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미나와 뒤풀이의 힘
        2008년 09월 12일 03:0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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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으로 가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준엄하다. 여기에는 현실과 멀어진 고색창연한 사회운동에 대한 비판이 함축되어 있고, 그보다 더 많게는 이론 일반, 특히 급진 이론에 대한 조롱이 담겨 있다.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론, 구체적인 삶과 부대끼지 않는 공허한 이론, 지식인들의 언어유희로 전락한 이론 등에 대한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정당한 비판은, 때로는 이론과 지식인의 존재 자체를 무용하거나 해악만 끼친다고 거부하는 반지성주의와 결합해, 비판 자체에 물릴 정도로 되풀이 넘쳐난다.

    지식인의 존재이유와 현장

    그러나 지식인에게 현장은 어디일까? 지식인에게도 현장은 노동과 빈곤이 있는 공장과 농촌, 다양한 사회 소수자들이 투쟁하는 집회와 농성장일까? 하지만 지식인이 지식을 연구하고 생산하는 존재라면, 지식인이 자신의 존재 이유(reason d’etre)를 유지하면서 현장으로 가는 것만큼 난망한 일도 없다.

    지식인이 대중들과 호흡하며 ‘교육자 자신이 교육되어야 한다’라는 맑스의 선언을 실행에 옮기는 일은 물론 중요하지만, 공장과 거리에서 지식을 생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책을 읽어야 하고 글을 써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지식인은 공부를 해야 한다. 물론 공부를 책상에서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또한 공부를 하려면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돌아보면 내 공부다운 공부는 대학에 입학한 후 선배들이 준비한 ‘교양강좌’에서 시작되었고, 그후 줄곧 이런저런 소모임과 학회에서 선배나 친구들과 함께한 세미나에서 여러 고민을 다듬어갈 수 있었다.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제도 교육을 통해 많은 학문적 훈련을 쌓기도 했지만, 내 고유한 문제의식을 정리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는 역시 동학들과 진행한 학회의 수많은 세미나와 뒤풀이의 힘이 컸다.

    여기서 말하는 세미나는 유명 인사들이 고매하게 교류하며 인맥을 쌓는 그런 허례허식의 세미나가 아니다. 두 명이든 세 명이든 정기적으로 모여 해당 텍스트를 이해하고, 토론을 통해 쟁점을 잡아내고, 비판의 논리를 벼리는 장으로서의 세미나이다.

    공부의 정도, 세미나

    하지만 이런 경험을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세미나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일은 매우 고되고 힘든 일이다. 가시적인 성과는 거의 없으며, 때때로 지루함과 무료함이 찾아오고, 길을 찾지 못해 헤매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 교육을 때로는 보완하고 때로는 뛰어넘으며, 새로운 이론과 급진적/근본적(radical) 문제의식을 집단적으로 정리하고 발전시키는 장으로서 세미나는 공부의 정도(正道)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초 학생운동의 위기 이후 해체된 것이 바로 이런 세미나 체계였고, 1997년 이후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진행된 대학(원) 사회에서 오늘날에는 거의 소멸 직전에 이르러 있다.

    나는 감히 지식인들이 돌아가야 할 현장은 세미나라고 말하고 싶다. 지식인들이 시대적 과제와 정세적 요구들에 실천적으로 부응해야 한다는 것은 옳다. 하지만 사실상 지식인이 혁명-혁명이라는 말에 값하는 혁명-을 일으키는 본체(本體)인 적은 없으며, 말과 글이 위력을 갖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지식인 자신이 세상을 변혁시킬 힘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 몫은 아마 대중들과 이들이 조직하고 대표하는 사회운동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그 조력자들 가운데 (때로는 중요한) 일부일 것이다. 이는 지식인들이 사회운동의 현장과 결합해야 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러나 지식인 고유의 현장은 공장이나 거리가 아니라 세미나이다.

    글과 삶이 가까워지는 공간

    지식인이 세미나로 돌아간다는 것은 정세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책장을 넘기기겠다는 의미이다. 사회 구조와 그 모순을 이론적으로 인식하고, 비판의 논리를 가다듬고, 새로운 사회의 이론적 대안을 찾는다는 의미이다.

    글과 삶이 최대한 가까워질 수 있는 작지만 견실한 공동체 공간을 구성한다는 의미이다. 바로 이런 곳이 지식인의 현장이 아닐까? 현장으로 가라는 지식인 비판(과 지식인의 자기 비판)에서 잊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세미나가 아닐까? 그러므로, 어느 날에도 나는 세미나를 마치고 뒤풀이를 하며 ‘아름다운 폐인’이 되어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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