 역사에서 선로에 뛰어들며 전철운행이 10분간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어떤 여성은 자신이 입던 치마를 가지고 파출소에 가서 ‘이 옷을 입어도 되는지’ 사전에 문의하고, 경찰은 치마 길이를 자로 재보며 이에 답변하는 장면도 연출되었다고 한다.

    76년도에는 초등학생도 장발단속을 한다고 교문에서 한 학생을 두 번씩이나 집으로 돌려보내는 등 난리법석을 피우다 ‘너무 하는 것 아니냐’는 학부형들의 항의가 잇따르자 중단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장발단속은 예비군 훈련장에서도 벌어졌고, 심지어는 정부청사 입구에서도 경찰에 의해 ‘장발 공무원들’을 단속하는 사태가 벌어져 정부기관 간에 신경전을 벌이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유신 시절 온 국민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조국 근대화를 위해’ 정권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만을 원했던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의 획일화에 대한 광적 열망은 통제와 단속의 제일선에 설 수밖에 없던 경찰에게나 통제와 단속을 피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나 엉뚱한 데 에너지를 낭비하도록 이끌어 감으로써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가로막는 주범이었다.

    이러한 두발단속의 전통은 80년대 5공 시절에도 변형된 형태로 지속되었는데, 87년 6월항쟁에 이어 터진 7 8 9 노동자대투쟁 당시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며 내건 첫번째 요구가 임금인상이 아닌 ‘두발 자유화’였다고 당시 민주노조운동에 함께 했던 이갑용(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증언한다.

    유신세력들과 그 후예들의 생각과 달리 유신과 5공 시절에도 우리 국민은 통제받는 ‘배부른 돼지’이기보다는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추구하는 ‘자유로운 인간’이기를 원했던 것이다.

    필자소개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장, 진보신당 동작당협 위원장을 역임했고, 현재 친구였던 고 박종철 열사의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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