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물’에게 납치되는 계급적 운명
    [빵과 장미] 성 범죄 원인 처방이 아닌 전시성 행정만 남발
        2012년 09월 06일 11:1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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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서는 왜 납치될 수 밖에 없었나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2006년 영화 <괴물>에서 납치된 현서(고아성)에 대해  “그녀는 매일, 그 시간에, 그 장소에 학교가 끝나면 와야 한다.“며 “현서가 괴물에게 납치된 건 그녀의 계급적 운명”이라고 했었다.

    그렇다. 현서는 ‘우연히’ 한강에 놀러 왔다가 납치된 것이 아니다. 그 곳에서 매점을 하는 가족과 함께 가건물 속에서 살아가는 현서에게 한강 고수부지는 그녀가 늘 있을 수 밖에 없는 거주 공간이다.

    그렇기에 한강 주변에 서식하는 괴물을 피한다면 그게 오히려 운이 좋은 일이며 이러한 사회적 조건이 납치를 당하는 운명을 만들었다. 부모의 가난이 자식에게 ‘괴물 앞에 더 쉽게 노출될 운명’을 불러낸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 소녀를 구하지 못했다.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은 물론이고 민주화를 위해 학생운동을 했던 백수 삼촌도, 느림보 양궁선수 고모도, 애닯은 부성애도 현서를 구하지 못했다. 그녀는 사회의 부조리 덩어리인 괴물의 입 속에서 결국 질식할 수 밖에 없었다.

    봉준호 감독은 <괴물>에서뿐 아니라 <마더>에서도 여학생의 죽음을 다룬 적이 있다.(<살인의 추억>에서 영화상 마지막 희생자도 교복 차림의 여학생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 ‘원조교제’를 하던 ‘쌀떡소녀’라는 별명을 가진 여고생의 시체가 어느 날 동네의 높은 곳에서 빨래처럼 널려서 발견된다.

    마을이 다 내려다보이는 달동네 꼭대기에서 ‘나의 죽음을 보아라!’라는 듯 ‘전시된’ 그녀의 시체. 진짜 범인에 대한 사건의 진실공방과 별개로, 그 밤중, 그 길을, 쌀과 자신을 교환하기 위해, 홀로 가야만 했던 ‘가난한’ 그녀에게 벌어진 운명이었다.

    가난한, 여자, 아이

    제도 속의 약자인 여자, 아이, 나아가 가난하기까지 한 이들을 영화 속에서 희생자로 등장시키는 것은 관객의 감정이입에 효과가 있기도 하지만, 사실 그것이 현실을 반영하기도 한다.

    장애아동에 대한 성범죄 실태를 다룬 영화 <도가니>

    성적으로, 계급적으로, 세대적으로, 총체적 약자인 그들은 아주 쉽게 범죄의 대상이 된다.

    나주에서 일곱 살짜리 아이가 납치되었다가 성폭행 당한 채 발견되었다. 통영 어린이 납치, 살해 사건이 알려진 지 한달 만에 다시 여아의 납치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또? 라는 반응을 무색하게 하는 건 작년 한 해에만 아동,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가 2천 건이 넘는다는 경찰청 자료다.

    그런데 이렇게 아동성범죄가 발생하자 언론은 선정적 보도에 혈안이 되었다.

    가해자 실명을 비롯하여 얼굴까지 공개하겠다는 마음에 엉뚱한 사람의 얼굴을 싣는 대형 오보를 터뜨리고, 피해자의 상처부위를 자세히 보도하고, 심지어 아이가 납치되었던 집안 거실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진과 아이의 일기장 공개에 이르기까지 연일 도를 넘은 보도를 ‘경쟁적으로’ 쏟아냈다.

    환멸을 일으킬 정도다. 그저 가해자를 향한 분노의 여론을 형성하는 것 외에는 문제해결에 아무 도움도 안 된다.

    그런 분노 속에서 가해자들은 ‘우리와 다른’ 비현실적 ‘짐승’이나 ‘괴물’이 된다. 그렇기에 그 괴물들만 제거하면 마치 사회의 악성종양이라도 제거되는 듯 그들을 향한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여론이 번지고 있다.

    물론 다수의 성범죄자가 집행유예로 풀려나거나 가벼운 형을 선고 받는 현실을 생각할 때 지금보다 높은 수위의 처벌은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가해자의 응징보다 더 시급한 건, 그런 범죄(자)를 만들어내는 사회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피해자들이 주로 어떤 계층인지를 ‘솔직하게’ 밝히는 일이다.

    한강에 괴물이 도대체 왜 등장했는지는 밝히지 않으면서 괴물의 ‘바이러스’ 타령만 하며 시민들을 공포에 몰아넣는 일은 비단 영화 속의 초현실만이 아니다.

    사건의 양상을 보면, 통영 사건의 경우 평소처럼 학교 가는 길에 차를 태워주겠다는 주민에 의해 피해자는 납치되었다가 성추행 당한 후 살해되었다.

    그리고 나주의 피해자도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자기 집 거실에서 가족들과 함께 잠을 자다가 이불째 납치되었다.

    날벼락 같은 일이다. 그런데 이 날벼락은 단지 ‘짐승 같은 변태성욕자’에 의해 재수 없게 벌어진 일일까.

    좀 더 구조적 문제를 들여다보자. 통영의 희생자는 아버지만 있는 한 부모 가정에서, 돌봐주는 어른이 마땅히 없다 보니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배고프고 외로운 아이였다.

    나주의 ‘ㄱ’양이 살고 있던 집은 식당을 개조한 공간으로 미닫이 유리문만 열면 바로 거실에서 자고 있는 아이들에게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구조였다.

    비밀번호와 몇 개의 잠금장치를 필요로 하는 묵직한 현관문을 가진 집이 아니다. 아이 아버지는 일용직 노동자고 기초생활수급자라고 한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2010년 부산 김길태 납치살해 사건이 벌어진 곳도 피해자가 살던 다세대 주택 인근이었고 그 곳은 치안의 사각지대인 재개발 현장으로 빈집이 많았다.

    희생자들은 이렇게 <괴물>의 현서처럼 저소득층 자녀였고 일상의 공간에서 주변인에 의해 피해를 입었다. (공교롭게도 나주 어린이 성폭행 사건이 알려지기 열흘 전 경향신문에서 저소득 한부모 가정의 아이가 더욱 범죄에 쉽게 노출된다는 글을 실었었다.)

    그러나 이 ‘일상’에 숨어있는 요소들을 자꾸 배재한 채 확실히 검증되지 않은 다른 요소들을 가져와 ‘성범죄의 원인’이라고 딱지를 붙인다.

    게임과 야동이 없던 시절에는 마치 성범죄가 없던 것처럼 술이 문제고, 게임이 문제고, 야동이 문제라고 한다. 심지어 외국인 체류자도 탓한다.

    나아가 가해자들이 특정한 성적 애호증을 가졌다는 추측성 보도를 하며 ‘성애’와 ‘성폭력’을 구별하지 못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언론의 선정적이고 부정확한 성범죄 보도야 말로 야동과 게임보다 더 위험해 보인다.

    그들의 계급적 운명을 방관하는 감시사회

    이처럼 강력 범죄가 발생했을 때 정치권이나 (대체적으로) 보수 언론에서는 보다 근본적 문제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한다.

    성차별적 구조와 더불어 약자와 소외계층에 대한 인권 의식 결핍, 정부의 부족한 지원체계로 인해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계급적 불평등을 적극적으로 지적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가해자 역시 일용직의 저소득층이거나 일정 주거공간이 없는 소외계층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게임, 술과 야동을 즐겼다는 준비된 ‘공식’을 제공한다.

    우리 사회에서 중학교 중퇴자가 타인에 대한 존중을 당연하게 배울 수 있을 만큼, 거꾸로 그들이 존중 받는지 잠깐이라도 생각해보면 어떨까.

    그러나 이 아픈 사회를 제대로 들춰내면 정치권을 비롯한 여론주도층에게는 복잡해질 뿐이다. 더구나 가해자도 실은 사회의 구조적 피해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더욱 껄끄러운 일이다.

    취약계층에 대한 복지 담론이 펼쳐질 것이고, 피곤한 성정치 논쟁을 해야 한다. 그러니 피곤하게 원인에 초점을 두기 보다 처벌 강화라는 화끈한 방법을 더 선호한다.

    더불어 이런 강력 범죄를 빌미로 불심검문이라는 낡은 발상으로도 모자라서 급기야 ‘물리적 거세’라는 극단적 방안까지 내놓는다.

    싹 다 자르자, 죽이자, 이렇게 그저 ‘그 놈의 성기’만 응징하려는 전시성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주 소수지만 성폭력 가해자가 여성이 되고 피해자가 남성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는 누구의 성기를 처단할텐가. 그러므로 ‘성기’에게 죄를 묻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그 놈의 성기’에 집착하는 반면, 성범죄뿐 아니라 무차별적으로 벌어지는 사회의 수많은 폭력에 대해서는 그 동기를 묻지 말라고 한다.

    현실을 들춰내는 일이 불편해서 답하기 싫으니 묻지 않기를 바라는 지배층의 속마음이다. 그래서 ‘묻지마’ 딱지를 남발하며 수많은 원인들을 무화시킨다.

    그저 원형경기장의 성난 맹수에게 기독교인을 던져놓은 네로 황제처럼 대중의 분노를 구실로 화끈하게 참형을 이끌어내려고만 한다.

    지금도 여전히 ‘매일, 그 시간에, 그 장소에 학교가 끝나면 와야’하는 운명에 처해진 ‘가난한 아이들’이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사각지대에 놓여있을 것이다.

    부모의 손길이 닿지 않는 아이를 모른 척 하는 사회의 방관 속에서 그 아이들은 가해자로 성장할 수도 있고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관심은 내팽개치고 ‘감시와 처벌’의 사회를 구축하려는 꼼수만 부린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감시가 아니라 관심이다.

     

    필자소개
    집필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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