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신의 추억⑧
    부정선수, 결과만 좋으면 된다?
        2012년 09월 05일 12:5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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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초등학교 시절 축구부에서 활동했다. 내가 다닌 충남 당진의 우강초등학교는 당시 축구를 제법 잘 하는 학교였고, 5학년 때인 76년도 중반에는 당진군의 축구지정학교가 되어 축구전담 선생님에, 축구명문인 대전상고 출신의 코치까지 두는 팀이 되었다.

    그 해 봄 6학년인 내 1년 선배들은 소년체전 충남예선에서 선전했지만, 아쉽게도 준우승을 차지하는데 그치고 만다. 이제 우리 5학년에 대한 기대는 더욱더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우승이다!’ 우리는 초등학생이었음에도 하루에 3시간 정도의 수업을 마친 후에는 줄곧 운동장에서 축구에 전념해야 했다.

    그런데 나에게 문제가 발생했다.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 어머니가 “나는 비록 농사를 짓고 있지만, 우리 애들은 꼭 가르쳐서 이런 고생을 시키지 않겠다”면서 학교로 찾아오셔서는 나를 축구부에서 빼달라고 강력히 요구한 것이다.

    마침 축구에 흥미를 잃고 있던 나는 결국 축구부를 그만 둬야 했다. 6학년에 올라갈 즈음에 축구부 코치가 나와 또 다른 한 친구를 불러 다시 축구를 하자고 제안했으나 나도 그렇고 나보다 축구를 잘하던 그 친구도 그렇고 이를 거절했다.

    1980년 제9회 전국소년체육대회 개막식

    나의 이런 과정과 무관하게 우리 학교 축구부는 1년 선배 두 명을 유급시키기도 하고, 다음 해에는 수업을 거의 다 팽개치면서 열심히 소년체전 충남도 예선전을 준비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였을까. 마침내 77년도 소년체전 충남예선에서 감격의 우승을 차지한다.

    경기결과에 대한 소식은 더욱 더 놀라운 것이었다. 결승전에서 3 : 0, 준결승전에서 2 : 0을 비롯해 예선전에서는 최고 7 : 0 등 단 한 점의 실점도 없이 완벽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학교만이 아니라 우강면 전체가 들썩였다.

    그런데 뜻밖의 문제가 발생했다. 준우승에 머문 서산군에서 부정선수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결승전에서 맹활약을 펼친 몇몇 선수가 그해 개학하기 전에 자신들과 가진 친선경기에서는 보이지도 않던 선수였다’며 충남도 교육위원회에 의혹을 제기하면서 진상조사를 요구한 것이다.

    결국 대전에서 장학사가 내려와 진상조사에 착수하는 일로 발전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사태의 진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내 이름으로 동네 중학교를 중퇴한 세살 위의 형이 출전했고, 또 다른 한 사람이 앞에서 말한 나보다 더 축구를 잘 하던 친구 이름으로 출전했던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그동안 우리학교 축구팀과 운동장에 놀러온 동네 중학생들 간에 연습경기를 종종했었는데, 그 과정에서 눈에 띠는 사람들을 ‘스카우트’했던 모양이었다.

    장학사가 진상조사를 하는 동안 동네 형은 내 이름으로 교실에서 미술수업을 받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어야했고, 나는 학교에 나오지 않는 다른 친구(당시에는 6학년이 되면 반별로 한두 명쯤은 돈 벌러 서울이든 어디든 떠나서 학교에 나오지 않는 일이 발생하곤 했다) 이름으로 수업을 받고 있어야 했다. 담임선생님의 지도하에 우리는 장학사의 조사에 대비하여 사전 예행연습까지 했다.

    그러나 진상조사에 나선 장학사들은 초등학생인 내 눈에조차 뻔히 보이는 허점을 외면한 채 형식적인 조사만 진행한 후 그대로 철수하고 말았다. 뒷돈을 받았다든지 접대를 받았다든지 했는지 우리야 알 턱이 없었다. 사건은 아무 일 없었던 듯 그렇게 매듭지어진 것이다.

     유신 시절 소년체전 관련 기사를 둘러보면 부정선수 문제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그것도 한두 건이 아니어서 소년체전의 존폐문제가 항상 거론될 정도였다.

    당시 내가 들은 소문 중 하나는 ’00도팀 초등학교 축구선수가 소년체전에서 헤딩을 넣다가 가발이 벗겨져서 부정선수임이 들통 났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1년 정도 학생들을 유급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유급까지 한다고 미래가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장의 승진고과나 학교의 명예니 뭐니 하는 이유 때문에 아이들은 희생양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즘 “5․16은 쿠데타가 아니”라고 밝힌 박근혜 후보 때문에 시끄럽다. 박근혜와 그 측근들은 박정희가 “구국의 아버지” 쯤으로 불리길 바라는가 보다.

    박근혜의 측근인 뉴라이트 박효종 교수는 ‘5․16과 유신을 통해 경제성장을 일궈내면서 중산층이 두터워졌고 이것이 장기적으로는 민주주의의 보루를 형성하는데 기여했다’면서 5․16과 유신이 장기적으로는 민주주의에 기여했다는 궤변까지 늘어놓고 있다.

    연세 드신 분들 중에는 “그래도 그때 일구어낸 경제성장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라도 살고 있는 것 아니냐”며 5․16과 유신을 정당화하기도 한다.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게 다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일까. 만약 당시의 우리학교 교장선생님이 “우리학교 축구부가 77년도 당시에 우승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 않나. 당시 부정선수를 동원한 것은 우승하기 위한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변명한다면 누구도 설득하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일궈냈다 할지라도 군대를 동원해 민주주의를 압살하면서 그런 일을 이루어냈다면 그것은 정당하게 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 우리의 목표를 경제성장이나 산업화로 단순화시킬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5공화국 시기 그렇게 ‘눈부신’ 경제발전을 일구어냈음에도 전두환 일당의 군사쿠데타를 단죄하지 않았던가.

    유신 시절에는 대통령부터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등장한 인물이다 보니 지금보다도 훨씬 더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풍조가 만연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풍토 하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우리는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학교를 다녔고, 이후 성장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을까.

    80년대 초반 고등학교 다닐 때 친한 친구가 있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루는 내가 물었다.

    “너는 왜 육사에 가려고 하냐?”

    그 친구는 대답했다.

    “육사에 가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아보려고 그래!”

    내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자 이 친구는 이렇게 덧붙였다.

    “정권을 잡은 다음에는 민간에 이양하고 다시 군대로 복귀해야지!”

    박정희는 전두환을 낳았고, 전두환은 또 다른 미래의 쿠데타 주역 여럿을 낳아 기르고 있었다. 그러한 군사독재의 지속을 끝장낸 건 박정희, 전두환도 아니요, 5․16과 유신 이래 지속된 경제발전의 결과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더 이상 못 참겠다!’며 독재정권의 폭압을 거부하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이루어내고자 들고 일어선 범국민적인 민주화운동의 결과였다.

    필자소개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장, 진보신당 동작당협 위원장을 역임했고, 현재 친구였던 고 박종철 열사의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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