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시즘 가능성 높지 않다
        2008년 10월 06일 09:0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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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석훈의 한국경제 대안시리즈 네 번째 책이자 완결인 『괴물의 탄생』은 우석훈의 눈으로 살펴 풀어 쓴 경제학사이다. 우석훈은 토마스 홉스, 애덤 스미스로부터 시작하여 이명박 정부 경제관료들까지를 칭찬하거나 통박한다.

       
     

    1부는 세계경제고, 2부는 한국 자본주의고, 3부는 대안인데, 그 각각의 사회경제 상황을 설명하며 이런저런 학파나 유명한 경제학자들이 어떤 학설을 펼쳤는지 소개하고 자신의 비평과 주장을 곁들인다.

    우석훈이 좋아하는 경제학자들

    ‘경제학자’라는 초점으로 이 책을 읽어보면 우석훈이 좋아하는 외국 경제학자는 하이에크와 폴 로머이고, 주목하는 한국 경제학자는 백남운과 장하준이다.

    “하이에크의 매력적이면서도 교양 넘치는 책들을 직접 읽어보시면, 지금 한국의 ‘잃어버린 10년’을 주장하는 이명박 대통령과 그 주위에서 ‘747 경제’를 주창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유쾌하지 않고 황당하면서도 잔인한 민족패권론자인지 좀 이해가 가실 겁니다.

    … 그에게는 보편주의와 휴머니즘이 가득합니다. 최소한 하이에크만 제대로 읽어도 3~5%의 사람들만을 위하는 한심한 경제 비전을 제시하고, 또 그걸 강행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나는 로머의 논문들 몇 개에 남겨진 흔적을 내 나름대로 해석하는 걸로 박사가 된 셈이다. … 로머와 나는 학자로서 가는 길이 전혀 다르고, 나는 그보다는 생물학적인 패러다임과 진화 현상과 시스템 이론 쪽으로 더 많이 이동했다.

    … 그러나 시리즈 첫째권의 작업이 어느 정도 완결되어갈 즈음, 로머에게 배운 것들이 나에게서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에너지와 자원은 덜 쓰고, 지식과 문화는 더 많은 국민경제’, 그야말로 로머의 출발 지점과 전혀 다르지 않는 결론이 아닌가?”

    외국이론이나 소개하는 조순, 정운찬

    우석훈이 백남운과 장하준을 꼽는 이유는 하이에크나 로머처럼 호오(好惡)의 관점 때문이 아니라, 자기 이론 없이 외국 이론을 그저 소개하고 적용할 뿐인 조순이나 정운찬, 이한구 같은 한국 경제학자들과 대비되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한국 경제 위기 온다’는 주장은, 백남운이나 장하준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 공부하지 않는 ‘무식한 극우’ 탓에 크게 기댄다.

    “이 시점에서 지금 한국의 우파 혹은 극우파들 역시도 경제적 돌파구를 찾아내기 위한 진지한 논의들이 있어야 할 텐데, 실제로 그런 논의를 하고 고민을 하는 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

    … 이렇게 3~4년 더 소모적인 논쟁을 하다가 결국 국민경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공황을 만나게 되리란 게 지금 우리를 음산하게 기다리는 운명이 아닐까 싶다.”

    『괴물의 탄생』은 우석훈의 다른 글들처럼 교양이 넘쳐나고, 도전적 문제의식으로 번뜩인다. 그리고,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가 적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드물지 않고, 스스로 던진 화두가 그의 산만함 속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논거 부족, 화두의 실종

    아래는 『괴물의 탄생』에서 우석훈이 펼친 주장에 대한 의견이나 질문이다. 우석훈이 당장 보충 설명을 해주어도 좋겠고, 지금 어렵다면 나중에라도 공부하여 알려주길 바라고, 우석훈 아닌 어느 누구라도 『괴물의 탄생』을 읽으며 잠시 생각해보길 바란다.

    가장 먼저, 우석훈판 경제 위기론의 전제 중 하나인 이명박 정권이 극우파라는 진단. 한국 우익의 역사적 근원이 좌익과의 격렬한 전쟁을 통해 형성되었고, 그 이후의 태도 역시 극우 반공이었고, 근래에는 극우 경제론을 수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말 정치’가 아닌 구체 정책들이 남미나 동남아의 우익들과 많이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인도네시아 수카르노나 이집트 나세르와는 또 무엇이 다를까? 가장 최신의 우익인 이명박 정부에서조차도 제3세계의 매판 우익들과는 달리 국가주의와 인민주의 전통이 잔존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극우’라는 진단으로 인해 현실 정치경제학에서의 섬세함을 잃는 것은 아닐까?

    다음, 한국 경제시스템을 ‘건설 파시즘’으로 읽는 문제. “한국 자본주의의 대부분을 사실상 장악한 건설 파시즘이고, 그 수장은 현재 이명박이지만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교체될 수 있으며, 그 실체는 해체의 과정을 겪기 전까지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건설 파시즘’이란 독해의 위험성

    우석훈이 비판하는 지방 토호들의 성격, 그리고 생태운동의 대립자로서 ‘건설’을 반정립하는 것은 타당하지만, 한국 자본주의의 현 단계 또는 국면을 ‘건설족’ 정도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을까? 1980년대까지만 해도 건설-부동산이 유한계층의 불로소득원이나 비생산적 투기행위로 치부되었던 데 비해 지금에 이르러 어지간한 소득 가진 사람들의 ‘재테크’인 데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지금 한국의 건설-부동산 붐 양상은 지자체와 토건족이 주도했던 일본의 버블보다는 외환위기 전 영국이나 스웨덴, 현재의 미국처럼 금융자본의 움직임에 철저히 연동돼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명박의 대운하 역시 ‘건설’이라는 사업 부문의 문제가 아니라, 거대 자본의 투자와 운용이라는 본질에 따라 언제든지 부문 변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셋째, 경제 위기 문제. 책 곳곳에서 약간씩 다르게 서술되고 있지만, 우석훈은 이명박 정권 말기나 다음 정권 초기에 1980년이나 1998년 같은 공황이 올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는데, 논거가 많이 부족하다. “많은 사람들이 … 다음번 공황은 조금 앞당겨질 거라고 예측하는 편이다”라는 설명은 너무 불친절하다.

    1980년은 중화학공업으로의, 1998년은 정보통신산업과 신자유주의 금융으로의 이행 과정이었는데, 그렇다면 다음 공황은 어떤 것으로의 이행에서 생겨나는 것인지? 주기적 순환을 넘어 1980년과 1998년과 같이 거대한 사회 변동을 불러올 ‘공황 에너지’는 무엇인지?

    넷째. 파시즘 문제. “한국에서의 파시즘은 ‘건설자본 + 성장주의’라는 두 가지 축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여러 가지 대안에 대한 사회적 논의들을 억압하고, 정치 지도자와 2~3% 정도의 경제 엘리트가 나머지 국민들을 끌고 가는 상황 정도”라면 굳이 ‘파시즘 온다’고 질겁할 일도 없겠지만, 어쨌거나 책 곳곳에서 비감한 비관을 내비치고 있으므로 그 가능성을 짚어 보자.

    파시즘 가능성이 크지 않은 이유

    파시즘이 되려면 정치적 극단으로 치우칠 만한 경제적 위기와 파시즘을 추진할 사회 계층, 정치세력이 있어야 한다. 경제 위기 문제는 잘 모르겠지만, 계급 계층 문제에서는 파시즘화의 가능성이 크지 않다.

    비정규직과 영세자영업자 같은 중하위 근로계층의 곤궁이야 폭발 직전이고 그들이 좌익을 경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국 사회의 지배자인 대자본은 지금 방식으로도 충분히 지배 지속 가능하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일당독재’의 가능성이야 높지만, 그것은 파시즘이 아니라 한국판 자민당 시대의 개막이지 않을까?

    또, 파시즘은 우익을 위협하는 좌익의 도전 또는 실험이 좌절된 데 이은 반동일 텐데, 그런 위협과 실패가 전혀 실재한 바 없으므로 한국 우익에게는 파시즘이라는 반동의 유혹도 크지 않다. 무엇보다도 파시즘은 권익 유보를 상쇄할 만한 국가주의적 목표에 대한 ‘국민적 합의’인데, 그게 과연 무엇일까?

    다섯째, 우석훈이 대안모델로 제시하는 스위스는 많이 흥미롭고 베껴올 게 많을 듯싶다. 나는, 한국이 지나치게 중앙집중적이므로 분산자치적인 스위스에서 영감을 얻어야 한다는 우석훈의 주장을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석훈이 스위스의 고졸자 마에스트로 시스템을 거론할 때 조금 멈칫거리게 된다.

    섬유산업에서 곧장 거대 장치산업과 정보통신산업으로 넘어간 한국을 보고 있자면,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고숙련 노동자를 실업자로 내모는 현황을 보면 왜 한국에 정밀가공 기계산업이 없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만, 이런 건 1970년대의 ‘Made in West Germany’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김나지움-마에스트로에 힘입어 세계 최대 수출국이었던 독일이 지금은 한국 대학보다도 경쟁력이 뒤진다든가, 그래서 스웨덴이나 핀란드만 못하다는 일각의 진단도 그저 무시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제3섹터를 바라보는 다른 시각들

    우석훈이 들고 있는 스위스의 상품 이름들 – 에망탈 치즈, 골드문트, 스마트카 같은 것들이 또 한 번 멈칫하게 한다. 이런 고부가가치 명품들은 사실 스위스보다는 북부 이탈리아가 더 본산이라 할 텐데, ‘좋은’ 스위스와 ‘나쁜’ 이탈리아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고부가치 산업이 먹여 살릴 수 있는 경제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끝으로, 제3부문. 공공부문이나 시장부문의 크거나 작음보다는 제3부문의 과소(寡少) 지표가 더 현격한 한국 경제의 특징이므로, 우석훈의 주장처럼 그 방향에서 여러 활로가 찾아질 것은 분명하다. 다만, 우석훈이 들고 있는 유럽 선진 나라들의 제3부문이 어떤 사회문화적 전통에서 확립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 같다.

    ‘사회적 기업’ 육성사업을 펴는 노동부나 ‘제3섹터’를 주창하는 시민단체들은 제3부문을 ‘좋은 일’ 정도로 오해하거나 오해하도록 하며 ‘계도’하고 있는데,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 제3부문은 그런 작위적 노력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국민국가 자본주의에 흡수되지 않은 전자본주의 또는 비자본주의적 커뮤니티의 경제활동으로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다.

    극도의 연방주의-꼼뮨주의를 취하고 있는 스위스나 아직도 분리독립의 꿈을 접지 않고 있는 바스크, 막부에 대항하는 영주-자민당에 대항하는 공산당 지자체의 일본에서 제3부문이 흥하고 있는 사실이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한국 사회의 특수한 제3부문은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가? 두레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여성들 사이에서는 세대를 초월하여 지속되고 있는 부조 조직 계(契)는 무엇인가? 왜, 생협은 도시지식중산층의 전유물로 치부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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