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신의 추억 ⑦
    '노풍'은 그렇게 사그러들었다
        2012년 09월 01일 11: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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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풍’하면 2002년의 노풍(盧風)을 떠올리기 쉽지만, 유신시절에도 노풍이 있었으니 바로 통일벼 계통의 벼풍종인 노풍(魯豊)이었다.

    얼마 전 아이들 도시락 검사하던 유신 시절 이야기도 했지만, 유신 시대는 생산에서 소비까지 국민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통제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박정희 정권의 ‘식량자급’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벼농사에 대한 통제는 대단했다. ‘식량자급’이라는 그럴 듯한 목표는 실은 공업 분야에 저임금 노동력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저곡가정책의 멋있는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유신벼니 통일벼니 하는 신품종을 개발하여 농가에 보급하는 것까지야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마는 지역별로 재배 목표 면적을 확보하기 위해 면서기까지 동원하여 해코지도 서슴지 않는 모습은 유신의 광기 그 자체였다.

    당시 아버지를 비롯한 농민들은 유신벼나 통일벼를 그리 선호하지 않았다. 유신벼나 통일벼는 수확량이야 많았지만, 밥맛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값도 쌌기 때문에 시장에서 호응이 별로였다. 당연히 기피할 수밖에.

    통일벼 시범단지의 모내기 장면

    그러나 유신정권에게는 농민도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나 식량자급이라는 ‘우리 민족의 목표’ 실현에 앞장서야하는 ‘국민’의 일부일 뿐이었다.

    파종을 앞둔 시점이면 면서기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2인 1조로 해서 동네별로 돌아다니면서 집집마다 볍씨 준비현황을 지도․점검하였고, 그 과정에서 유신벼나 통일벼가 아닌 아끼바리나 밀양 15호 같은 일반 품종 볍씨를 담궈놓은 경우는 볍씨통을 엎어버리거나, 그 곳에 통일벼 볍씨를 마음대로 섞어버려 파종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하다’고 했던가. 마침내 78년에 들어서 이른바 ‘노풍 피해’가 전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면서 박정희 유신정권의 식량증산계획은 큰 차질을 빚게 된다.

    노풍은 통일벼 계통의 개량형 벼품종이었다. 오직 식량증산에 눈이 멀어 있던 유신정권은 78년도에 검증 과정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이 신품종을 농가에 강제적으로 그것도 대대적으로 보급했고, 그해 여름 노풍 재배 농가는 대규모의 병충해 피해로 ‘멘붕’ 상태에 빠지게 된다.

    아버지는 무슨 선견지명이 있으셨는지 그해 노풍을 전혀 심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집은 몸 고생 마음 고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전국은 ‘노풍 피해’로 들끓었다. 마침 그해 대선과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기 때문에 정치권도 피해 진상조사와 피해보상대책 문제로 시끄러웠다.

    당시 함께 등교하던 내 친구 집은 노풍 피해가 대단했었는데, “걱정할 것 없어. 정부가 다 보상해준다는데~”라며 애써 자위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해 선거에서 대선이야 박정희 밖에 출마할 수 없었으니 그렇다 쳐도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이 사실상의 승리를 이끌게 되었던 데는 이 노풍 피해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노풍 피해 대책으로 각종 보상책이 나왔는데, 당시 중학교에 진학했던 우리와도 관련된 항목도 있었으니 피해농가 학생의 수업료 면제 조치가 그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실효성있는 보상이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신문을 보면 전북 부안에서는 ‘공무원이 피해농가 지원용 식량을 빼돌려 놀음으로 다 탕진한 것이 발각되었다’는 기사도 나오고, ‘피해농가에 대한 지원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아 농민들의 원성이 대단하다’는 기사도 나오는 걸로 봐서 이 ‘노풍’은 이듬해인 79년까지 지속되었던 모양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노풍 피해사건 이후 정부는 더 이상 통일벼 강제보급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유신의 몰락은 이때 이미 예고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필자소개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장, 진보신당 동작당협 위원장을 역임했고, 현재 친구였던 고 박종철 열사의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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