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소선 기억하기
    ‘어머니’의 길이 일군 여성의 역사
    [안녕? 페미니즘!] 이소선 어머니의 1주기를 맞아
        2012년 09월 04일 11:5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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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이야기 뭐하러 들을라고 하냐. 지독시리 고생했던 이야기 뭐하러 듣냐. 나도 싹 잊어버렸다. 진절머리나서 잊고 사니까 이제 기억도 못 하겠다. 그냥, 저, 저기 70년대 이후부터 하면 안 되냐?”
    – 오도엽.『 이소선 여든의 기억: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후마니타스. 36쪽

    이소선 어머니 가신 지 꼭 일년이 되었다. 1970년 그날 이후 ‘노동자의 어머니’로 한국의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한 복판에서 어떤 매서운 격랑의 파고에도 흔들림 없이 서 계시던 그 분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전태일 정신’ 그 자체였다.

    1929년 식민지 조선에서 ‘작은 선녀(小仙)’로 태어난 이소선은 식민지 말기 근로정신대부터 시작해서, 한국 전쟁, 개발독재와 군부독재 속에서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성장 과정을 고스란히 경험하였다.

    이 땅에 살아계신 할머니 누구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살아있는 역사책일진대 이소선 할머니의 삶은 오죽하겠는가. 실제 그 분의 삶을 다룬 책들을 읽다보면 한 번은 들어봤음직한 유명 인사들의 이름이 줄줄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이소선이라는 이름은 낯설다. ‘전태일의 어머니’, 거기에서 멈춘다.

    이소선의 삶을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 <어머니>도 뭔가 충분하지 않다. 영화는 이소선 어머니와 함께 치열한 투쟁의 역사 속에서 함께 웃고 울었던 이들의 기억과 회한을 겨냥하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이소선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다.

    전태일의 영정을 들고 절규하는 이소선 어머니

    이소선 어머니를 ‘운동권’의 어머니가 아니라 이 땅의 아들과 딸들의 어머니로,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궤적을 남긴 인물로 역사화하는 것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질문할 때이다. 어머니를 기억해야 하는 아들과 딸들에게 필요한 언어는 무엇이 되어야 할까. 이 글은 그 시작이다.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이소선은 노동자의 어머니다. 1980년 계엄하에서 이소선을 수사하던 수사관은 이소선이 ‘빨갱이’인 이유를, 북한에서는 김일성보고 모두 아버지라고 하는데, 남한에서는 이소선을 모두 어머니라 하니 김일성과 똑같은 빨갱이라 했단다. (오도엽. 『이소선 여든의 기억: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후마니타스. 189쪽.)

    “말인지 막걸리인지” 구분도 안 되는 말이지만, 정말 이소선은 노동자들의 어머니였다. 이소선 어머니 팔순기념 헌정문집, 『조선 질경이, 이소선』은 21명이 부르는 어머니로 가득하다.

    성별 나이 직급 불문하고 (김대중) 대통령에서 어린 여공들까지 이소선은 모든 이에게 ‘어머니’로 불렸다. 그냥 전태일의 어머니여서 어머니가 아니라, 그 엄혹한 세월, 고문과 수배, 죽음이 일상에 짙게 드리워 있던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어머니에게서 따뜻한 위로를 받았고, 끝없는 지지와 용기를 얻었다.

    늘 배가 고팠던 노조 활동가들은 어머니가 끓여주시는 우거지국과 라면을 먹으며 힘을 냈다. 누구라도 빨갱이가 될 수 있고, 오늘 본 사람이 내일 주검으로 발견될 수 있는 그런 전쟁같은 시대 어머니는 두 팔 걷고 그 모든 이들의 울분과 슬픔에 함께 했다.

    1975년 박정희 정권이 인혁당 사건으로 사법살인을 자행하고 시신을 가족에 넘겨주지 않고 화장하려 하는 길목을 막아선 것도 이소선 어머니였다. 1986년 노동자 박영진이 분신 항거했을 때, 삼엄한 경비를 뚫고 그의 죽음을 함께 한 것도 이소선 어머니였다. 일일이 다 적을 수도 없는 무수한 현장에서 이소선 어머니는 한치의 물러섬도 없는 용기와 대담함 지혜를 보여주었다.

    이소선이 노동자의 어머니가 되는 과정은 ‘어머니’라는 기표의 의미가 확장되고 역사성을 획득해 가는 과정이다.

    주지하다시피 여성이 정치적 공간에 진입할 수 있었던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세계적으로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된 것도 20세기의 일이다. 참정권은 여성의 정치적 참여를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을 충족시킨 것일 뿐, 실제 여성들이 공적 영역에서 자신의 정치적 시민권을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은 나라마다 지난한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이 누구의 어머니로서, 누구의 아내로서, 누구의 딸로서 정치적 영역에 진입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안전한 정체성을 방패삼는 것일 수 있다.

    이소선 어머니가 노동자의 어머니인 것은 그녀가 ‘태일이 엄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소선 ‘어머니’는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 한 가운데에서 ‘어머니’의 의미를 팽창시켰다.

    이처럼 이소선 어머니의 위대함은 종종 가족이기주의에 함몰된 어머니와 달리 노동자의 어머니로서 당시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 세력과 연대하여 투쟁의 선봉에 섰던 결단력에 있다고 평가된다.

    실제 어머니의 삶에는 한국 현대사의 적나라한 폭력들이 그대로 각인되어 있다. 구속, 수배, 고문, 죽음, 그 어떤 장면에서도 이소선 어머니는 누구보다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으레 어머니라면 자기 아들의 안위와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민주화니, 노동운동이니 하는 가치들은 가볍게 무시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소선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적인 가족에 머물러 있는 어머니와 대의를 위해 싸우는 어머니, 이 두 어머니의 대립된 상이 이소선 어머니의 훌륭함을 설명하기 위해 동원되는 모성이다.

    어머니가 아니라 노동운동가 이소선?

    그러나 이소선 어머니에게 소위 사적인 가족에 유폐된 어머니와 공적인 정치의 장에서 활동하는 어머니 사이의 구분은 무색해진다. 이소선에게 ‘어머니의 길’을 가는 것은 태일이에게 못다한 ‘에미 노릇’을 다하는 것이요, 그것이 곧 운동이었다.

    살아생전 남들처럼 잘 먹이지도 입히지도 못한 채 아들을 숯검뎅이로 보내야 했던 에미는,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꼭 이루어 달라’는 아들의 말을 가슴에 품고 ‘어머니의 길’을 걸어왔더니 그것이 노동운동이요 민주화운동이었다고 말한다.

    ‘에미 노릇’을 잘하기 위해 ‘어머니의 길’을 선택했다고 말하는 이소선이 아들과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는 장면은 이소선의 행복한 기억이자 뼈아픈 기억일 것이다. 엄마와 아들이 피곤한 하루를 마감하고 모깃불 피워놓고 않아 수다처럼 근로기준법을 공부했던 이야기를 어머니의 목소리로 들어보자.

    “하루는 내가 보따리 장사 하고 와서 피곤해 죽겠는데 저기 앉아서 배우라는 거야. ··· 왜 공부하자 하냐 물으면 배우면 너무 좋은 거래. 이런 거 말고 딴 거 좀 배우자 카잉께 이것이 가장 필요하다꼬 하는 거라. 니는 그기 좋나 까잉께 그기 좋다 그래. 너는 그거 꼭 배와야 되겠나 카잉케 배와야 된대.
    그라면 나도 와 배우노 카잉께 엄마고 아들이니까 똑같이 하재. 내가 그거 배우면 참 좋겠나 하이께 나는 엄마가 그거 배우면 마 너무 너무 너무 좋겠대. 막 꼬셔댔던 거라.
    나는 아들이 기뻐하는 걸 참 좋아하고 아들은 내가 기뻐하는 걸 좋아했다고. 마음이 너무 잘 통하니까, 너무 잘. ··· 아들이 그걸 같이 배우고 싶어 환장을 하니까 내가 엄마로서 기쁘게 좀 해줄라꼬 근로기준법 공부도 했는기라”
    – 김경태. 1995. ‘영원한 노동자’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태일아, 내 가슴 속에 사는 태일아”, 『우리교육』11월. 59쪽

    동네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던 모자의 저녁 풍경은 노동운동가 이소선의 근로기준법 입문의 순간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

    이소선 어머니 보내는 길에 유가족 대표인 전태삼씨는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흐느꼈다고 한다. “어머니… 어머니… 엄마…”

    그렇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소선은 노동자의 어머니지만 누군가의 엄마이기도 한 것이다. 이소선의 위대함은 어머니와 엄마를 오가며 투쟁의 현장에서 여성의 역사를 온 몸으로 써내려간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소선을 ‘어머니’로 부르는 것은 노동운동가 이소선의 삶을 가족 은유에 가두는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여전히 사적 관계망에 갇힌 호칭으로 여성을 부르는 것은 여성의 주체성을 폄훼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노동운동가 이소선, 이소선 여사 등 어머니를 대체 할 새로운 명칭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특히 그간 페미니즘 내에서 언니, 이모, 할머니와 같은 가족 내 호칭이 여성에 대한 공적 호칭이 되어가는 것을 제기해 온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를 할머니라고 부르는 것, 돌봄 노동자를 ‘이모’라고 부르는 것 등에 대한 비판 말이다.

    이러한 비판은 공적 영역에서 여성 시민, 여성 주체의 자리를 만들고 그것을 정치화하기 위한 페미니즘의 노력이었다.

    그러나 이 비판이 놓치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어머니’일 수밖에 없는 조건이 만들어 낸 가능성이다. 이소선 ‘어머니’가 어머니였기 때문에 가능한 정치적 힘, 역사적 힘이 있지 않았을까.

    남미의 ‘5월광장 어머니’들도 그러했고, 한국의 유가협, 민가협 어머니들은 그 어떤 민주인사보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이 어머니들은 여성성을 모성으로 제한하고 그 정치적 힘을 축소하고자 하는 흐름에 당당히 맞선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말이다.

    이렇게 볼 때 이소선 어머니를 어머니라 불러온 역사는 오히려 ‘어머니’의 정치, 모성의 정치학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것을 요청한다. 그녀가 어머니로서 일구어 낸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 민주화 운동의 역사, 어머니의 역사, 여성의 역사 말이다.

    덮어 놓고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자고 하는 것은 외려 그 분의 삶을 왜곡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어머니다. 어머니가 걸어온 그 ‘길’에 대한 무수한 의미들을 해석하는 데 있어, ‘어머니’는 핵심이다. 노동운동가로서 뛰어난 자질을 보여준 이소선의 삶을 ‘어머니의 삶’으로 부르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문제는 우리가 갖고 있는 노동운동가의 상(像)에 어머니가 충분하게 들어 있지 못한 것이다. 이소선 어머니의 투쟁은 어머니의 노동운동, 어머니의 민주화 운동이었고, 이것은 한국의 근현대사에 여성이 남긴 굵직한 발자욱이다.

    어머니 영정 앞에서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는 딸들의 반란에서 시작한 페미니즘은 이제 엄마의 삶에서 다시 시작한다. 어머니의 삶은 지금 현재 우리의 삶의 역사적, 사회적 조건의 반영이자 나의 투영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의 역사성이 중요한 이유, 어머니의 역사가 중요한 이유이다.

    2012년 9월 3일 어머니 1주기 제사가 열렸다. 토론회도 열리고, 영화도 상영되고, 모란공원에서 추모식도 거행되었다.

    전태일의 어머니로서만이 아니라 노동운동가 이소선의 삶에 주목하고자 하는 목소리들도 나오기 시작한다. 전태일 열사 분신 항거 이후의 이소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날 이전의 이소선에 대해서도 말하기 시작한다.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의 역사를 어머니의 역사로, 여성의 역사로 쓰는 일은 이제 남겨진 우리 딸들의 아들의 몫이다.

    아마도 오늘도 두 분은 그 곳에서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고 계실지 모르겠다. 아니 이제 어머니가 아들에게 비정규직법을 가르쳐주고 계실게다. 1970년 11월 13일, “엄마, 배고파…” 아들의 그 말 뼈에 묻고 사셨을 어머니, 오늘 저녁은 하얀 쌀밥에 고깃국 앞에 놓고 아들과 못다한 수다 꽃을 피우시길 바란다.

    필자소개
    필자들은 페미니즘 속 세상, 세상 속의 페미니즘이 일으키는 불화를 열광하고, 성찰하는 연구자들이다. 관계와 소통을 본격적으로 통찰하는 매혹적인 학문이자 사상으로서, 농익은 진리 주장에 머물러 있기보다 설익은 질문에 열려있는 페미니즘을 지향한다. 필자들의 관심사는 저마다 다르지만, 생계부터 정치적 안부까지를 함께 걱정하고 토론하는 생활공동체의 화학작용으로 인해, 각자의 사유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 엄혜진(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서울대 여성연구소 객원 연구원) 김원정(서울대 여성연구소 연구원), 윤보라(서울대 여성학협동과정 박사과정), 이선형(서울대 여성연구소 연구원)이 차례로 글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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