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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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04월 25일 09:1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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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쏘련: 비자본주의적 근대의 도전

    나는 가끔 서울에서 택시를 탈 때에 늘 운전기사들에게 “호구조사”를 당한다. “이상하게 생긴” 얼굴 탓에 첫 질문은 물론 언제나 “어디 사람이냐?”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세계관상으로는 “사람”은 늘 일차적으로 (계급도, 직업도, 종교도 아닌) “국가”에 소속돼 있으니까 이와 같은 “호구조사”의 방식을 당연지사로 봐야 할 것이다.

    일단 “어디 사람이냐”는 질문에 저는 늘 “귀화인이다”라고 먼저 답하지만, 기사님들의 호기심은 보통 그 사실로만 충족되어지지 않는다. “귀화”는 형식일 뿐, 여권 색깔과 무관하게 “이상하게 생긴” 얼굴의 소유자는 늘 이국시되면서 그의 “원래 소속 국가”의 서열적 위치에 따라서 자리매김되곤 한다.

    독일계 귀화인 이참에게 절대 할 것 같지 않은 온갖 인종주의적 모욕들을 필리핀계 귀화인 이자스민에게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곳은 대한민국이 아닌가? 나를 어디까지, 어느 수준으로 “대접”(?)해야 하는가를 알아내기 위해서 나의 “원래 출신 국가”의 명칭은 꼭 필요하다.

    “원래 어디 사람이냐?”는 질문이 빠짐없이 날아올 때에 나는 늘 똑같이 답한다. “나는 쏘련 사람이다.”라고. “쏘련”이란 말을 들을 때에 보통 기사님들은 “아아, 러시아, 옛 쏘련”이라고 나를 수정한다. 맞다. 구쏘련의 영토 대부분을 러시아 연방이라는, 인구 구성 등이 같아도 체제상 많은 면에서 너무나 다른 나라는 차지해버리고 말았다.

    나에게는 정치체로서의 자본주의적 러시아, 즉 엘친-푸틴 정권은 그저 내가 태어난 나라를 불법적으로 점령한 적대국일 뿐이다. 푸틴 정권의 – 세상이 다 아는 – 마피아적 성격을 염두에 두면 거기까지 이해가 쉽지만, 왜 나의 입에서, 구쏘련의 망국 이후 거의 21년이 지난 지금에도 계속 “쏘련 사람”이라는 자기 소개가 꼭 자동적으로 나오는가?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지인들은 꽤 계시는 것도 사실이다.

    이상하게 여길 만도 하다. 구쏘련은 많은 면에서 실패작으로 판명됐기 때문이다. 간판(“쏘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들의 연방”)과 달리 1920~21년 이후의 쏘련을, 마르크스와 레닌이 생각했던 “사회주의”를 실현한 국가로 보기가 다소 어렵다.

    고전적인 의미의 “사회주의”는 생산의 직접적 담당자들이 생산 과정을 민주적으로 통제하고, 근로대중(적어도 첫 단계에서는 그들의 전위조직)이 국가 기능을 장악하며, “국가”는 점차 사멸한다는 것이었는데, 이와 같은 특징들은 내전을 통과한 쏘련에서 점차 희석화됐다가, 스탈린의 집권과 독재 정권의 구축 이후에 그냥 사라지고 말았다.

    “스타카노프주의” 미명하에 자본주의 사회의 실적주의, 효율주의 등이 일터에서 부활되고, “전위당”은 그 어느 사회주의 이론에도 없는 “수령”을 정점으로 하는 관료적인 관리조직으로 왜곡되고, 핵으로 무장된 국가는 사멸되긴커녕 구 러시아제국 이상의 지정학적인 자기 확장을 꾀했다.

    제정러시아가 예컨대 1904~1905년의 일본과의 제국주의적 전쟁에서 조선반도 39도 이북의 지역에 대한 자국 영향권 편입을 도모했다가 실패하고 말았지만, 스탈린 정권은 같은 논리대로 38선 이북 지역에 대한 “자국 영향권 편입”을 이루려 하지 않았던가?

    김일성 정권의 자주화로 이 “영향권 편입”도 결국 상대화되고 말았지만, 지정학적 논리에 따르는 대외정책을 쏘련식 “사회주의”의 왜곡의 정도를 대표적으로 잘 보여준다. 즉, “사회주의 국가”로서는 쏘련은 분명히 이미 1920년대부터 “실패”의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회주의”는 아니더라도 일단 다수의 근로자들이 나름대로 편하게 살 수 있었던 복지국가 쏘련의 1989~1991년 사이의 수치스러운 망국도, 전세계가 아는 쏘련의 또 하나의 대실패다. 망국을 주도한 것은 고위 공산당 관료와 유명지식인 등 여론지도자이었기에, 이에 대한 효과적인 저항마저도 조직되지 못했다.

    당 안에서는 (다소 스탈린주의적 입장이긴 했지만) 자본주의에 결사 반대하는 일부 양심적 당원들은 결국 러시아공산주의노동당(RKRP: http://rkrp-rpk.ru/ )을 결성해 “러시아” 정권을 상대로 해서 집요한 투쟁을 벌여왔지만 이는 대세를 바꾸지 못하는 소수의 움직임일 뿐이었다.

    공산당원들도 반자본주의적 조직에 실패했지만, 자본화의 과정에서 가장 희생을 많이 치를 노동자들도 거의 저항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간판뿐인 “사회주의” 밑에서 자율성을 획득하지 못한 “공식적” 노조는 결국 어용적인 관습대로 엘친-푸틴 정권과 야합하고 말았으며, 페레스트로이카 시절에 생긴 새로운 민주노조는 대체로 자유주의적 내지 우파사민주의적 지향이었다. 이렇게 해서 쏘련은 이렇다 할 만한 저항도 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변변한 저항도 없었던 망국, 이는 “실패”뿐만 아니라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수치"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패작, 이중 실패작이라 해도, 왜 쏘련은 거기에서 태어나고 자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고향”으로 인식되는가? 그 한계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 체제를 “진짜 사회주의”로 오인하는 것도 아닌데, 왜 나뿐만 아니라 내 주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쏘련은 여전히 언젠가 – 물론 보다 나은 모습으로 – 부활돼야 할 “당위”로 남아 있는가? 나는 왜 여전히 “쏘련 사람”인가? 답은 아주 간단하다.

    그 모든 왜곡, 변질, 한계에도 불구하고 쏘련은 그래도 1917년 10월 혁명을 나름대로 계승한 사회였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보다 먼저, 쏘련은 “사회주의”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비자본주의적 사회였다는 점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국가 위주의 경제시스템”에서는 경제의 관리 차원에서 국가는 “집단적 자본가”의 역할을 담당했지만, 개인 자본가가 없었다는 것은 엄청난 해방적 의미를 지녔다. 배당금 형태로 부자들에게 빼앗겨 그 어떤 무의미한 투기를 위해 쓰일지도 모를 이윤이, 쏘련에서는 사회화돼 복지시스템과 과학, 예술 등을 뒷받침할 수 있었다.

    또 노동조합의 현장위원회 승낙 없이 그 누구도 해고될 수 없는, 안정된 직장은 수많은 시골 출신의 제1세대 도시민들에게 “도시 속의 마을공동체”가 되어 애착의 대상이 됐다. 직장 동료들을 “평생의 동반자”로 여기는 데에 익숙해진 쏘련 사람에게는 구미권이나 남한에서 흔한 직장에서의 이지메, 대인 관계 스트레스 등은 이해하기 어려운 다른 세계의 이야기이었을 것이다.

    이윤추구라는 부담이 없는 대신 노후, 의료, 교육이 사회적으로 보장됐던 쏘련에서의 삶은, 오늘날 남한에서의 삶보다 백배, 천배 더 “인간적”이었다. 매일매일의 경쟁, 미래에 대한 공포, 개인의 원자화와 소비주의, 광신적 종교라는 이름의 제도화된 집단적 현실 도피가 거기에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쏘련보다 더 가난하고 더 폐쇄적이지만, 실은 많은 면에서 이는 북조선에 해당되기도 한다. 어릴 때부터 급우들을 경쟁자로 여기는 등 “늑대”로 키워지는 남한 사람에 비해서는, 북조선 사람은 적어도 경쟁보다 상부상조를 먼저 익혀야 하는 “인간적” 환경에서 자라게 돼 있다. 북조선 사람의 시각에서 본다면 남한은 “인간”이 거의 살 수 없는 “사막” 내지 “정글”에 가깝다. 이는 과연 그렇게까지 틀린 의견인가?

    “사회주의”는 아니더라도 분명히 비자본주의 국가였던 쏘련에서의 계획적 경제 운영이 어떻게 되었고, 직장단위가 어떻게 구성되었고, 그 교육, 의료 등 여러 복지시스템에서 지금으로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적어도 당위 차원에서 철저하게 평등주의적인 쏘련이라는 다민족 국가의 민족 정책에서 우리가 지금 다민족 사회로 진입하는 문턱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쏘련의 문예는 과연 “당의 선전선동 기관”에 불과했던가? 왜 쏘련의 수많은 명망가 지식인들은 결국 망국에 앞장섰던가? 이번의 연재는 이와 같은 물음에 답하면서, 쏘련의 – 인제는 너무나 분명한 – 한계와 함께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그 장점도 아울러 부각시킬 것이다. 실패의 역사라 해도, 과거의 역사를 배우는 것은 미래의 투쟁을 준비하는 일의 중요한 예비적 과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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