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천국을 만드는 생각
[서평]『사무사 :<궁핍한 시대의 시인>읽기와 쓰기』(김우창 저 / 현암사)
    2012년 09월 08일 01:1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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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행복할 수 있는가?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결코 완전한 행복에 이를 수 없음을 역설했다. 인간은 크게 두 가지 감정으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가난이요 또 하나는 권태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그 자신 혹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많은 시간의 노동이 필요하고, 노동 이후에는 다음 날 위하여 쉬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과정이 무한히 반복되며 육체적인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그러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는 너무 많이 주어진 시간으로 존재 자체가 짐이 되기 때문이다. 매일 24시간 씩 80년이라는 세월을 권태 없이 채워나간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가장 단순하게는 맛있는 것을 먹고 권태에 저항하겠지만 반복될수록 쾌락에 적응하며 흥미를 잃을 것이다. 다음으로 사람들로부터 얻는 사랑을 통하여 권태에서 벗어나보려고 하겠지만 혼자가 될 때면 마음 속에서 올라오는 불안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물론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극단적인 면이 있기에 현실에 완벽하게 부합하지는 않다. 그렇지만 인간이 물질적인 고통은 물론이거니와 권태라는 정신적인 고통도 받는다는 사실은 생각해볼만 하다.

이러한 생각은 이후에 등장하는 실존철학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인간 존재의 핵심을 불안으로 설정한다. 인간의 근본적인 상태는 불안이다. 불안은 인간이 가진 존재론적 한계로부터 나온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또한 자아가 형성되어 자기 자신을 인지하는 것도 약 십여 년이 지나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죽음 이후에 어떠한 세계가 펼쳐지는지도 알 수 없다. 인간은 떠밀려 인생을 살게 된 것이며, 언젠가는 죽겠지만 이왕 태어난 거 열심히 살아보자라는 생각 말고는 갖기 힘들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어 언제나 불안 속에서 헤엄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이렇게 결핍된 마음을 채우기 위하여 외부의 존재에 의존한다. 돈을 맹목적으로 추구하거나, 단순한 쾌락을 쫓아다닌다. 사람의 품에 안겨 잠들거나, 명예와 권력을 좇거나, 신으로부터 영적인 구원을 꿈꾸며 불안을 잠시나마 잊으려고 한다. 그렇지만 불안이 잠잘 뿐이다. 마음의 균열이 생기는 순간, 불안은 언제나 다시 깨어날 것이다.

이러한 인간 존재에 대하여 하이데거는 실존을 주장한다. 실존은 떠밀린 인생, 외부에 존재하는 권위에 자신의 삶을 맡기는 양태를 거부함으로써 시작된다. 현세 이후의 세계를 더 이상 인식할 수 없는 인간이 지닌 한계, 그리고 거기에서 생겨나는 불안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더 이상 떠밀리는 것이 아닌, 마치 내일 죽을 것처럼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설정한 방향대로 자신을 내던진다.

구조적 사고력 그리고 감정의 정확성

위의 실존철학은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병폐의 원인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현대 사회에서 인간이 고통 받고 있는 이유는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오롯이 자신의 삶 속에서 찾지 못하고 남들에게 주워들었기 때문이다.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부모와 사회로부터 생각을 맹목적으로 흡수한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최초의 가치관을 형성하게 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된다. 그렇지만 이는 주워들은 단편적인 생각으로 구성된 편견의 집합체일 뿐이다.

생각이 생각으로만 떠돌고 자기 자신의 삶과 흡수되지 못할 때, 우리는 그것이 왜 옳은지 아무런 설명도 못하고 맹종할 뿐이다. 스스로가 가진 부동의 동자 혹은 삶의 공리 위에 삶에서 얻어진 생각으로 가치관을 차곡차곡 쌓지 않는다면, 스스로가 살아가는 이유를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다. 남이 주입해준 생각에 이끌려 갈 뿐이다.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면서 살지만 과연 그 생각이 우리를 올바르게 인도하고 있는지 수백 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사회에서 말하는 대로의 성공이나 명예가 인간을 행복하게 해줄 것인가는 그 시작이 될 것이다. 혹은 부모님께서 우리에게 조언해주시는 말씀이 언제나 옳은 것인가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행동과 사고는 언제나 전체적인 구조와 맥락 아래에서 판단되어야 한다.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그 행동이 실행되는 맥락에 따라서 다양한 판단이 가능하고, 그 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살인도 모두 다 같은 살인이 아니라 성폭행한 여자를 살인하는 자도 있는 반면에 성폭행 여성을 구하려다 살인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같은 살인이라도 천차만별이다. 또한 살인의 동기, 즉 행동을 이끄는 생각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설 정도일 것이다.

전체적인 구조 혹은 맥락이 고려되지 않고, 삶과 유리된 가치관은 우리를 거짓된 인식에 빠지게 하고 잘못된 행동으로 이끈다. 혹은 감정에 의존하여 행동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변동하는 감정은 우리에게 명확한 이정표를 제시해 줄 수 없다. 명확한 생각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전체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삶을 통하여 이해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 직접 보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만든다는 것이다.

인간이 추구해야 할 만족은 단순히 감정적으로 느끼는 만족이 아니다. 확실한 논리적 바탕 위에 스스로의 만족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명확한 논리 위에 세워지지 않은 감정은 지나가는 바람과도 같다. 언제든지 다른 생각이 들 때에는 그 감정은 금세 사라진다. 그렇지만 자신이 소망하는 삶의 방향을 전체적인 구조 아래 명확하게 이해하고 자신을 내던지는 사람은 마음의 격변 없이 언제나 만족할 수 있다.

전체성 그리고 보편적인 인간

그렇지만 삶의 현상에만 매몰되어, 부정 혹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생각 없이는 완전한 구조를 이룰 수 없다. 세상은 결코 완전한 구조가 아니다. 완전하지 않은 세상에서 불완전한 현재에 의존하여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비록 인간은 자신이 태어난 이유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아무 것도 인식할 수 없지만, 자신의 삶과 그 삶을 벗어난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세계에 대하여 완벽한 틀을 가지고 논리를 쌓아갈 수 있다면, 더 이상 생각은 방황할 수 없다. 생각이 오롯이 서며 그에게 만족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김우창의 글에서는 현재에 부재한 이상에 대한, 결코 닿지 않을 것 같은 세상에 대한 초월적인 믿음이 담겨져 있다.

이 이상은 현실과 상관이 없는 허황된 것이 아니다. 현실의 모든 인간이 물질적인, 정신적인 고통에서 해방되어 존재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자신이 살아있을 때 그러한 세상이 도래할까? 그런 것은 관심사가 아니다. 이러한 세상을 꿈꾸는 것은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가 아니다. 개인의 사적인 욕망을 초월하여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할 보편적인 도덕으로서 성립하기에 추구하는 것이다.

전체와 부분의 통합, 구조적인 틀과 전체적인 맥락에서 생각이 이해되어야 하는 것처럼 이러한 보편적인 도덕도 우리의 삶과 밀접한 연관이 되어 있다. 실존은 개인의 사적인 평안한 삶을 위하여 삶을 선택해 나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의 일부이며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은 우연적인 기반 아래 만들어졌다는 것, 곧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향유하는 물질 기반이 오롯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인간의 삶이 지극히 우연적이며 그러한 인생이란 놈이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고 못 살게 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때 자신만을 위한 삶에서 인간 전체의 삶으로 시선이 돌아간다.

자아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과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개개의 인간이 진실로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하여 해야 할 바를 고민한다. 뿐만 아니라 왜 그 생각이 가치 있으며 왜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지 등, 모든 생각의 고리에 자신의 삶을 통해 이해된 논리적 근거를 새겨 나간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보편적인 인간으로서의 윤리를 찾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명확히 이해한다. 이를 통해 자신이 내던져야 할 실존의 방향을 비로소 확정하게 된다.

세계 신뢰 그리고 무한한 자기 비판

이러한 믿음에 인간과 세상에 대한 긍정적인 믿음이 함께 한다. 인간은 무척 한계가 많은 존재다. 인간이 완벽하게 생각을 교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세상의 이치는 한정적이다. 이러한 이치는 삶을 통해서 이해해야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각자 개인적인 삶을 바탕으로 이해되어 다른 이에게 전달하기가 힘들다. 언어 자체도 개인의 세계를 완벽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또 다른 한계라는 점까지 따라 붙는다. 이러한 구조 아래 인간은 비유를 통해서 최대한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럼에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초월적인 인간의 생각을 바탕으로 세상을 구현하려는 자가 한 명이라도 있고, 그가 보편 도덕을 바탕으로 그의 삶을 통해 이상적인 세계가 존재할 수 있음을 증거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통해 보편 도덕을 가진 자들이 많아져 그들과 함께 이상적인 세계를 위해 노력한다면, 자신의 삶 이후에라도 언젠가는 이상적인 세계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명확한 신뢰를 갖는 것이다. 즉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인간과 이를 통해 영원한 이상으로 이월해가는 세상에 대한 신뢰를 갖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은 오롯이 한 방향, 즉 자신이 꿈꾸는 이상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신뢰는 곧 인간관계에서도 명확하게 나타난다. 인간이 가진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는 그에게는 무상적 증여라는 관계로만 인간관계가 성립한다.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은 곧 즐기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보편적인 이상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 위함이다. 상대방을 돕는 것은 그로 인하여 좋은 인상을 얻는다거나 나중에 도움을 받는다는 사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 좋은 세상을 꿈꾸는 자로서 해야 할 타당한 윤리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공유하고 함께 노력하기만을 바랄 뿐, 그 외의 사적인 관심은 인간관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거대한 형이상학이 오직 자신만이 옳다고 하는 아집으로 바뀔 염려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울인 생각이 없기 위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하여 더욱더 노력한다. 근신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생각이 그른 것은 아닌지 점검하고 끊임없이 회의한다. 옳다면 무엇이 옳고 그르다면 무엇이 그른지, 그리고 이 과정 자체가 옳은지, 스스로의 삶이 허락하는 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이 회의의 과정을 통하여 인간은 언젠가는 진리 곧 이데아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실천적 지성의 자세를 가질 수 있다.

가장 완벽한 존재 양태

김우창은 이러한 존재론을 바탕으로 모든 감정을 배제한 엄밀한 논리를 통해 시와 소설을 비평하였다. 그는 절제된 감정과 명확한 논리를 통하여 정제된 글을 쏟아냈고, 그 글 속에는 인간이 자기 자신이라는 좁은 껍데기에서 벗어나 인간과 세상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회의하여 이상적인 세계를 향하려는 변증법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단순히 자신이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걸어온 길을 누구든지 따라올 수 있도록 터를 잘 닦아놓고 있다. 즉, 논리가 결여된 감정, 초월적인 종교의 신념으로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누구나 겪는 공통의 삶과 고민, 그 고민에서 생겨난 논리를 바탕으로 인간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바를 밝혀낸다.

인간에 대한 엄밀한 관찰을 바탕으로 인간의 삶을 근거로 모든 인간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바를 명확히 드러낸다. 이러한 김우창의 생각은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존재 양태가 아닌가 한다.

현대 사회는 눈 앞의 현실에만 집착하며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스스로는 자립할 수 없는 생각의 병에 걸려 있다. 물질적인 고통, 사람들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하여 고군분투하지만 언제나 결과는 또 다시 불안으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렇지만 참된 행복은 자기 안위만을 위하는 경제학적이고 탐욕적인 태도로는 성취될 수가 없다. 마치 진리의 무의도성과 같이 의도함은 오히려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오히려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서 사욕을 버려야 한다. 이를 통해 인간은 그 한계로부터 자유를 얻어 마음 안에 거칠 것이 없는 자유를 얻을 수 있다.

필자소개
학생. 연세대 노수석 생활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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