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행복론'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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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04월 04일 12:2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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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가 만들어준 단어들 중에 참 애매하면서도 너무나 포괄적으로 쓰이는 단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행복"입니다. Happiness의 이 번역어가 동아시아에 전파되기 전에는, "복"(福)의 의미는 대체로 명확했습니다. 유교의 "오복"(五福), 즉 오래 살고, 부유하게 살고, 건강히 살고 덕을 좋아하면서 베풀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한다(壽, 富, 康寧, 攸好德, 考終命) 라는 소박한 과거의 "행복론"을 기억하시고 계시지요?

소박한 과거의 행복론

불교 같은 경우에는 세상이 고해(苦海)라고 하여 원칙상 "행복"의 가능성을 부정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모두들의 고통, 불행이 끝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보살상에서 또 그 나름의 "행복론"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모두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그 순간에는 진정한 의미의 어떤 행복이 얻어진다는 논리였죠.

동시에, 통속화된 동아시아 불교에서의 "행복론"은 유교와 대동소이했습니다. 오래 살고 부자로 살고 아이들을 많아 낳아 기르고 폭사, 횡사, 병사 당하지 않는다는 "기본"에다가 정토왕생이 첨가되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망자가 정토왕생했는지 안했는지 우리로서는 확인이 불가능하니까 결국 골자는 유교와 별 차이라고 없었습니다.

오래 살고, 부유하게 살고, 남을 너무 괴롭히지 말고, 동시에 너무 괴롭힘을 당하지도 말고, 그리고 많은 아이들의 애도 속에서 집에서 편안하게 죽어라 – 수백 년 동안 조선반도의 주민의 다수는 이 정도의 희망으로 살다가 죽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자본주의의 도래, 농촌 공동체의 해체, 초고속 도시화와 유교적 다세대 가족의 해체, 그리고 자본주의적 사회의 계급화와 신자유주의적 양극화 등 최근 100년 동안의 모든 변화들은 이 소박한 "오복론"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돌아봅시다. 이러한 사회에서 오래 산다는 게 복인가요? 재앙인가요? 독방에서 30~40만원의 기초생활보호 급여로 근근히 살아가시는, 그 수많은 버려진 독거노인분들께 여쭈어보면 그 답은 불문가지입니다.

완전한 행복은 헛된 꿈?

그렇다고 부유하게 산다는 게 행복인가요? "전형적인" 강남족의 가족 생활상을 한 번 보시지요. 서로의 신분과 부를 보고 "맞춤형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을 "계획 상품"을 만드는 공정처럼 인식해, 아이와의 정서적 공감대를 이루지도 못한 채 그저 (아무 의미도 없는) "공부"시키는 데에 바쁘고 아이의 애정결핍을 돈, 선물, 여행으로 메꾸고, 부모, 형제, 부부끼리 재산다툼하고, 부동산투기와 "재데크", 그리고 프로야구나 골프 이상의 관심사도 없고… 이렇게 산 시체로 산다는 것이 "행복"이라면 아마도 "행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을 듯합니다.

좌우간, 아부와 실적 부풀리기, 시류 편승, 기만 없이 "출세"할 수 없는 이러한 사회에서는 "덕을 좋아하는" 이상 확실히 "부유하게 산다"는 것은 불가능해지고, 아마도 "편안한 죽음"도 문제시될 것입니다. 이 사회에서는 진심으로 "덕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돈이 없어서 병원에서 수술도 못 받고 가난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갈 확률은 높습니다.

한데, "부유하게 산다"는 것에 비해서는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진정한 "행복"에 가까울지 모르겠습니다. 좌우간, 근현대의 모순과 갈등 속에서 "오복"은 우리에게 상당 부분 무의미화되고 말았습니다.

본인 마음을 어떻게 잡고 어떤 실천을 해도, 생로병사의 기본적인 고통을 면할 수 없습니다. 타인에 비해 예컨대 병고(病苦)를 덜 당한다고 해서,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과연 혼자서 행복감을 만끽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불완전한 이 사바세계에서 몸둥이를 타고 태어난 이상, "완전한 행복"이라는 것은 헛된 꿈일 뿐이죠.

한데, 우리들의 상대적인 행복감을, 우리와 사회의 관계,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사회, 경제, 정치적인 형태 등이 많이 좌우합니다.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에서의 상대적인 행복감이라도 맛보자면 일단 먼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란 어떤 것인지 바로 봐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팔정도(八正道)가 정견(正見), 즉 세상의 이치를 바로 보는 것부터 시작되어 나중에 정업(正業), 즉 바른 행동으로 이어지듯이, 마르크스-레닌주의도 "실천"에 앞서 이론이라는 프리즘을 통한 "관찰"이 우선 전제돼야 한다고 못박고 있지 않습니까? 사회의 진면목에 대한 관찰 없이는 그 어떤 행복도 불가능한 것이죠.

현대중공업 정규직 노동자와 대학 교수

이 사회는 불평등과 차별, 배제로 특징지어진, 신분과 돈의 위계질서인 이상, 기본적으로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물론 집단적 착취자인 "자유민"과 그들을 먹여주는 "국가의 농노" 사이의 결혼이나 교제 등이 불가능한,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신분이 아주 명확한 고대 스파르타와 같은 초기계급 사회에 비해서는 우리가 사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경계는 훨씬 덜 명확합니다.

예컨대 현대중공업 같은 대공장에서 비정규직 사원들을 지휘, 통솔하는 정규직 사원은 과연 누구인가요? 그의 비교적으로 높은 연봉이 비정규직에 대한 초과 착취로 인해서 가능해진다는 차원에서야 "가해자성"도 지니고 있지만, 실질적인 산재율이 20%에 가까운 위험한 작업장에서 특근, 잔업 등을 포함해서 일주일에 50시간 이상 땀을 흘리고 아이들과 시간도 보내지 못해 가족들의 불만을 "돈"으로 무마하고, 회사의 경영상 결정에 하등의 영향을 미칠 수 없어 그저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면서 사는 중년 가장을 상상해보시지요. 이 분은 궁극적으로 비인간적이고 범죄적인 체제의 피해자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정규직 대학 교수는 피해자인가요? 가해자인가요? 실적 올리려고 "영어논문" 제작에 하루종일 보내야 한다는 차원에서는 半식민지적 학문 시스템의 "피해자로서의 성격"도 있지만, 1억에 가까운 그 연봉이 수많은 시간강사들의 한달 100만원이나 그 이하의 월급으로 가능해졌다는 걸 생각해보면 또 다른 측면들도 보입니다. 그러니까 "피해자다", "가해자다"라고 선명하게 양분하는 것이야 불가능하지만, 본인이 이 스펙트럼에서 "가해"의 극점에 더 가까운지 "피해"의 극점에 다 가까운지 각자 스스로 판단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다음 절차는 무엇입니까? 일단 "나 혼자" 행여나 피해자의 위치를 벗어난다고 해서, 가해와 피해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이 세상이 전혀 바뀔 일은 없을 것이고, 그저 "나"는 가해자로서의 성격도 아울러 갖게 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한 시간강사가 초인적인 노력에다가 행운까지 맞아 정규직 교수가 된다고 해서, 그 옛 동료들에 대한 초과 착취는 전혀 없어질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차이가 있다면 본인도 이 착취로 이제 "득"을 보게 된 셈이죠.

피해자와 가해자

과연 이렇게 해서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착취와 불평등으로 경제적으로 뒷받침되어지는 학문은, 정말 창조적이고 선구적일 수 있을까요? 오히려 "나는 인제 옛 동료들보다 우월하다"는 식의 오만한 자의식을 갖게 되는 사람이라면 그 자만심으로 인해서 보통 학문적으로도 발전의 길이 막힌다는 것은 저의 관찰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외형적으로 봤을 때에 "피해자성"을 혼자 타개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이건 표피일 뿐입니다. 행복해지려면 "나 혼자"는 아니고 "우리 모두 다" 행복해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굳이 대학이라는, 극도로 위계질서적 사회의 사례로 계속 이야기하자면 비정규직 동료들과 연대하고, 비정규직 노조나 비정규직 철폐를 요구하는 진보신당 같은 진보 정당에 가입하고, 가능만 하면 비정규직 투쟁에 참여하거나 연대하는 길, "보살도"를 연상케 하는 이러한 길은 오히려 마음 속의 진정한 행복감으로 이어지지 않나, 그러한 생각을 해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위의 길로 가지 못하고 (다수의 우리 국내인들이 선호하는) "개인적 해결"을 – 외피적으로는 "성공적으로" – 시도했습니다. 1997~2000년간 경희대학교라는 "학교 재벌"의 비정규직 교원으로 차별과 착취를 당했다가 그다음에 어렵사리 오슬로대에서 정규직 자리를 찾아 거기로 떠났습니다.

정규직 교수 대 시간강사 비율이야 오슬로대는 경희대보다 4~5배 낮은데다가 시간강사들의 보수도 수업준비 수당 등을 포함해 국내보다 훨씬 덜 한심한 수준인 이상 누군가에 대한 착취로 호의호식한다는 죄의식이야 국내에서 교수를 했을 경우에 비해서 덜 강할 수도 있었지만, 전세계적으로 투자를 해가면서 제3세계의 자원들을 노리는 노르웨이라는 "제1세계의 정상에 서는 국가"에서 살면서 복지혜택 등을 받는 만큼 저도 "가해자성"을 띠게 됐습니다.

그리고 피해자에서 "부분적인 가해자"가 된 그 순간부터는, 저는 한 순간도 "행복감"을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몸은 아무리 편해도, 마음은 지옥이었습니다. 푸틴의 강도 정권 밑에서 거의 생계 유지 수준 이하의 임금을 받는 공공 부문의 의사나 교사, 늘 백색테러의 위협을 받으면서 살아야 하는 그 쪽의 좌파 운동가들, 국내에서 몇년간 투쟁해도 해결을 보지 못하고 "죽음 이외의 모든 방법을 다 해본" KTX여승무원이나 재능교사 등 장기 투쟁 사업장의 노동자들이나 자살을 택하는 시간강사 (그들 중에 제가 개인적으로 만난 적이 있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등을 생각하면서 그저 죄인으로 살아온 느낌이었습니다.

마음의 지옥

특히 부유한 동네의 경우에는 "가난하다"는 러시아에 대한 경멸적인 견해를 쉽게 갖게 되고 전자오락의 세계에 자주들 "편안하게" 빠지는 현지 아동들을 보면서,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가해자로서의 죄책감으로 노르웨이 정당 중의 유일하게 노르웨이 국부를 제3세계 피억압 민족들과 평등하게 나누고 이민을 자율화시키는 정책을 내놓은 적색당(공산당)에 가입하기도 하고, 국내의 진보신당에 가입해 지금 "비례대표 출마"까지 하고 있지만, 아무리 자본주의의 현실을 폭로하는 책을 쓰고 아무리 사회주의적 정당 활동한다 해도, 그 "심내(心內)의 지옥"을 탈출할 수 없습니다.

제 개인적 경험이 타자들에게 줄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부분적인 가해자"가 된 이상 그 죄과를 상쇄하기 위해서 물론 "우리 모두들의" 행복을 향한 노력을 해서 그나마 살아갈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밀려오는 극단적인 불행감을 벗어나기가 매우 힘듭니다.

그런데 과연 이 불행감을 꼭 "벗어야" 하나요? 제3세계를 착취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데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면서, 그저 그 대가를 순간순간 지불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 사회를 떠나 몸으로까지 피착취자들과 연대할 때까지 그냥 그렇게 사는 법 밖에 없습니다.

제가 여태까지 만나본 사람들 중에서는 (저와 만났을 그 당시에) 수배중이었다가 나중에 감옥에 갔다온 송경동 시인과 지금 진보신당 비례대표로 저와 함께 나선 김순자 동지와 같은 비정규직 활동가들, 그리고 극우 파쇼들에 의해서 그 이름이 살생부에 올라 언제 테러를 당할지 모르면서도 계속해서 푸틴 패당과 글로 투쟁하는 러시아의 타라소프 동지(이것은 그의 싸이트입니다: http://saint-juste.narod.ru/), 이런 분들은 실로 제일 행복하게 보였습니다. 유호덕(攸好德), 즉 – 또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연대해서 "우리 모두들의 행복"을 위해 온몸과 온마음으로 싸워왔기 때문에 – 덕을 좋아하고 길렀다고 말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분들은, 비록 어떤 경우에는 "편안하게 죽기"를 하지 못하고 총탄을 맞아 죽고 감옥에서 병에 걸려 죽고 가난 속에서 죽기는 하지만, 바로 "행복"을 구현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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