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 소련의 빛과 그늘 &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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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03월 23일 09:5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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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살았던 말기의 소련을 회상해보면 한 가지 아주 한심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러시아라는 주변부적 국가의 아주 오랜 어떤 "서구 콤플렉스"의 발로인지도 모르지만, 늘 제기되는 표어는 "미국 따라잡기"였습니다.

    구 소련의 "미국 따라잡기"

    말기 소련의 평균적 노동 생산성은 미국의 약 60%에 불과했고, 이 사실은 적어도 지식인층 안에서는 널리 인식돼 있었는데, 지도자들이 늘 이걸 의식해서 "미국의 노동생산성을 따라잡고 능가해야 우리 체제의 승리가 가능하다"고 못박곤 했습니다.

    대중적으로 팔리는 통계집마다 소-미의 강철 생산, 트래크토르(경운기) 생산 대수, 곡물 생산 등이 비교, 대조되고, 혹여나 소련이 생산 통계에서 미국을 앞지르는 일이 생길 때마다 이게 당장 중앙방송에서 나오는 뉴스가 되곤 했습니다.

    또 그러한 비교가 나올 때마다 미국은 "선진적 자본주의 국가"로 지칭되곤 했습니다. 레닌주의적 사회주의에 좋은 점들은 대단히 많지만, 우리 입장에서 문제되는 부분이라면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이 될 것이라고 인식되는 "선진권"의 그 높은 노동생산성, 생산능력에 대한 지나치다 싶은, 근대 지상주의적이다 싶은 선망입니다.

    원래부터 그런 근대지상주의적, 공업지상주의적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거기에다가 소련 말기의 간부층의 은근한 (혹은 가끔가다 은근하지도 않은) 자본주의적 성향의 문제까지 첨가됐습니다. 그들은 공석에서야 "미국 수준 초과"를 들먹이곤 했지만, 사석에서는 바로 그 "적 미제"에서 한 번이라도 살아보고 싶은 욕망들을 마구 드러내곤 했습니다.

    러시아의 고질적인 "서양 콤플렉스", 레닌주의의 "생산의 선진성"에 대한 강력한 강조, 그리고 간부층의 자본주의적 타락 – 이 요인들은 점차 망국의 비극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생산력과 사회주의

    그런데 원리원칙으로 따져보면 과연 "미국만큼 많이 생산, 소비하기"가 정말 사회주의인가 싶습니다. 당연히 미제로부터 늘 방어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지나친 기술적 후진성은 치명타가 될 수도 있었지만, 자본주의적 세계체제 전체의 자본력과 지식력, 정보력이 집중된 미국에 비해서 전통적으로 유럽의 주변부에 속해온 러시아 같은 나라가 갑자기 생산, 소비의 모든 면에서 더 앞서나갈 것이라고 처음부터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러시아도 그렇지만, 러시아보다 근대적 자본주의가 애당초부터 훨씬 덜 발전됐던 중국, 북조선의 경우에는 더더욱 애당초부터 "생산 경쟁"만을 강조하는 것은 무리수였습니다. 즉 모택동이 대약진운동 벽두인 1958년의 한 연설에서, "20년 후에 미국을 따라잡겠다"던 흐루쇼브(후루시초프)를 따라잡을 심산으로, 강철 생산의 부문에서 "15年后,我们可能赶上或者超过英國"이라며 마치 "15년 후 영국보다 강철을 더 많이 만드는 것"을 "사회주의"의 대명사처럼 만들어버린 것은 태심한 오류였습니다.

    모택동 주석의 신중국 건국 주도나 토개(토지개혁)의 쾌거, 비록 폭력적이고 많은 면에서 비생산적이며 철저하지 못했지만 당 내 관료화와의 투쟁의 시도나 전인민을 위한 의료, 기초 교육 공급 등의 업적은 대단히 존경스럽니다.

    하지만 "영국을 따라잡겠다"는 이야기로 결국 오도되고 재앙을 낳을 대형 켐페인인 대약진운동을 주도하려 했던 모택동은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차라리 "초고속 근대화"만 갈망하는 후진국 민족주의적 지도자에 더 가까웠습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사회로서는 강철을 얼마나 생산했느냐보다는, 이 강철을 생산한 "인간"들이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목적이 다른 체제

    사회주의적 삶은, 자본주의적 생활보다 더 윤택나는 것은 절대 아닐 것입니다. 지구의 자원이 어차피 제한돼 있는 것이고, 사회주의자들의 과제는 이 자원을 빨리 써버리면서 우리 세대의 소비를 무제한으로 늘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제한된 자원들을 되도록 골고루, 평등하게 분배하고, 그 제한된 자원을 이용하는 공동체 안에서의 민주주의와 상호 배려, 그리고 삶의 기쁨이 가득 차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미제와 자동차 대수 생산을 비교해가면서 "우리가 더 많이 만들겠다"고 다짐하는 것보다는 사회주의 국가는 자동차를 최소한으로 필요로 하는, 대중교통 위주의 사회를 도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농민 등 자동차를 정말 일상적으로 필요로 하는 일부를 예외로 하되 도시에서는 대중교통망, 특히 환경친화적인 지하철, 전차 등의 확충에 초점을 두고 출퇴근 관계로 불가피하게 자동차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10~15개 가구의 자동차 공동 사용 등을 적극 권장하는 것은 가장 사회주의적이지 않겠습니까?

    자본주의 체제의 목적은 자동차 생산으로 인한 자본의 이윤 극대화이지만, 우리의 목적은 환경 보존과 교통 사고률 최소화, 석유 등의 자원 보존, 그리고 개인이 언제나 사회에 의존할 수 있는 안정되고 상호 배려심이 많은 사회적 환경의 조성은 아닙니까?

    목적이 서로 완전히 다른 만큼, 사회주의적 사회를 자본주의적 사고 틀로 상상해봐야 소용이 없고, 소련이나 중국 지도자들이 자본주의적 "생산 지상주의"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것은 역사의 비극임에 틀림 없습니다.

    미제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야 하는 소련이나 1970년대 이전의 중국으로서 당연히 노동생산성 제고 등에 방점을 찍을 수밖에 없었지만, 사실 사회주의 체제 내 "노동자"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전인적 인간의 발전이 중요합니다.

    사회주의 사회의 핵심 문제

    인간이 얼마나 많이 생산하느냐보다는, 노동환경이 얼마나 쾌적한가, 휴식시간이 얼마나 많은가, 휴식시간에 음악이나 무용, 독서 등을 즐기면서 얼마나 자기계발하고 남을 위해서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가, 직장 단위 안에서의 인간관계가 얼마나 평등하고 서로 배려해주는가, 이게 사회주의 사회로서 핵심적인 문제들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차원에서는 구소련이나 동구권 사회는 자본주의 국가에 비해서는 훨씬 진보된 사회였습니다. 전체 총인구 중에서 1년 내에 약 2천5백만 명이 정신신경과에 가서 도움을 요청해야 하고, 게다가 약 6백80만 명이 목사나 신부 등에게 신경병이나 고질적 불안, 심리적 질환 등의 문제로 도움을 호소해야 할 만큼 "효율성 높이기" 압력이 살인적이고, 왕따 현상이 고질적이고, 늘 해고 위험이 도사리는 미국의 직장에 비해서는, 소련에서의 직장은 아주 쾌활한 곳이었습니다.

    제 부모님부터 시작해서 제가 알았던 그 어떤 기존 세대의 소련 사람도 직장에서의 지나친 피로, 부당한 압력, 왕따 등에 대해서 불평한다는 것을, 제가 한 번도 들은 적은 없었습니다. 제 부모님만 해도 늘 출근할 때에 웃으면서, 기쁘게 갔습니다.

    즉, 노동생산성이 미국에 비해 훨씬 낮아도, 노동자의 삶은 많은 면에서는 훨씬 즐거웠던 것입니다. 문제는, 구미권 자본가들을 벤치마킹하여 궁극적으로 자본가가 되려는 구소련의 간부들에게는, "행복한 노동자"가 필요했던 게 아니고, 보다 많은 물건을 "빨리빨리" 생산하는 로봇과 같은 노동자들이 필요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실제로 노동자의 삶이 미국에 비해 훨씬 "사회주의적"이었다 해도 지도층의 "미국 따라잡기" 타령은 끊어지지 않았고, 결국 미국을 따라잡을 일도 없이 지금 같은 구미권의 경제적, 문화적 식민지로 추락하고 만 것입니다.

    저는 북조선 지도자들의 "강성대국"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아쉬움을 강하게 느낍니다. 사회주의자라면 "강성대국"을 바랄 일 없이, 배려와 사랑이 많고 행복감이 넘치는 사회를 바라는 것입니다. 개개인이 존중 받고 서로 챙겨주고 사랑해주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체제는 바로 사회주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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