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조, 민영화 괴물 못막으면 위기
        2008년 09월 17일 01:02 오후

    Print Friendly

       
      ▲ 지난 5월 청계광장에 모인 촛불집회 참가자들 (사진=손기영 기자)
     

    나는 지난 5월 2일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미 50에 가까운 내 눈에 ‘아가’로 보일 수 밖에 없는 앳된 소녀들이 목에 팻말을 매고 나왔다. “나 이제 15살, 살고 싶어요”, 또 다른 아이의 팻말, “나 이제 15살, 사랑도 하고 아기도 낳고 싶어요”.

    우리가 무엇을 했길래, 알지 못하는 미래에 대한 설레임에 벅차해야 할 아이들이 벌써 자신의 목숨을 걱정하게 되었는가? 이 움직임은 곧 유모차 어머니들의 행진, 그리고 주부들의 광범한 참여로 이어졌다. 어떤 이는 이런 움직임을 자신과 아이들의 목숨만을 생각하는 중산층의 이기적 행위로 치부했다.

    예컨대 비정규직에 대한 무관심을 이들은 질타했다.(그러나 기륭노동자의 투쟁이 촛불과 결합하는 과정은 이에 대한 소극적이지만 훌륭한 반박이 될 것이다)

    직접적 계기가 된 광우병에 대한 공포는 어느 덧 시장만능의 세계가 우리들의, 특히 아이들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다는 각성으로 이어졌다. 의료민영화나 교육시장화, 공기업 민영화와 한반도 대운하에 대한 비판이 비온 뒤 죽순처럼 솟아올랐다. 촛불은 아이의 생명에서 시작해서 사회의 생명, 자연의 생명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공공성 파괴에 대한 광범한 우려로 타올랐다.

    참여정부 때 ‘노무현 정권타도’라는 구호는 2006년 봄, 한미 FTA를 추진한 뒤에야 조심스럽게 나오기 시작했지만 이명박 정부는 정권이 시작된 지 불과 1개월 만에 앳된 아이들의 입에서조차 자연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모든 생명을 시장에 맡기자는 공공성 파괴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의 토건형 신자유주의

    2007년 말, 우리 국민은 이명박 후보를 선택했다. 국민은 어정쩡한 ‘좌파 신자유주의’를 버리고 명실상부한 ‘토건형 신자유주의’에 희망을 걸었던 것이다. 그것은 박정희식 수출지상주의, 건설지상주의에 신자유주의에 고유한 규제완화와 감세 정책을 결합한 것이다.

    지난 7개월 동안 이런 정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몸으로 겪었고, 광장에서 터져나온 촛불의 걱정은 모두 실현되고 있는 중이다. 오로지 수출을 위해 수입물가가 오르건 말건 고환율정책에 목을 매달고, 경제대통령으로서의 위신을 찾기 위해 어떻게든 경기를 살려야 한다.

    수도권 규제완화를 통해 재건축 붐을 일으키고 그린벨트를 풀어서라도 수도권에 대규모 아파트 건설경기를 일으켜야 한다. 5+2 정책을 통해 수도권의 거품을 전국으로 퍼뜨리고 눈치껏 한반도 대운하도 되살리겠다는 심산이다. 우리의 가까운 미래에 사상 유례없이 광범위하고도 급속하게 불어나는 거품, 그리고 2~3년 후의 붕괴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수출과 부동산으로 불만 지피면 시장이 알아서 우리 경제를 선진화할 것이라는 주문 역시 이미 실천되고 있다. 1% 이내의 대기업과 부자에게 집중적으로 혜택이 돌아가는 법인세 인하, 소득세 인하, 종부세 무력화가 바로 그것이요, 공기업 선진화라는 기묘한 이름 아래 행해질 각종 공공성 파괴가 그 다음이다.

    1%에게 혜택을, 서민에겐 공공성 파괴를

    공기업 민영화는 이명박 정부의 구미에 딱 맞는 정책이다. 첫째 국민들은 공기업에 대한 불만이 많다. 우리의 공공서비스가 국제 수준과 비교할 때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에 관한 객관적 평가와는 무관하게 공기업은 비효율적이며 ‘철밥통’이라는 예단은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공공성의 견지에서 볼 때도 개선할 여지는 많지만 어쨌든 국민은 막연하게 삼성이나 외국기업이 대신 하면 지금보다 나을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공기업 노동자 등 직접적인 이해 당사자를 빼곤 반대세력이 별로 없다.

    둘째, 공기업 민영화는 단숨에 엄청난 수입을 보장한다. 철도나 우체국과 같은 네트워크 산업의 자산은 천문학적이다. 경기를 살리겠다고 약속한 임기 내 70조원 규모의 소득세 인하, 법인세 인하 등 감세정책이 초래할 재정적자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

    셋째, 이런 어마어마한 기업을 인수할 능력은 재벌만 가지고 있다. 민족주의적 감정에 호소하면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에 대한 거부감도 상당 부분 누그러뜨릴 수 있다.

    일일이 폐해를 거론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민영화/규제완화는 현재 제공되는 최소한의 필수적 공공서비스도 무너뜨릴 것이다. 예컨대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건강보험(정보의 비대칭성), 교육(외부성이나 평등 지향) 등 가치재 산업을 민영화하면 고급 서비스 시장이 발전하는 대신 공교육이나 공공의료에 투입되는 자원과 인력이 줄어들어 사실상 공공성이 무너지게 된다. 일반 국민은 그 동안 누리던 공공서비스마저 잃게 되는 것이다.

    전기, 철도, 가스, 수도, 우편 등 네트워크 산업의 경우에는 자연독점과 교차보조의 필요성 때문에 공기업이 담당해 왔다. 이런 산업을 민영화하면 일반적으로 공공요금이 상승하는 가운데, 특히 인구가 희박한 지역에 공급되는 서비스 가격은 급등하거나 서비스 자체가 끊어질 수밖에 없다.

    어떠한 민간기업도 교차보조금을 주면서까지 이런 서비스를 유지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폐해 때문에 영국의 철도는 일부 재국유화했으며, 미국 아틀란타시는 수도 장기계약을 폐기했던 것이다.

    민영화라는 끔찍한 괴물

    촛불의 기세에 눌려 건강보험 민영화를 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지만, 이미 인천경제자유구역에는 1인 병실만 600개를 갖춘 송도국제병원이 지어지고 있다. 이 병원을 유치하기 위해 재경부는 건강보험 환자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이것은 곧 병원 당연지정제의 완화를 의미한다.

    참여정부 말기에 노무현 대통령은 기존 인천, 광양, 부산 경제자유구역 외에 새만금(충남과 전북), 대구, 강원도 지역에 세 곳을 더 신청하는 선심을 베풀었으니 이제 각 도마다 건강보험 환자를 받지 않는 병원이 세워질 전망이다.

    이들 대형 병원은 AIG나 삼성생명이 새롭게 만든 고가의 민간보험증을 든 환자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 건강보험의 붕괴를 의미한다. 공정택씨가 서울 교육감에 당선되자 마자 일사천리로 국제중학교를 세우는 것은 공교육 붕괴의 신호탄이다. 어느 덧 서민들은 부질없는 사교육 경쟁을 포기하게 될 것이고 이명박 정부가 업그레이드하겠다던 한국경제는 이제 그 원동력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더구나 이제 비준만 남겨 놓은 한미 FTA는 한번 민영화되거나 규제가 완화된 분야에서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지라도 되돌아갈 길을 끊어 버린다. 서비스 분야 현재 유보에 적용되는 래칫 조항(역진불가능 조항)이나 투자자국가제소권은 재국유화라든가 공적 규제의 강화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다.

    불행히도 이것이 우리가 한 선택이다. 공공성을 버리고 자신과 가족의 이익을 공공연히 추구하는 것이 미덕이 된 듯한 사회의 선택이다. 입으로는 공교육 강화를 외치지만 돌아서서는 좋은 학원을 찾고, 집값이 올라서 못살겠다면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내서라도 버블 세븐에 입성하려하는 이중성이 초래한 결과이다.

    모두 공공성을 외면할 때 결국 모두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자명한 진리는 사회경제적 위기 속에서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민주주의의 파괴에 다다른다. 공공성은 시장과 민주주의가 겹쳐지는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극소수는 여전히 이익을 본다. 이런 경우 대다수 국민이 공공성을 강화하는 쪽을 택할지, 아니면 나만은 극소수에 들어갈 것이라고 부질없는 희망을 품을지는 미지수이다. 실제로 중남미의 많은 국가들은 개방화, 민영화로 위기가 오면 더 많은 개방화, 민영화를 택하고 또 다시 더 큰 위기를 맞는 길을 택했다.

    노무현 정부가 시작하고 이명박 정부에서 활짝 열릴 ‘멕시코의 길’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사회경제정책의 기조를 놓고 민주주의를 강화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다.

    노무현이 시작하고 이명박이 활짝 피울 ‘멕시코의 길’

    87년의 그 뜨거운 여름에 탄생한 노동자 대중조직 역시 사활의 기로에 서 있다. 서민 전체의 삶이 낭떠러지에 걸려 있을 때 노동조합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산별 전환은 단지 임단투에서 교섭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런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 조직 차원의 정비를 한 것이 아닌가?

    지금이야말로 안으로 타오르고 있는 촛불을 횃불로 바꿔내야 할 때가 아닌가? 20년간 훈련된 민주노조가 해야 할 일이 과연 무엇인가? 내 가족을 위해 월급 조금 더 받고 잔업을 마다하지 않으며, 비정규직 실태에 애써 눈 감는 것이야말로 산별노조가 앞장서서 국민을 멕시코의 길로 이끄는 게 아니고 그 무엇일까?

    필자소개
    레디앙
    레디앙 편집국입니다. 기사제보 및 문의사항은 webmaster@redian.org 로 보내주십시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