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80년대 학번 남자의 반성문
    [말글 칼럼] 지금의 젊은 세대를 비난할 자격 386에겐 없다
        2012년 09월 04일 05:2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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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이를 먹을수록 ‘꼰대’ 노릇할까봐 걱정이 됩니다. 안 그러려고 노력은 하지만, 때론 제 옛날 그 나이 적 모습과 우리 아들을 비롯한 젊은이들을 비교하곤 합니다. 그래 이전 우리 젊었을 적과 지금 젊은이들 사이에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 한 번 정리를 해봤습니다. 그러면 멋모르고 젊은이들을 괴롭히는 일을 피할 수 있겠다 싶어서죠.

    그런데 정리를 하면서, 어느 순간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습니다. 그저 ‘꼰대’ 짓을 피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80년대 학번이면서 남자인 경우, 터무니없는 혜택을 누렸고 누리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걸 전혀 깨닫지 못하고 온갖 데서 행세를 하는구나 싶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동시대 여성들이나 우리 아래 젊은이들에게 거의 기생하는 수준으로 살아온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를 자랑스레 떠들어대고, 현재를 주무르려는 우리 세대 남자들 모습이 펼쳐졌습니다.

    우선은 과거와 현재의 차이부터 한 번 짚어 보겠습니다. 제가 80년대 중반에 대학 들어간 관계로 70년대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대학 가기 참 좋았다

    80년대에는 무엇보다 진학에서 선택지가 아주 넓었습니다. 일단 고입과정에서 집안 형편이 어려우면서 우수한 학생 상당수가 상고나 공고 쪽으로 빠져나갔죠. 제 살던 부산만 해도 부산상고, 경남상고, 부산여상, 경남여상, 선화여상/ 부산공고, 경남공고, 전자공고 같은 우수한 상공계열 고등학교가 많았습니다. 반에서 5등 이내 아이들 중 상당수가 이리로 빠졌죠.

    대입의 경우도, 지방 국립대에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서울로 올라가는 경우, 대개가 서울대 진학이었습니다. 형편 좋은 집안 친구들이 연고대를 들어갔죠. 성균관대나 한양대로 가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었습니다. 그 비슷한 성적이면 대개 부산대로 들어갔지요. 아마 다른 지방도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자연계의 경우 의대나 한의대가 지금처럼 무조건 최상위권이지도, 공부 잘 한다고 무턱대고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지방 국립대 의대는 반에서 10등 이내 학생들도 상당히 들어갔고, 최상위권 아이들 중 상당수는 서울의 자연대나 공대로 아주 많이 진학했습니다. 지방 의대나 한의대는 그보다 훨씬 커트라인이 낮았습니다. 지금은 꽤 유명한 한의대도 반 20등 이내, 지방 사립대 의대는 그보다 더 낮은 성적으로도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자연히 과외나 학원이 성행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는 전두환의 과외 금지가 대단한 업적인 것처럼 말하는데, 지금과 단순 비교할 건 아니라 봅니다. 전두환 이전에도 과외가 있긴 했지만, 아주 부잣집 아니면 엄두도 못 냈죠.

    그러던 것이 과외 금지령이 떨어지니 제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과외 받는 아이 있단 소리는 들어보질 못했습니다. 학원은 중학교 때 성문영어 배우러 다닌 게 제 전부입니다. 그마저도 고등학교 들어와서는 사라졌지요.

    그러니 아이들 앞에서 ‘넌 누구 닮아서 공부를 그리 못하나’는 식의 얘기는 꺼내지 말 일입니다. 이른바 ‘in seoul’을 하려면 전국 10% 안에 들어야 합니다. 간혹 상담하다보면 ’한양대 아래‘(죄송)를 아예 개무시하는 경우를 보는데, 정말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중앙대, 경희대, 외대, 시립대, 건국대 들만 해도 우리 때 연고대나 최소한 성균관대 급이란 걸 알아야 합니다. 80년대 대학별 격차를 근거로 지금 서울 소재 대학들을 나누는 건 시대착오적입니다.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점수 차가 정말 얼마 없거든요.

    특히 지방대 의대 출신이면서 아이가 반에서 5등밖에 못한다고 푸념하는 걸 보면 기가 막힙니다. 자기보다 아이가 공부를 잘 하는데 말이죠.

    청년 실업? 뭥미?

    이렇게 진학이 분산됐다는 것은 그만큼 일자리가 많았다는 걸 뜻합니다. 상공계열 고등학교 출신자들 중 성적 우수자들은 은행이나 대기업 공장으로 쉽게 취직이 됐습니다. 실제로 제 아는 상고 출신들 가운데 상당수는 유력 은행에서 중견으로 일하고 있기도 하지요.

    대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자리 없어 취직 못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지방 국립대 출신들도 서울로 상당히 많이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교수 추천을 받으면 웬만한 곳은 다 들어갔지요. 꼭 들어가고 싶은 데를 못 들어가는 경우는 있어도, 취업 자체가 막히진 않았습니다.

    특히 이른바 ‘메이저’로 불리던 대학들은 골라서 취직할 수 있었습니다. 경제가 급팽창하던 시기인지라, ‘잘 나가는’ 대학교 출신이라면 무조건 OK였더랬죠. 과 사무실 한 켠에 수북이 쌓여 있던 대기업 원서들이 기억나는군요. 기업에서 대학으로 신입사원 유치하러 다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가끔씩 ‘대학에서 실전에 써먹지도 못할 교육을 한다’는 소릴 들을 때마다 좀 우습습니다. 실전은 커녕 학점도 제대로 못 딴 학생들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받아들인 과거를 잊은 게지요. 물론 학과나 전공 같은 것도 가리지 않았지요. 여기서 여학생들은 예외였다는 점을 짚어두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독립하기 쉬운 조건

    국립대는 말할 것도 없고, 사립대라 하더라도 가계 경제가 휘청거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소 팔아 자식 서울 보내는 부담을 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집안을 말아먹을 정도는 아니었지요. 그렇게 서울로 유학 보내는 경우가 많지도 않았지만요. 교회 청소부 하던 저희 아버지도 애 셋 무난히 서울 유학 다 시켰을 정도거든요.

    값싼 등록금에 하숙비나 자취방 값도 그리 비싸지 않아 어렵지 않게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저만 하더라도 2학년 때부터는 집에 손 벌리지 않고 아르바이트나 과외 같은 걸 해서 자취하면서 잘 살았거든요.

    이 과외는 ‘메이저’ 대학생들의 특권 중의 특권이었습니다. 80년대 후반까지 여전히 과외는 불법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단속이 느슨해지면서 ‘몰래바이트’라는 이름 달고 성행했습니다. 한 달에 20~30만원, 서너 개씩 하는 친구들은 80만원 이상 벌었지요. 당시 하숙비가 12~15만원이었으니 얼마나 풍족했는지 짐작할 만하지요.

    왕성한 학생운동의 물질적 조건

    저 보기엔 80년대 그 왕성했던 학생운동은 이상의 물질적 조건에 크게 덕본 것 아닌가 싶습니다. 좀 쪼들리더라도 독립할 수 있고, 과외만으로도 학비 댈 수 있고(하다못해 방학 때 ‘노가다’ 판만 뛰어도 학비는 마련할 수 있었죠), 학점에 신경 쓰지 않고도 취업이 그리 어렵지 않고 하니 먹고사는 것 아닌 가치 쪽으로 눈길을 돌릴 수도 있었던 거죠.

    80년대 대학교 교문 시위의 한 장면

    운동하다가 구속, 수배되고 고문당하고 까딱하다가 죽는 것도 각오해야 했을지는 몰라도, 여하튼 운동할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왜 당시 학생운동을 ‘잘 나가는’ 대학 출신들이 주도했을까 하는 의문에 답해 줍니다. 저 위에서 말한 조건들은 딱 ‘메이저’ 대학생을 위한 거니까요. 수업 출석 아예 않고 일주일에 두 시간씩 두 번만 과외 뛰면 돈 문제도 해결되니 맘껏 운동에 매진할 수 있었죠. 내색은 않아도 정 안 되면 기업에 취직하면 되지, 하는 생각도 든든한 베이스가 됐을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화려했겠습니까. 열린 미래를 반납하고 구속을 각오하고 독재와 맞서 싸우지, 게다가 또 사회과학 서적들에 달통해서 얼마나 똑똑했던지요. 거기에 80년대 중반 학원자율화 조치 이후 총학생회가 부활하면서 말 잘하고 똑똑한 잘난 영웅들이 캠퍼스마다 우후죽순 등장합니다. 선망의 대상일 수밖에요.

    구속은 필수 코스였지요. ‘재수 좋게’ 국가보안법에라도 걸리면 1년도 채 안 살고 군대까지 면제되니 금상첨화입니다. 그러고 나면 노동현장으로 가고 조직 활동을 합니다. 물론 안 하던 짓을 하려니 고달프고 힘들지요.

    그러나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복학할 수도, 기업으로 취직할 수도, 아니면 사법시험 쳐서 입신양명까지도 노릴 수 있으니 여유롭지요. 실제로 절대다수의 ‘빵잡이’나 ‘위장취업자’들, ‘수배자’들이 각계각층에서 맹활약 중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먹고사는 데 지장 없이 잘 살고 있지요.

    지속되는 황금기

    같은 80년대 학번이라도 여성들은 사정이 다릅니다. 운동권이라고 봉건적인 풍토가 없어진 건 아니었지요. 겉으로는 남녀 구별 없이 ‘동지’로 뒤섞이지만, 실제로는 언제나 여성은 종속적인 존재였습니다. 대부분 여성들은 남성들의 뒤치다꺼리하기 바빴죠. 연애나 결혼을 하게 되면 경제적인 책임은 물론 가사와 육아는 당연한 듯이 여성 몫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여성들은 조용히 운동판에서 은퇴하게 됩니다.

    90년대 이후 학번들도 비슷합니다. 특히 90년대 후반 학번으로 운동권은 처절하죠. 이미 ‘민주화’가 됐는데 뭔 운동? 이건 겉보기일 뿐입니다. 실제로는 진로가 탁탁 가로막힌 상태에서 모든 학생들의 관심사가 먹고사는 데 치우친 땝니다. 이런 판국에 ‘한가하게’ 운동이나 하고 있으니 좋게 보일 턱이 없지요. 머리로는 80년대 학번들의 영웅을 꿈꾸면서 몸은 90년대판 잉여인간, 딱 이 짝이지요.

    “80년대 운동하는 오빠는 시대를 고민하는 지사적 폼이 났지만, 내 시절부터 찌질한 루저였고, 이걸 모르고 이미 조기 빨갱이가 되버린 난 조뙨거였다…..이게 다 좋은건 다 해처먹고 부채만 남겨준 80년대 학번들, 부채를 유산인 줄 알고 물고 빨다가 하 세월 보낸 90년대 학번들이 남겨 놓은 “폐망의 저주”일게다”(왼쪽날개님의 페북 글에서 인용)

    80년대 학번은 다릅니다. 이들은 어디서든지 주인공입니다. 70년대 학번들이 원체 적어서기도 하겠지만, 현장이든 시민단체든 진보정당이든 모든 핵심은 이들이 차지합니다.

    심지어는 대우 같은 대기업에서 운동권 출신들을 따로 공채하기도 했습니다. 기업들이 볼 때도 이들의 왕성한 활동력과 순발력, 물불 가리지 않는 모험심이 탐이 난 게지요. 그리고 세기가 바뀐 지금도 여전합니다.

    꼭 운동권 출신 아니더라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이 시기 대학 다니면서 데모 한 번 안 해본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주변에 운동권 출신이거나 여전히 운동하고 있는 친구 없는 사람 없을 겁니다. 선거 때 돈 안 보탠 사람도 드물 겁니다. 이렇게 직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데다, 민주화를 이룬 주역이라는 자부심이 하늘을 찌릅니다.

    이건 참으로 기이한 현상입니다. 어떻게 한 세대가 30년 가까이 황금기를 누릴 수 있답니까. 그러나 화려한 영광 뒤에는 언제나 이들 주인공들을 떠받들어야 하는 희생자들이 있기 마련이죠. 원래 제 자리여야 할 것을 빼앗긴 존재들이죠.

    80년대 학번 남자들, 침묵하라

    한마디로 80년대 남자 학번들은 기생 계층입니다. 다른 이들이 누려야 할 것을 몽땅 다 차지해버린 거죠. 그러면서도 그걸 당연시하는 아주 뻔뻔한 세대이기도 하지요. 술이라도 한 잔 할라치면 이런 영웅들이 또 없습니다. ‘빵’ 살던 이야기, 각종 무용담, 수배 일지, 현장 체험담 같은 고색창연한 곰팡이들이 장미꽃인 양 둔갑해서 술판을 어지러이 수놓습니다. 그 낡아빠진 체험이 초라한 현실을 정당화한다 여기나 봅니다.

    그런데 20년 이상 황금기를 보낸 80년대 남자 학번들이 세상에 기여한 게 대체 뭡니까? 민주적인 기업 문화를 만든 것도 아니고, 건전한 문화를 조성한 것도 아니고, 확고부동한 법치 질서를 구축한 것도 아니고, 386이니 486이니 하는 정치인들이 번듯한 정치를 한 것도 없습니다. 외려 통합진보당 같은 데서 분란을 일으키는 선봉에 서 있지요.

    그런 점에서 지금 젊은이들 또한 희생양입니다. 그리고 그들 젊은이들의 아버지가 바로 이 세대이지요.

    지금 대학생들은 아버지 세대의 삶을 도대체 살아낼 수가 없습니다. 아르바이트에 학점에 스펙에 취업시험 준비까지 몽땅 홀로 해결해야 하는 판국에 어디 딴 데 신경 쓸 여력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살인적인 등록금은 자식들을 몽땅 불효자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래 사생결단으로 매달리는 거죠. 사회과학 책 안 읽는 게 아니고, 못 읽는 거지요.

    그런데도 이 세대더러 함부로 ‘요즘 아이들은 정의감이 없다’는 식의 얘기를 합니다. 그건 말 그대로 언어폭력입니다.

    말로는 다 데모 해봤고, 나름 민주적이라고 자부합니다.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면 ‘나도 다 안다’는 식이고,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봐라’ 식이죠. 그러나 그건 공염불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말로만 그렇지 실생활은 개판인 부모가 위선자로밖에 보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 부모 세대 입에서 나오는 ‘지당하신 말씀’이 어디 귀에나 들어오겠습니까. 그냥 아이들 사는 대로 맡겨 놓는 것이 어쩌면 최상책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내 하는 얘기가 아이들 실상을 모르면서 떠드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기라도 했으면 싶습니다.

    이런 말이 유행한다더군요. ‘40대들이 자리 꿰 차고 앉아서 2,30대가 누려야 할 단물을 쪽쪽 다 빨아먹고 있다’고요. 맞는 말입니다. 전공도 아니면서 스펙 하나 제대로 갖추지 않았고 영어 회화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부하들 부려먹으면서 자리 보전한다는 거지요.

    자라나는 아이들 키우기 팍팍할 테니 그건 봐주더라도, 이것 하나만은 좀 지켜야겠습니다. 제발 입 좀 다물고 삽시다!

    이상 80년대 남자 학번이면서 이른바 명문대 출신의 반성문이었습니다.

    필자소개
    민주노동당 활동을 하였고 지금은 정의당의 당원이다. 수도권에서 오랫동안 논술 전문강사로 일하다가 지금은 부산에 정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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