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어적 폭력, 어디까지 정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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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03월 02일 09:1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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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이 부어버리고 몸살이 심한 상태에서 글을 써서 그런지, 좀 슬픈 생각들이 머리에 막 들어갑니다. 그 중의 가장 슬픈 생각은, 이 사바세계에서는 너무나 아쉽게도 개인의 도덕률과 집단의 도덕률이 완전히 일치될 수가 없다는 점에 대한 생각입니다.

    개인과 집단의 경우

    저 같으면 개인적으로는 아주 철저한 비폭력주의를 지지합니다. 예컨대 캄캄한 밤에, 외진 골목에서는 어떤 강도가 제 지갑과 함께 제 목숨까지 노린다면, 저는 아마도 저항을 별로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몸뚱이를 하나님에게 언젠가 반납해야 하는데, 뭐 아주 망가지기고 고장나기 전에 비교적으로 성한 형태로 반납하는 것도 굳이 그리 나쁜 팔자는 아니니까요.

    한칼에 당장 죽는 것보다, 몇년간 이런저런 불치병에 시달리다가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는 것은 오히려 더 심한 액운은 아닐까요? 그런데 예컨대 저와 함께 제 아들이 그 자리에 있다면 이야기는 이미 좀 달라질 것입니다.

    이미 심각한 오작동을 꽤나 자주 일으키는 제 몸이야 아쉬울 게 그다지 없지만, 아직 이 오온가합(五蘊假合. 인간은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이 쌓인 잠정적 존재라는 의미 : 편집자)의 덧없음을 느껴볼 기회도 충분히 없었던 아이의 몸까지는 그렇게 쉽게 주어버리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즉, 저 혼자 대신에 두 사람이라는 "작은 집단"이라도 생기면, 저의 비타협적이고 철저한 비폭력주의에 이미 약간의 물음표가 그어집니다. 아이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저항을 포기한다면 이게 간접적인 살인의 방조에 해당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집단이 커지고 폭력의 규모가 커질수록, 비록 저 개인이야 끝까지 비폭력 원칙을 지키고 싶어도 방어적인 폭력을 비판하기가 더더욱 어려워집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제 신념상 손에 총을 잡지 못하고 미 제국주의와 같은 최악의 적과의 무장 갈등이 일어나도 병원에서의 비전투 복무 같은 것을 지원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제의 악랄한 점령 정책에 무기를 들고 반기를 든 이라크나 아프간의 백성을 감히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저 개인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없는 같은 양심의 논리로, 살인마적 미제의 노예로 죽음과 같은 삶을 살 수 없어서 들고 일어난 투사들을 도저히 비난할 수 없는 거죠.

    무장 방어의 정당성과 한계

    그러면 파쇼 독일이라든가 미제와 같은, 폭력으로 먹고 사는 악마적 정치체에 대한 무장 방어가 일단 정당하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그 방어의 모든 형태들이 무조건 정당할까요? 제 머리를 지금도 떠나지 않는 것은, 몇년 전에 발틱 공화국들의 하나인 라트비아에서 큰 문제로 부상된 "붉은 빨치산 바실리 코노노프" 사건이었습니다.

    빈농 출신의 바실리 코노노프(1923-2011: )는 어떻게 보면 "모범적 소련 사람"에 가까웠습니다. 피착취 계급 출신, 콤소몰(공산주의 청년동맹) 활동가, 제2차세계 대전 때에 14개의 파쇼군 수송열차를 직접 폭파시킨 우수한 빨치산, 전후의 내무부의 모범적 복무원…

    문제가 된 것은 1944년 5월 29일, 라트비아의 작은 마을 마지에 바트村에서 일어난 "양민 私刑 사건"이었습니다. 그 마을의 일부 주민들이 파쇼 점령군에게 그 전에 빨치산들을 넘겨준 적이 있었기에, 이에 대한 "처벌"로는 코노노프 휘하의 빨치산 소부대가 그 마을 사람 9명이나 죽였습니다.

    그 중의 4명은 생화장 당했으며, 생화장 당한 "친파쇼 분자" 중에서는 임신부까지 포함돼 있었습니다. 생화장 당한,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그 집과 함께 불에 타버린 여성들의 남편들은 비록 "친파쇼 활동"을 했다 해도 그 처자에 대한 이와 같은 행위가 정당했느냐 라는 것은 전시에도 얼마든지 제기될 수 있는 의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코노노프가 "우수 빨치산"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만큼 소련 시절에 그 사건에 대한 수사다운 수사는 없었고, 소련 망국 이후에는 독립이 된 라트비아에서 코노노프를 수사하고 재판했을 때에 그 재판에는 "빨갱이 마녀 사냥"이라든가, 러시아인인 코노노프를 겨냥한 라트비아 민족주의의 냄새는 좀 짙었습니다(모든 피해자들의 민족성분은 라트비아인이었습니다).

    코노노프에 대한 비난과 재판에 反러시아적 민족주의의 냄새가 짙었던 만큼, 러시아 안에서는 그에 대한 민족주의적인 무조건적 옹호 분위기도 매우 짙었습니다. 결국 "방어적 폭력의 한계" 차원에서 고찰돼야 할 역사적 사건은, 라트비아 민족주의와 러시아 민족주의의 싸움판이 되고 말았는데, 코노노프가 죽고 수사와 재판 등 이 사건이 이걸로 종결되고 난 이후인 지금에 와서는 민족주의 등을 넘어서 아주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해봐야겠어요. 반파쇼 저항이라는, 당연하게도 정당하게 보이는 경우라도 과연 방어적 폭력은 어디까지 정당할까요?

    폭력을 초월한 저항

    단도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반파쇼 저항이라 해도 폭력을 초월한 저항이야말로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파쇼 군인들의 대다수도, 빨치산들의 총살과 생화장을 당한 "그 마을" 사람들의 다수도 결국 노동자나 영세민, 중농, 빈농들이었는데, 파시즘이라는 기만적 이데올로기를 넘어 그들의 계급적인, 인간적인 양심에 호소하고 그들의 인식을 바꾸고 선의 편에 끌어들이는 것이야말로 최선이죠.

    문제는, 어릴 때부터 몸과 마음으로 익힌 온갖 국가주의적, 민족주의적 편견들이 그렇게 쉽게 머리에서 씻겨지느냐, 그 편견을 씻으려는 "우리 편"이 적의 군인들에게 그렇게 쉽게 접근할 수 있겠느냐죠.

    예컨대 박정희 시절에 미제의 보조적 용병으로 월남에 간 남한 군대의 경우를 생각해보시죠. 소련 아카이브에 남은 문서에 의하면 침략 전쟁의 부당성과 박정희 정권의 범죄성을 결국 인식하게 된 그 중의 몇 명이 결국 침략을 포기하고 북월 측에 항복하고 사죄를 하는 (나중에 북조선에 넘어가서 살았습니다) 등 용감한 "탈영"을 감행했지만, 다수의 "돌아온 김상사"들에게는 지금도 침략의 부당함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국민들에게 복지다운 복지도 한 번 해준 적이 없었던 박정희 정권도 이 정도로 충성스러운 "살인 기계"들을 생산할 수 있었다면, 종족적 독일인들에게 상당한 복지혜택을 준 히틀러에 대한 수많은 독일인들의 충성을 과연 선전만으로 깨기가 쉬웠겠어요? 그러니까 최선이라고 할 계급적 입장에서의 비폭력적인 선전선동은, 꼭 모든 상황에서는 현실적이지 않은 거죠.

    그렇다면, 남은 것은 무장저항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적으로는 무장저항의 경우에도 한 가지 계급적인, 인도주의적인 원칙은 지켜져야 합니다. 적의 편에 선 "군복을 입은 노동자, 농민, 영세민"들은 지금 비록 적의 이념적 헤게모니에 놀아나 무기를 들고 침략을 범한다 해도 그들이 그들의 인간성과 계급 성분 차원에서 언제나 "선의 편"도 될 수 있는 "잠재적 우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든 폭력은 본질적으로 ‘악’

    그리고 그들에 대한 폭력은 비록 불가피한 방어적 폭력이라 해도 어차피 그 본질상 악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 폭력을 가능한 한 아주 최소화시키고 무엇보다 적군의 "혁명화" 가능성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렇게 한다는 것은 최선은 아니더라도 (폭력은 그 본질상 어떤 경우에도 "최선"은 될 수 없죠) 적어도 어떤 경우에는 "차악"이랃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제는, 파쇼와 같이 무자비한 적을 이미 삼년이나 상대해온, 매일매일 죽음을 직시하고 적의 고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적의 잔혹성을 목격하면서 반대편에 대한 무서운 증오를 키운 코노노프의 빨치산들에게는 이미 이와 같은 계급론적인 "혁명적 의식화 위주의 반침략 전쟁 원칙"들이 다 망각되어진 것이었다는 거죠.

    "정당한 방어"라 해도, 전쟁의 와중에서는 양쪽이 닮아지는 부분은 분명히 있는 것이고, "정당한 방어"를 하는 이들이 침략자들의 악습을 부분적으로나마 얼마든지 익힐 수 있다는 것은 "코노노프 사건"이 보여준 비극적 진실입니다.

    비록 "선의 편"에 선 것이었다 해도, 3년 동안 파쇼 침략의 지옥에서 살아온 코노노프의 빨치산들은 이미 생화장을 당하는 임산부의 고통에 무감각해질 만큼 인간의 삶과 죽음, 고통에 둔감해진 부분은 있었던 거죠. 반침략 전쟁에서 정당 방어하는 쪽에도 얼마든지 "문제"가 일어날 수 있기에, 제일 좋은 것은 혁명을 통해서 애당초에 침략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부터 차단시키는 것입니다.

    하나의 혁명은 수 많은 전쟁들을 예방할 수 있으며 무수한 목숨들을 살려낼 수 있으며 "우리 편" 사람들의 전시 잔혹화를 미리 예방합니다. 혁명의 긍정적인 효능이 많은 만큼, 침략 전쟁을 예방할 수 있는 혁명을 일으킨다는 것은 정말로 지난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만큼 사람들을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전쟁기계인 자본주의 국가의 해체를 위한 노력을 쉬지 않고 많이 기울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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