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고사→학교줄세우기→평준화 붕괴
        2008년 10월 02일 09: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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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찍이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공자님께서 말씀하셨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배우고 때때로 일제고사 보면 또한 죽음 아니겠는가(學而時‘学テ’之 不亦死乎)’라고 바꿔야 할 것 같다.

    10월 8일의 초3 일제고사, 14일과 15일의 초6/중3/고1 일제고사가 코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번 시험은 한국교육사에 길이 남을 이명박 정부의 업적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중앙정부가 직접 깃발을 꽂은 까닭에, 앞으로는 틈만 나면 만나게 된다. 예컨대, 이번에 시험을 보는 초등학교 3학년은 5개월만 기다리면 ‘진단평가’라는 이름의 일제고사와 또 마주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올 3월의 시험은 초 4~6학년이 치르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제부터는 공자님의 말씀을 ‘배우고 때때로 일제고사 보면 또한 죽음 아니겠는가(學而時‘学テ’之 不亦死乎)’로 고쳐야 한다. 보다 정확하게는 ‘공자 曰’ 또한 ‘명박 曰’로 바꿔야 한다.

       
      ▲만평=이창우
     

    일본은 2007년, 명박은 2008년 일제고사 시작

    ‘学テ’는 일본어다. 전국학력테스트를 줄여 부르는 용어다. 1956년부터 일본은 일제고사를 봤다. 하지만 경쟁이 과열되는 부작용이 나타나자 1966년에 중단했다. 부정적인 여론도 한 몫 했지만, 일제고사 반대 투쟁으로 구속된 수십 명의 교사들 때문이기도 했다.

    그랬던 일본이 작년 2007년에 일제고사를 부활시켰다. 43년 만의 쾌거였다. 학력이 떨어지고 있으니 끌어올려야 한다는 여론, 일본 사회의 전반적인 보수화, 신자유주의가 손잡은 결과였다. 물론 지역 차원의 일제고사가 그동안 조금씩 있어왔다. 그러나 2007년에는 문부과학성이 몸소 움직였다.

    그리고 2008년 지금 이명박 정부는 중앙정부 차원의 일제고사를 시작한다. 교육청 차원은 있어왔지만, 이번에는 교육과학기술부가 직접 나선다. 이웃사촌끼리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는 형국이다.

    덕분에 비슷한 일들도 발견된다. 2006년 도쿄도의 한 초등학교는 지역 1위의 영예를 안았는데, 나중에 정서장애가 있는 학생 9명의 채점을 하지 않은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나라는 올 3월의 교육청 연합 일제고사에서 경기도의 한 중학교가 운동부와 특수학급 학생 11명을 제외시켰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선생님들에게 이런 메신저가 왔다.

    “운동부와 도움반 학생들은 시험을 봤다 하더라도 재적수에서 빼주시고, 답안지도 걷은 후 알아서 폐기 부탁드려요….(학교 평균을 높이기 위한….)”

    일제고사, 배치표 만들기 대작전

    코앞의 일제고사에 대해 일반적인 시험처럼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시험 때문에 공부를 더 하지 않겠는가”, “동기유발의 효과가 있다”, “예전에도 그랬는데, 왜들 그러냐” 등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시험의 부작용이나 참교육이 반박 논리로 이야기된다.

    하지만 이번 이명박 대통령의 일제고사에는 다른 향기도 있다. 그동안 의례히 치렀던 시험이나 지역 차원 일제고사와 구분되는 면이 있는 것이다. 교육정보 공개와 학교선택제가 양 옆으로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교육이 본 궤도에 올라, 초중고등학교 상품을 고르는 시장이 섰다고 가정하자. 뭘 가지고 선택할까. 학교건물 한 번 보거나 교사 만나 본 다음에 고를까. 주변의 평판을 믿을까. 웬지 미덥지 못하다. 교육이란 밖에서 볼 때와 안에서 직접 보는 거랑 차이가 많은 상품이기 때문이다.

    어떤 학원이 좋아 보여 아이를 보냈는데, 막상 후회한 경험들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뭔가 객관적인 자료가 있으면 좋겠다.

    그걸 일제고사가 제공해준다. 중앙정부가 전국 모든 학교의 시험 성적을 알려주면 그만한 자료가 없다. 마치 대학 입학원서 작성할 때 학원가에서 만들어주는 배치표와 같다. 아니, 학원이 아니라 정부가 직접 하니 더 믿음직스럽다.

    다음은 뻔하다. 지금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반복된다. 배치표의 맨 위에 놓여있는 학교로 너도나도 몰린다. 그 학교로 가기 위한 발버둥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사교육비도 점차 늘어난다. 동시에 ‘아빠의 경제력과 엄마의 정보력’이 많은 집 아이가 점차 이긴다.

    반대로 배치표 하단의 학교는 인기가 없다. 밀리고 밀린 아이만 가거나 학교가 학생을 모셔오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을 해야 한다. 또는 영국과 미국처럼 정부가 아예 퇴출시킨다.

    배치표 하나면 만사형통이다. 교원평가도 필요없다. 지금도 대학에서는 강의평가나 교수 업적평가를 하고 있지만, 그것보다 서울대 교수냐 지방대 교수냐가 더 중요하다. 같이 공부하고 함께 유학을 갔다 오고 실력이 출중해도 어느 대학 교수인지로 판가름난다.

    배치표 하나면 된다. 시험점수가 높은 학교의 학생들은 성격도 좋고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장차 좋은 대학에 진학하여 이 나라를 이끌어갈 동량이 될 아이들이다. 점수가 낮은 학교는 인생의 패배자와 낙오자들만 모여 있는 곳이다. 모든 아이들의 특성, 적성, 잠재력을 시험 점수 단 하나로 판가름난다.

    시험 치르는 학생은 배치표의 도구이자 재료

    그럼, 당장 일제고사를 보는 학생은 뭘까. 배치표를 만들기 위한 재료다. 시험이 동기를 유발해서 공부를 좀 더 잘 할 것이라는 믿음은 나중 일이다. 지금 시험치르는 학생은 배치표의 보다 높은 곳에 학교 이름을 올리기 위한 도구다. 메뉴판에 멋들어지게 올리기 위한 싱싱한 재료인 셈이다.

    그러니 재료는 재료답게 다듬어야 한다. 시험 점수를 위해 더 몰아세워야 하고, 상한 재료는 갖다 버려야 한다. 저소득층, 장애인, 한 부모, 이주민, 노동자, 농민의 자녀들부터 ‘상한 재료’로 분류된다. 공부 못 하는 학생이나 운동부 학생도 ‘평균을 까먹는, 인간이 덜 된 것들’이 된다.

    선진국이라는 국가의 사례도 유사하다. “영국과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도 일제고사를 보니, 우리도 볼 수 있는 것 아니냐”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 분들을 위해 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닉 데이비스의 <위기의 학교>를 선물하는 것도 좋겠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파탄’으로 보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다른 길의 모색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여전히 토건국가와 신자유주의를 신봉한다.

    그렇게 교육도 이끌고 간다. 신자유주의자와 신자유주의자로 위장한 계층이기주의자가 뭉쳐 학교 교육을 더 나쁜 방향으로 인도한다. 덕분에 학생과 학부모만 더 피곤해진다.

    “전국에서 시험을 봐서 등수 매긴다는 자체가 마음에 안들고 못하는 애들은 얼마나 상처를 받고 부모님들께 혼나는지 어른들은 모른다. 이거 하나 못 봤다고 엄마한테 아빠한테 조낸 쳐맞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나 이러는건지…

    — 이봐 요즘 학생들이 얼마나 불쌍한지 알아? — 요즘 애들 학교-학원-숙제야. 하루 종일 공부에 썩어가며 살고 있다고 알겠냐? 아무리 공부잘하면 뭐하니 행복하지 못한데.” (지난 3월 일제고사를 치른 어느 중 1 학생)

    시대착오적인 위정자가 내리는 은총 때문이다. 이런 정부의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 ‘學而時‘学テ’之 不亦死乎’라는 이야기까지 새겨들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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