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 청소년 역사교류③
    "식민지, 분단, 소수자 인권문제"
        2012년 09월 03일 11:4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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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 청소년 역사교류의 마지막 게재 글이다. 두번째 글은 “평화기원비와 원폭2세 환우”이다. 부산과 고치현 청소년들의 역사 교류 경험을 통해 당위적이고 추상적인 역사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경험하는 역사의 힘을 느끼게 된다.
    교류와 연대는 가장 구체적일 때 가장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더불어 교육이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사람을 성장시키는 무엇을 지칭하는 그 날이 조금이라고 당겨지기를 바란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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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학교를 만나다

    지난 2001년 부산의 역사교사모임에 의뢰가 들어왔다. 일본 시민 단체가 부산을 방문하는데 충렬사(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동래부사 송상현 등을 모신 곳)을 참배하는데 안내를 부탁하였다.

    단체의 이름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을 반성하는 모임’. 이들은 일본의 침략주의가 토요토미의 조선 침략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점에서 시작된다고 인식하고 매년 토요토미의 조선 침략 개시일에 맞추어 집회를 열었다고 한다.

    그리고 2001년에는 부산에서 집회를 열어 일본의 침략주의에 대한 반대, 평화헌법 9조의 수호를 외쳤다.

    이 인연으로 바로 다음해 일본 후쇼샤의 역사교과서 채택 반대 집회에 부산의 역사교사 3명이 초청되어 갔다.

    집회를 마친 다음날 우리를 안내해준 분이 민족학교를 한 번 방문해 보겠냐고 제안을 했다. 역사교사로서 부끄럽지만 그때까지 나는 민족학교가 무엇인지 몰랐다. 단지 재일동포들이 만든 학교이고 민족교육을 하는 곳이라고만 생각했다.

    학교를 잠깐 구경하고 나오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평소에 민족은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하다는 지식은 흐르는 눈물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후 민족학교의 역사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면서 민족학교가 가지는 큰 의미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2004년 1월 처음으로 일본에서 하타 세미나와 교류를 준비하는 단계부터 교류가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민족학교를 방문하는 또 하나의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 있었다.

    민족학교 학생들과 한국 청소년들의 모습

    민족학교는 우리 아이들에게 풍부한 공부 거리를 제공해주는 곳이다.

    가장 먼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의한 식민지의 역사가 있다. 또 해방 이후 남과 북의 분단 문제가 존재한다. 그리고 소수자의 인권 문제가 놓여 있다.

    청소년들은 여행을 준비하면서부터 민족학교 방문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체험하기 시작했다. 민족학교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통일부의 허가가 필요했고, 그 때에는 참가하는 모든 사람의 신원진술서를 작성해야 했다.

    청소년들은 이 과정에서부터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왜 이런걸 쓰고 있어야 되지?….

    이런 과정을 거치며 막상 학교를 방문하면 처음의 어색함과 서먹함이 사라지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민족학교의 학생들과 어울리며 놀며 서로에 대한 친밀도를 급속도로 높여간다. (오히려 어른들이 더 어색하고 힘들어한다.)

    민족학교에서의 교류가 마치고 난 다음 아이들은 자기들이 만난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더욱 커진다. 특별히 교사가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데도 자이니치(재일동포)들을 통해 소수자의 인권 문제를 이야기한다.

    자연스럽게 우리나라의 이주노동자 문제가 이야기 소재로 나오기도 한다. 배움이란, 앎이란 이렇게 이루어진다.

    진지한 모습으로 이런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들을 보는 나는 너무 행복하다. 교사라는 직업이 가지는 장점을 만끽하면서… 아마 이런 경험이 (동료 교사들끼리는 마약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10년을 끌고 온 가장 큰 동력이었을 것이다.

    아래 글은 민족학교를 방문한 후 쓴 한 학생의 보고서 중의 일부이다.

     하타 세미나 친구들과 헤어질 때는 아쉽기는 해도 눈물이 나지는 않았는데, 같은 민족이라 그런지 헤어지려니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우리가 쉽게 만나려면 통일이 되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민족학교에 갈 때, 말 잘 못하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면서 잡혀간다면서 농담처럼 했는데 그런 것들이 다 허무하게 느껴졌다. 민족학교 친구들은 적도 아니고, 남도 아니며, 그냥 같은 민족일 뿐인데 말이다. 북한 땅에 사는 친구들은 이 아이들만큼은 우리랑 말이 잘 통하지는 않겠지… 그래도 희망이 생긴다. 사람들은 우리가 서로 너무 달라져서 통일이 되어도 힘들거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건 너무 모르는 말이다. 우리가 한 시간 반 동안 웃고 떠드는 게 가능했던 것을 보면, 역시 우린 닮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학교가 멀어져서 아이들이 안 보일 때까지 자꾸 손을 흔들었다. ‘다시 만나요-’ ‘잘가요-’ 외치면서 민족학교 친구들과의 만남을 접어야 했다.

    민족학교 방문 다음 날에는 큐슈 지역의 조선인 징용 관련 유적을 답사했다. 큐슈 지역은 석탄 산지로 일본 최대의 제철소라는 야하다 제철소가 있기도 하다. 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탄광에서 일을 했고 목숨을 잃기도 했다.

    우리의 이 일정을 안내해주신 분께서는 ‘무덤으로의 여행’이라고 부른다. 방문한 곳은 크게 두 군데이다. 하나는 ‘오다야마 묘지’이고, 또 하나는 ‘휴우가’ 묘지이다.

    오다야마 묘지의 표지판

    1945년 일본의 패망은 우리에게 해방이었다. 일본으로 끌려온 수 많은 조선인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조금이라도 한반도와 가까운 곳으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고향으로 실어줄 배는 없었다. 사람들은 조그만 어선이라도 구해서 귀국을 하려 하였다. 9월 15일 현해탄에는 태풍이 왔다. 수 많은 시체들이 해안선으로 밀려왔고 이들은 오다야마 공동묘지의 빈터에 집단으로 매장되었다.

    잊혀진 이들의 죽음이 알려진 것은 1970년대. 일본 전역에서 조선인 징용과 관련된 조사단의 발길이 큐슈로 왔을 때이다. 그리고 작은 기념비가 이곳에 세워졌다. 이후 양심적인 일본인과 재일동포들은 매년 9월 이곳에서 작은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휴우가’ 묘지는 작은 동산이다. ‘휴우가’ 집안의 우리로 치면 선산 비슷한 곳인데, 이곳과 가까운 곳에 탄광이 있었다.

    휴우가 묘지의 조선인 무덤

    고된 노동과 학대 속에 목숨을 잃은 조선인은 이곳 묘지에 버려졌고, 이들의 주검이 묻혀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위해 잡석을 올려놓아 무덤이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아이들은 무덤 입구의 이름이 적혀 있는 작은 비석이나 벽돌이 조선인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곳은 집에서 키우는 개나 고양이가 죽으면 만든 무덤들. 그곳에서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조선인의 무덤이 있다. 개나 고양이보다 못한 조선인의 죽음…

    이곳을 안내해주시는 분은 일본인 목사님이다. 이 분은 무덤 앞에서 일제 시대 조선인 징용자의 가혹한 노동을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해주신다. 그리고 진심으로 자신들의 선조가 했던 범죄에 대해 사과를 하신다.

    이 과정에서 있었던 일 하나! 2005년 여행에 참석한 한 명의 남학생이 있었다. 본인은 가기 싫은데 엄마가 가라고 해서 참가한 학생이었다.

    이 친구와 휴우가 묘지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나누었던 이야기. 일본에 오기 전에 자신은 일본인을 굉장히 싫어했다고 했다. 그러다가 하타 세미나의 일본인 친구들을 만나면서 일본인이 좋아졌는데, 오다야마 묘지와 휴우가 묘지를 보면서 다시 일본인에 대한 증오심이 생겼다고 한다. 다시 일본인 목사님의 이야기와 진심어린 사과를 들으며 일본인에 대해 혼란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래 맞다. 너의 그 혼란스러움이 너의 생각을 키울 거라고 이야기를 했다.

    이 묘는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휴우가라는 일족의 가족묘의 한 귀퉁이에 우리가 본 무덤 중 가장 초라한, 그리고 가장 슬픈 무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시 강제 징용으로 끌려 와 탄광 기숙사에 살던 조선인은 죽으면 그냥 내버렸는데 동료가 버려지는 걸 볼 수 없었던 노동자들은 밤에 시체를 몰래 업고 와 묻어주고 돌로 표시를 했다. 함께 끌려와 있는 몸이기에 아무것도 못 해주던 그 슬픔, 컸으면 컸지 작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가족묘의 한 쪽에 위치한 작은 무덤 앞에 이름이 새겨진 벽돌이 비석처럼 서있었다. 그 이름이 새겨진 벽돌의 주인은 개와 고양이. 개와 고양이도 이름이 적혀 묻히는데 존재했다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돌 하나로만 표시되어 무덤인지 아닌지 구분도 잘 안 될 것 같은 그런,,,
    초라한 무덤, 개보다, 고양이보다 더 못한 무덤… 목사님이 그 때 탄광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불렀던 노래라고 하시며 그 가사를 읽어 주셨다. 어머니, 보고 싶어요, 어머니 배고파요, 그 부분에서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평소에 한국에 있을 땐 잘 느끼지 못하던 애국심이 불 타 올랐다. 모두가 국화를 한 송이씩 꽂아주고, 은이가 술을 뿌리는 걸 지켜보면서 울었다. 차로 돌아오면서 인터뷰할 때 기자(?)아저씨가 말한 내용이 생각났다.
    “일본 역사책은 근현대사가 뒤에 아주 조금 끼어있는데 그 마저도 배울 때가 되면 학기가 끝나서 안 보고 지나치게 된다. 한국 고등학생들은 2학년 때 근현대사라는 과목을 따로 배운다니 놀랍다”고 말한, 아저씨의 말이 일본 아이들은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반일 감정을 모른다. 모를 수밖에 없다. 가르쳐 주지도 않는데 어떻게 배우겠는가?
    어쩌면 우리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국사와 도덕 교과서도 나라에서 만드니,,, 남의 나라에 너희 교과서 역사가 왜곡됐다고 주장하지만 어쩌면 우리 국사 교과서도 왜곡된 부분이 있지 않을까,,,,하는, 도덕은 어쩌면 사회 고위층이 바라는 인간상으로 우리를 세뇌시키는 게 아닐까,,,하는 갑자기 씁쓸해졌다.

    학생들의 성장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솔직히 말해서 난 역사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무지했고,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어도 머리로만 받아들였지 가슴으로 느끼지는 못했다. …
    이번 여행에서 내가 얻은 것은 이루 말할 것 없이 크다. 교과서에서의, 그저 말로만 들은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직접 현장을 보면서, 증언을 듣고, 생생한 상황을 전달 받으면서 스스로 느끼는, 진정한 의미의 배움이라는 걸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안타까운 사연을 들으며 가슴 아파했고, 자기 머리로 이러한 문제들을 생각했다. 또한 나를 사로잡고 있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좀 더 넓게 보고 깊이 생각하는 방법을 깨달은 것 같다.
    그리고 단지 그러한 역사적 현실을 아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번 여행의 모토인 ‘평화’라는 말에 걸맞게 서로와의 화합의 가능성도 충분히 체험하고 왔다.
    일본인 친구들과, 재일 교포 친구들. 우리는 싸워야 할 적이 아니며 과거의 문제로 헐뜯고 적대시 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역사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앞으로 그러한 일을 다시 반복하지 않는 것.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줄 수 있는 그러한 따스함을 가지길. 그리고 함께 힘을 합쳐 미래를 이끌어 나갈 주체가 되어가야 할 것이다.

    교육은 인간의 올바른 성장을 돕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여행을 10년 동안 이루어낸 두 나라 교사들의 공통된 인식이기도 하다. 그리고 학생들은 교사의 투입 요소보다 훨씬 더 많은 성장을 이루어낸다. 교사라는 직업을 하는 가장 큰 보람이자 기쁨이다.

    그렇지만 여행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잠시 적응이 되지 않는다. 특히 일본으로 여행을 갔다온 다음은 더욱 그러하다.

    보통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학생들이나 교사나 바로 그 다음날 등교를 해야 한다. 학교의 여름방학 보충 수업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여행 기간이 꿈과 같다. 꿈은 황홀했지만 돌아온 현실은 참담하다. 이게 우리의 교육 현실이다. 교사는 학생들과 씨름을 하고, 학생들은 책과 씨름을 한다.

    교육이라는 이름을 걸고 하는 행위이지만 거기에는 교육의 목표인 인간의 성장이란 극히 미미하다. 이 문제는 많은 사람이 이야기를 하지만 해결이 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교육이 인간을 성장시킬 수 있는 그런 체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필자소개
    부산 동래고등학교 국사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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