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고립을 넘어 기쁨으로
    2008년 09월 30일 04:08 오후

Print Friendly

오지 않을 것 같았던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혹독했던 무더위는 자취를 감추고 창문을 열면 어느새 피부를 감싸는 이 신선하고도 새로운 공기에 살짝 마음이 설레는 계절, 가을이다. 일 년 중 가장 좋아하는 이즈음의 날씨를 접할 때면, 단지 날씨 하나만으로 마음은 행복감에 젖어든다. 외로움도 멋이 된다. 

   
  ▲ 필자
 

가을의 신선한 공기는 지난 가을의 추억과 기억들을 실어 나르기도 하지만, 올 가을은 내게 있어 가장 잊기 힘든 가을이 될 것 같다.

엄마라면 누구나 그렇듯 출산의 경험은 삶에서 언제나 어제 일어났던 일처럼 가장 또렷한 기억을 남기기 마련이다. 나는 이제 출산, 그 엄청난 사건 속으로 가슴을 졸이며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는 중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임신 10개월의 기간은 태아의 발달과 함께 ‘엄마 되기’로서의 자신을 되풀이해서 돌아보게 하는 준비기간이다.

엄마 … 한 생명에게 절대적인 의지처와 피난처가 된다는 것. 마음의 따뜻한 고향이 되고 삶의 방식과 가치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된다는 것.

나의 엄마는 지혜롭고, 용기가 넘치며, 어떤 어려운 상황도 인내하고 당차게 싸워 온 분이다.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엄마가 내 뒤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늘 마음이 든든했다. 엄마는 내게 처음부터 그러했던 존재로 당연하게 인식돼 왔다. 이제 나는 ‘엄마’라는 칭호를 내 앞에 두고 엄마를 다시 생각한다.

이기적인 시선의 확장, 나 아닌 나

배 위에 굵게 그어진 임신선처럼 아기는 내 안에서 균열을 일으키며 알을 깨고 나오려 한다. 그동안 온통 내게만 쏠려있었던 지독히도 이기적이었던 시선은 서서히 내 안의 타자, 나와 온전히 운명을 같이 하는 나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독립적인 또 다른 한 존재로 확장해가고 있다.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모성(母性)을 몸의 변화와 함께 나는 배워가는 중이다.

그리고 가끔 나는 생각한다. 생명의 탄생이라는 이 놀라운 사건에 왜 남자는 배제되었을까. 내 몸의 변화를 지켜만 봐야하는 남편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억울함마저 들 때가 있다. 신이 있어서 인간을 창조했다면 신이 남성이 아니라면 (신은 중성이어야 하지 않을까?), 신의 큰 오류 또는 실수 가운데 하나는 오로지 여자에게만 임신과 출산, 육아(모유 수유)의 기능을 신체에 부여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만약 남성이 여성만이 고유하게 갖고 있는 출산 과정의 기능을 일부만이라도 공유했더라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평등하고 평화롭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손으로 감히 쉽게 총을 쥐지는 못할 것이며, 생리와 출산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남자가 경험한다면 여성정책이 지금처럼 나라 정책의 후순위에도 끼지 못하는 지경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은 신을 탓하기에 앞서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동안 나조차도 출산과 육아의 문제를 한 가정의 울타리에서 벌어지는 문제로 한 발 치 멀리서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나 또한 직장인들이 한창 열을 올리며 일할 오후시간에 한가로이 유모차를 끌고 골목을 배회하는 여성들을 보면서 생산성과 효율성의 시각으로 그들을 안타깝게 바라보아왔다. ‘아이 때문에 일도 하지 못한 채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남편만 쓸쓸하게 바라보는 처지’라며 그들을 마치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 마냥 봐왔던 것이 사실이다.

말로는 육아의 공공성을 떠들었을지 몰라도 그것을 바로 ‘나의 문제’로 실감하는 수준은 되지 못했다. 육아를 오로지 아기를 낳은 여성에게만 전가시켜 버리는 우리 사회의 무관심을 넘어선 무시에 가까운 공모에 나 또한 길들여 있었다.

‘좋은 엄마’와 육아스트레스

경제활동 능력이 가장 왕성한 30대에 남성은 사회적 기반을 굳히기 위해 열심히 일에 몰두하지만, 여성은 임신과 출산, 육아 때문에 직장생활과의 단절을 고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똑같이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했지만 출산의 가치조차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여성은 경제 영역, 공적 영역에서 무능력자, 목소리 없는 그림자 취급을 받고 있다.

그러면서 사회는 ‘좋은 엄마’ 이미지에 부합되도록 여성들을 계속해서 부추긴다. 일과 경제적 독립을 갈구하는 엄마들을 마치 모성이 부족한 엄마처럼 여겨지게 만들고 여성의 관심을 오로지 가정과 아이에게만 묶어두려 한다. 인간은 누구나 성에 관계없이 성취 욕구와 정서 욕구를 동시에 갖고 있다. 남성에게는 성취욕구만을, 여성에게는 정서욕구만을 강요한다면 남녀 모두 어딘가 결핍된, 불균형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전통사회에서 육아는 가족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몫이었다. 부모님이 밭에 일을 나가면 아기는 할아버지나 할머니 무릎에 누워 잠을 잤고, 학교에서 돌아온 삼촌은 조카를 안고 마을 한 바퀴를 돌며 놀러 다니기도 했을 것이다.

우리 시대에 육아는 그러나 철저한 ‘고립’ 그 자체다. 벽으로 칸칸마다 구획되고, 한 발짝만 잘못 딛게 되면 낭떠러지가 되고 마는 아파트에서 엄마는 하루 종일 만나는 사람 없이 아기만 바라보며 지내야 한다.

대화를 나누거나 육아를 하면서 부딪치는 고민을 함께 나눌 상대도 없이 홀로 육아의 짐을 떠안는다. 직장에서 생존경쟁에 내몰린 남편은 야근을 밥 먹듯이 하거나, 일찍 돌아온 날에는 아기를 돌볼 틈도 없이 잠에 곯아떨어지기 일쑤인 풍경이 우리의 일상화면이 되어 있지는 않는지.

EBS ’60분 부모‘라는 프로그램에서 김수연 아동발달클리닉 소장은 “직장에서 능력을 높이 인정받을수록, 사회적 성공 욕구가 강한 여성일수록 양육스트레스는 매우 높게 나타난다”고 말했다.

여성의 고학력과 사회적 진출이 늘어남에 따라 직장과 사회에서 능력을 인정받다가, 누구도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고 보상도 뒤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쉽게 폄하하는 말로) ‘애나 보는 여자’로 전락했을 때 느끼게 되는 단절감, 고립감, 무력감이 육아스트레스의 시작이다. 앞으로 펼치고 싶은 꿈을 아기로 인해 포기하거나 접어야만 했다면 그 좌절감은 배가 될 것이다.

육아스트레스를 겪는 상당수의 여성들은 심각한 우울증까지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출의 자유는커녕 ‘24시간 입주 상시대기’ 엄마들의 우울한 초상이다. 여성들은 하지만 육아스트레스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엄마로서의 자질 탓으로 자신을 자책하고 만다.

“남편은 날마다 12시가 넘어서 들어옵니다. 마음속으론 매일 귀한 애들이니 귀하게 키우자고 아침마다 다짐, 또 다짐 하지만 오후쯤 되면 내 인내심은 바닥이 납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도 새벽 2시입니다. 오늘은 아기가 새벽 1시 반에 잠들었습니다.

… 이러다가 제가 돌아버릴 것만 같습니다. 여자로써 인생은 끝나고 오직 애들 엄마와 남편의 파출부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 미칠 것만 같은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길을 없을까요? 저를 엄마자격도 없는 미친 여자라고 비난하지 말아주세요. 여기서라도 마음을 달래고 싶습니다.” (네이버 지식iN 한 네티즌)

따뜻하고 포근하며 사랑이 넘치는 곳일 것이라고 여겼던 집이 여성에게는 스트레스를 안겨주는 고립된 무인도와 같은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최근 나는 진보신당 고양시협의회의 여성당원 모임에서 “내 30대 돌리도”라며 한숨을 지으면 말하는 당원을 만났다. “가장 사회적 진출 욕구가 강한 30대에 아이 때문에 집에 갇혀 우울하게 보냈다”며 돌아올 수 없는 30대를 40대가 되어버린 현재의 여성은 아쉬워했다.

아기와 함께 꿈꾸는 새로운 사회

육아는 여성이 스트레스를 받고, 자신의 자존감을 훼손당하면서까지 감당해야 할 짐이 결코 아니다. 육아는 아기의 살냄새를 맡으며 사랑을 주고받는, 인간이 원초적으로 누리고 지켜야할 소중하고 신성한 돌봄 노동이다. 가족 구성원 중 여성에게만 ‘집단의 복지’라는 이름으로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해서는 안 된다.

엄마가 육아스트레스를 겪는다면 아이에게도 그 스트레스가 고스란히 전달된다고 한다. 심리적으로 불안하고 신경질을 내는 엄마에게서 건강한 아이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우리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건강하려면 엄마가 건강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육아는 우리 사회 공동체의 임무다. 미국의 사회학자 호치쉴드(hochschild)는 육아, 부모 부양과 같은 돌봄 노동을 사회가 어떻게 가정에 배분하는지에 따라 4가지 이념형적인 문화로 나누었다. 그는 가정에서 전업주부가 모든 것을 도맡아 하는 문화를 ‘전통적 모형’(traditonal model)으로, 취업주부가 다른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유급노동과 가족 돌봄을 동시에 수행하는 문화를 ‘후기 현대적 모형’(post modern model)으로 정의했다.

또 일년 내내 자녀는 보육시설에 노부모는 요양원에서 상업화된 돌봄을 받고 가족의 돌봄 공유가 전혀 없는 문화를 ‘냉혹한 현대모형’(cold modern model), 아동과 노인을 위한 사회화된 서비스를 일부 이용하면서 남녀가 동시에 사적인 돌봄을 동등하게 공유하는 문화를 ‘따뜻한 현대모형'(warm modern model)으로 분류했다.

아마 우리 사회는 ‘전통적 모형’과 ‘후기 현대적 모형’, ‘냉혹한 현대 모형’들이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며 횡행하는 살벌한 문화에 살고 있는 것으로 분류될 것이다.

호치쉴드는 ‘따뜻한 현대모형’을 “돌봄이 삶의 핵심적인 부분이자 중요한 노동으로 인정되어 가족의 돌봄 기능이 살아있고 유대가 지켜지는 모형”이라고 설명하면서, 북유럽의 복지국가가 따뜻한 현대모형을 지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극단적인 개인주의 문화가 팽배해 있는 미국과 달리 북유럽은 가족 내의 공유, 직장의 변화와 노동시간 조정, 돌봄에 대한 가치 부여 등이 ’따뜻한 가치모형‘으로 구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꿈꾼다. 엄마들이 일(노동)과 가정(육아)의 양립을 균형 있게 충족하여 육아가 삶을 풍요롭게 일구는 기쁨이 되는 사회를. 여성의 다양한 욕구에 맞춰 일과 노동시간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 공보육이 확립되어 ‘육아스트레스’라는 해괴한 말이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 날을.

아기는 내게 새로운 꿈을 실어다 준다. 곧 태어날 아기와 함께 꿈꿀 새로운 삶과 사회를 향한 상상이 즐겁다.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