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합진보 사태, 20대에게 무슨 의미?
    "그들은 골방과 광장 갈림길에 서있다"
    [진보, 야] “가장 열 받게 만드는 건 생소한 단어 ‘주사파’"
        2012년 05월 21일 03:5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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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합진보당 당권파가 ‘빅엿’을 투척했다. 사실은 터질 것이 터졌다고 생각했다. 새누리당에서는 연일 축하파티를 벌이고 있겠지만 물론 그들은 논외의 대상이고, 내게 흥미로운 것은 주변 40~50대 진보진영 인사들과 20대들의 반응이다. 둘 다 이번 일을 언급하며 치를 떠는 것은 마찬가지다. 이유가 각기 다를 것이다.

    한 나라의 공당이 벌이는 행태에서 대학 총학생회 선거와의 기시감을 느끼며, 40~50대들의 분노 역시 반쪽자리 동지들과의 불편하고 오래된 동거에서 차곡차곡 쌓여왔던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볼 따름이다. 그리고 20대들을 열 받게 하는 것은, 훼손된 민주주의의 원칙도, 왜곡된 조직문화도 아닌 ‘주사파’라는 생소했던 단어다.prom dresses on sale,cheap christian louboutin,ralph lauren outlet uk,louis vuitton outlet,michael kors uk

    촛불집회, 노무현, 사소함

    20대의 정치의식을 한마디로 설명하기란 어렵다. 연령 이외에는 공통점을 거의 공유하지 않은 집단을 몇 가지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애초에 가능할 리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운동권 혹은 이른바 20대 좌파 명망가, 그리고 ‘88만원 세대’ 당사자를 빼고 남은 20대들에게서 어떤 경향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들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촛불집회,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그리고 사소함이다. 이들은 총학생회나 진보정당 청년/학생위원회 등으로 대변되는 전통적 방식의 조직에 포섭되어 있지 않다. 그럴 생각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정치적 관심은 낮지 않다.

    이들은 결코 보수적이지 않다. 시시해도 괜찮을 뿐이다. 20대들은 ‘내 방’으로 대변되는 자기만의 작고 견고한 세계를 구축하고 기꺼이 그 안에서 틀어박히기를 택한다. 골방 속 20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88세대 담론도, 스펙 경쟁도 아니다. 루저 감성과도 다르다.

    루저라고 스스로를 칭하며 자기비하 혹은 자위했던 감성의 밑바탕에는 그 찌질한 삶을 자양분 삼아 무엇인가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의지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외려 ‘아무것도 이뤄내지 않는 게 뭐가 어때서?’ 묻는 쪽에 가깝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 찌질하다고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집단주의의 폭력은 몰아냈으나 그 대가로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고 해야 할까. 과거에는 친구가 없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었으나, 지금은 혼자 노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립적이고 당당하고 쿨한 것이라고 여긴다.

    섹스 할 자유의 제한, 터무니없이 비싼 월세, 취업경쟁, 높은 등록금에 대한 담론들도 어쩌면 거창하다. 대신 ‘친구 없음, 애인 없음, 꿈 없음, 하지만 괜찮아’가 이 견고한 세계를 설명하기에 적절할 것이다. 그 안에서는 사소하면 안 되냐고, 꼭 무엇인가에 열정을 가져야 하냐고, 치열하게 사는 삶만 의미 있는 삶이냐고 물으며 살아내는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중이다.

    그러나 20대 외부의 시선(하나는 20대를 비난하는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20대를 불쌍히 여기는 시선)처럼 그 방 안에서 토익과 토플 공부, 자격증 따기에만 열중하는 것은 아니다. 돈이 없어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골방 생활은 때로는 개인주의자들의 느슨한 연대로 이어지기도 한다. 방 안에서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정보를 얻어 혼자 집회에 간다. 조직이 없을 뿐이다.

    폼 나지 않아도 상관없고,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은 이 삶에 거대한 정치가 끼어들 틈은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정치를 일상의 한 조각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문제는 간단히 해결되었다.

    일상으로서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대개 2008년 촛불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누가 노무현과 친했나, 누가 노무현을 끝까지 지켰나’처럼 지극히 감정적이고 단순한 차원의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주로 친노 계열 정치인들이나 대중친화적인 지식인들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 정치인들에 대한 ‘플짤’을 만들어 내거나 특정 인물들을 ‘진보의 아이돌’이라고 추켜세우며 흥미 위주의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일종의 유사 팬클럽, 혹은 정치 놀이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관심은 급속도로 넓고 깊어졌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놀라우리만치 무지하거나 폐쇄적이기도 하지만, 환경 문제나 여성주의에 있어서는 대단히 급진적이기도 했다. (‘나꼼수 비키니 사태’ 20대 여성들이 낸 성명서를 보라!)

    한복을 입고 ‘날라차기’를 하는 강기갑, 촛불집회에 열심히 참석하는 이정희, 토론에 능한 노회찬도 지지하기 시작했다. 진보신당에 표를 줘도 괜찮지 않을까? 질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20대들은, 그 누구보다도 아스팔트 바닥에서 오열하다 실신하는 이미지로 대변되는 이정희 의원을 사랑했다. 거기에 사상의 동질성이나 복잡하고 논리적인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멘탈 붕괴가 일어난 것은 진보진영 뿐만이 아니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진보정치에 대한 네 살짜리 갈망이 어이없는 물벼락을 맞은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극렬한 거부감은 민주주의 선거의 원칙이 훼손당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기형적 조직문화를 목격했기 때문도 아니다. 태어나서 처음 투표권을 부여받은 총선이다. 민주통합당은 못 미덥고, 진보신당은 사표가 될 것 같다. 주위 사람을 설득해 통합진보당을 뽑았다. 그런데 선거 부정이란다. ‘경기동부’가 주도했는데, 이들이 ‘주사파’란다. 이 두 가지가 겹쳐지니 화가 치민다.

    ‘경기동부’는 말할 것도 없고, 20대들에게 ‘주체사상’ 같은 단어는 ‘프리메이슨’ 이나 ‘나사의 거짓 달 착륙’과 같은 음모론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제 믿을만한 사람들까지 모두가 나서서 그 음모론이 사실이었다고, 오랜 세월 우리 사회를 좀먹어왔다고 외치는 것이다. 심지어는 누군가는 당권파와 ‘북한’과의 관계를 파헤치는 보수 언론의 원색적 기사에 동조할 정도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차라리 가 ‘우리 편’인 것이다. 어떤 20대들이 느끼는 이 당혹감은 ‘빨갱이면 어때’가 아니라 ‘촛불집회에는 가지만 우리는 순수한 의도로 간 것이니 매도하지 마라’라는 식의 정서에서 기인한다. 선거의 부정을 가능케 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려 노력하는 대신, ‘애국가도 안 부르는 리정희는 북한으로 꺼져라’ 외치는 것이다.

    다가올 학생회 선거의 풍경

    통합진보당 사태가 불러올 또 다른 파장은 대학 사회의 학생회 문화에 관해서다. 혹자는 ‘NL에게는 대중친화적인 인물이 없고, NL이라는 이념 자체가 이미 시대착오가 되었고, NL의 낡은 조직문화는 디지털 시대의 네트워크형 소통에 적대적’이기 때문에 사멸할 일만을 앞두고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적어도 대학 사회에서는, 여태까지는 그랬다.

    서울 시내 주요 대학의 총학생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만 봐도 알 수 있다. 좌파 학생회가 ‘사람을 아래로 내려다보며 거만하게 가르치려’ 하거나 ‘자기들과 생각이 조금만 다르면 등을 돌리며’, ‘자기들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사람’을 불러 강연을 여는 동안, 한대련 계열 학생회들은 진보진영의 명망들이나 민주통합당의 국회의원을 불러 새내기들을 대상으로 강연하는 ‘대중사업’에 열과 성을 기울였다.

    한대련 주최 등록금 투쟁 집회 모습.

    전교조 선생님이나 진중권의 책과 같은 우연한 계기로 진보성향을 가지게 된 대학 신입생, 인터넷 댓글이나 투표로 자기 가치관을 드러내는 정도 이상으로 무엇인가를 실행에 옮겨보려 하는 그나마 몇 안 되는 스무 살짜리들을 그렇게 모조리 흡수하는 것은 그들이다.

    학내 구성원들이 각각 다른 계열의 총학생회의 활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찬찬히 들여다 봐 줄 리 없다. 내가 그들과 다른 동료들을 찾아 헤매며 느낀 감정을 한 줄로 성기게 요약하자면 ‘저들은 나쁜 운동을 하고 이들은 운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스쳐지나가면서 보기 어쨌든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쪽, 조금이나마 더 세련되고 흥미로워 보이는 쪽은 한 대련 계열 총학생회다. 터질 일이 터졌다고 느낀 것은 통합진보당 사태에서 대학 총학생회 선거와의 익숙한 데자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이번 사태를 통해 지적된 특유의 조직 문화가 고스란히 재현되는 곳이었지만, 한 대련 계열 총학생회가 훨씬 진정성 있고 믿음직스러워 보인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정작 가장 절박한 존재, 고시원에 살면서 학자금 대출 이자를 내기도 버거운 이들은 시급 4,000원짜리 아르바이트에 허덕이고, 그나마 남은 20대의 목소리는 진보진영을 제 존재 입증의 장으로 삼고자 하는 20대 진보진영 ‘명망가’들의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 위에 언급한 20대들이 남았다.

    지적·감정적 충격도, 내 존재를 위협하는 절박한 문제도 없는데 무엇이 이들을 공동체로 묶을 것인가. 대학에 조직 생활의 결속력을 중시하는 한대련 계열만 남은 이유다. 20대들이 강압과 집단주의 문화에 치를 떨기 때문에, 누군가 언급한대로 ‘디지털 시대의 네트워크형 소통’에 익숙하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밀도 높은 조직적 유대관계가 아니고서는 20대를 조직으로 묶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덧붙여 거부감이 강했던 만큼 쉬이 동화되기도 했고, 외롭기 때문에 관계를 갈망하고 있기도 했다.

    20대와 대학생들이 느끼는 그 모든 분노가 완전히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한 것인지는 단언할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이들의 대화에 ‘경기동부’라는 ‘외계어’가 빈번히 오르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애초 대학 총학생회 선거 때에 드러나는 학생들의 평균적 인식 수준은 한대련 계열 학생회를 특정 정당이나 사상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 데에까지 미치지 못했다. ‘해당 선본이 특정 정당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은 아닌가요?’ 하는 물음이 대단히 치명적인 비방이라도 되는 양 비장의 카드로 공청회에서 등장하고, 선거철마다 학교 커뮤니티에는 ‘그 후보가 민주노동당 당원이라며?’ 하는 의문이 조심스레 제기되는 것을 보아도 그랬다.

    한대련 계열 총학생회와 통합진보당의 관계를 판단하고 그 관계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는 것은 당연히 대학 사회 구성원들의 몫이다. 다만 20대들의 당혹감과 분노가 대학 사회에 미칠 영향이, 여태까지 대학에 입학한 후 4년여 동안 비슷한 판세를 유지했던 대학가의 다음 총학생회장 선거의 풍경이 궁금해진다.

    골방과 광장의 갈림길

    기껏 방에서 나왔다. 과거 세대가 대학에 처음 입학해 느꼈을 개벽과도 같은 지적 충격도 없었고, 철이 들자 눈을 들어 바라본 세상은 제법 살만한 곳이었다. 그런 보통의 20대들에게 2008년의 촛불집회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내 존재에 가해지는 생애 첫 위협이었고, 스스로 주먹을 쥐게 한 첫 분노였다. 무서웠고, 화가 났다.

    촛불집회에 가면 다 바뀔 줄 알았다. 선거로 뒤집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나꼼수가 해결해 줄 줄 알았다. 너나할 것 없이 새로운 방식의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찬사를 보냈고, 내 생각이 바뀌자 세상도 함께 변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꼼수의 열기는 흐지부지 식어갔고, 선거의 결과는 낙관하기 어려웠으며, 힘 빠지는 선거 결과에 이번 사태가 더해졌다. 첫 패배였다. 확신은 없는 가운데 패배의 기억이 하나 아로새겨졌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세상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분노한다.

    20대, 골방과 광장의 갈림길에 서있다. 분노에서 흥분이 걷히고 나면 선택하게 될 것이다. 믿을 놈 하나 없다고 다시 골방 안으로 들어갈 것인가, 그러니 내가 해야 한다며 다시 시작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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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현재 대학생이다. 문학과 여성학을 공부하며, 지금은 아지트를 찾아 헤매고 있다. 재기발랄하고 쿨한 게 대세인 시대에 혼자서 진지하게, 언젠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글을 쓰는 꿈을 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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