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핵발전, 가장 비싸고 가장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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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03월 13일 09:4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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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동북부 대지진에 이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3월 11일로 꼭 한 해를 맞았다. 그런데 이 사고는 여전히 진행 중이어서, 언제 수습이 끝날지 일본 정부나 관할사인 동경전력도 장담을 못하고 있다.

    수습이란 결국 노심을 충분히 냉각시키고 핵연료를 분리시키거나 현 위치에서 안정화시키며 시설과 잔해에서 발생하는 방사능 유출을 최소화하여 관리하는 일련의 작업을 의미할 텐데 그것이 몇십 년이 걸릴지 알기 어렵다는 뜻이다.

       
      ▲처참한 모습의 후쿠시마 원전 모습. 

    몇십 년 걸릴지 모르는 수습

    핵발전은 원자핵을 연속적으로 쪼갠다는 핵폭탄과 동일한 원리로 이루어진 까닭에, 한번 반응이 시작된 핵발전소는 엄청난 에너지를 발생시키고 쉽게 멈춰 세우기도 어렵다. 때문에 핵발전은 다른 모든 발전 방식에 비해 거대 기술이며, 필연적으로 절멸적 위험성의 문제가 따른다.

    한번 사고가 터지면 교통사고나 다리 붕괴에 비할 바 없는 지속적이고 보편적인 피해가 발생한다. 이른바 핵발전 전문가들은 ‘1백만분의 1’이라는 확률을 즐겨 인용한다. 핵발전소에서 사고가 날 확률이 벼락 맞아 죽을 확률보다 낮으니 걱정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수치는 노심이 설계상 사고를 일으킬 확률이다.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더라도, 이 확률은 설계대로 제대로 시공이 되었을 때, 발전소를 구성하는 수십만 개의 부품이 제대로 작동했을 때, 각종 장치가 착오 없이 움직이고 종사자들이 착오 없이 운용했을 때,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설계 허용범위를 넘어서는 자연재해가 없었을 때, 그리고 테러나 전쟁 같은 외부 변수가 없었을 때 비로소 성립하는 수치다.

    이러한 경우가 모두 맞아떨어지는 게 오히려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현실은 핵발전이 상업적으로 시작된 지 60년이 안되어, 노심융해(melt down)에 이르고 인명이 상한 큰 사고만 해도 3회 이상, 후쿠시마의 4기를 포함하여 6기 이상이라는 전혀 다른 수치를 알려준다. 십년에 한 번 씩은 큰 사고가 있는 게 현실의 확률이라는 것이다.

    벼락 맞아죽을 확률보다 낮다고?

    인기 애니메이션 <심슨가족>의 배경이 되는 스프링필드라는 작은 마을은 그 한 가운데 커다란 핵발전소가 서 있고, 주인공 심슨도 핵발전소의 안전관리 노동자다. 극 중 적지않은 에피소드가 핵발전소 사고와 관련되어 있는데, 핵물질의 관리가 엉성하게 이루어지거나 이를 은폐하기 위한 뇌물 제공과 비리, 기형 물고기의 출현과 정치적 해결 시도 같은 장면들이다.

    여기서 노동자 심슨이 게으르다는 점은 본질이 아니다. 거대 위험기술인 핵발전이 유발하게 되는 장면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핵발전을 단지 기술의 문제로 보지 말고 여기에 관계된 사람들을 포함하여 보면 핵발전의 무서움은 더해진다.

    핵발전은 그 본성상 누군가의 성장과 편안을 위해 취약지역과 집단의 희생을 전제해야 하는 계급과 불평등의 문제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고압송전탑 건설 강행에 항의하며 밀양에서 분신하신 70대 농민의 비극은 건설 중인 신고리 1호기의 전기를 서울에까지 끌어오기 위한 계획 아래서 발생한 일이었다. 삼척과 영덕의 신규 핵발전소 부지나 경주 방폐장도 해당 지역 주민들의 의사나 이해와 전혀 무관하게 추진되었다.

    후쿠시마 사고 수습에 투입되는 노동자들도 실제 야쿠자가 일용 노동자들을 모집하여 많게는 8단계의 하청을 통해 고용하고 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이러한 다단계 하청 구조 속에서 십분의 일 밖에 안 되는 급여를 받으면서 안전 장구도 제대로 보급 받지 못하고 있다니, 야만적인 착취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후쿠시마 사고 수습하는 비정규직

    핵발전은 알려진 것과 달리 경제적이지도 않고, 기후변화 대안도 되지 못한다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진실이다. 이미 2006년 이후 세계적으로 건설 단가가 다른 발전원보다 비싼 것으로 나타나고 있고, 여기에 폐기물 처리와 사고 대응 비용, 기타 사회적 갈등 비용을 더하면 핵발전의 경제성은 형편없다.

    반면에 재생에너지의 설비용량과 종사자 수의 상승 추세는 크게 높아가고 있다. 우라늄 채굴과 정련, 농축, 사후 처리에 다량의 화석에너지가 이용될 뿐 아니라, 이용가능한 우라늄의 매장량도 몇 십 년 분에 불과함을 생각하면 핵에너지야말로 대안이 아님이 분명해진다.

    핵에너지와 에너지 다소비 산업이 중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할 때, 종종 언급되는 대안이 미국의 노동운동가 토니 마조치가 창안한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이라는 개념이다. 에너지 산업에서라면 핵에너지와 화석에너지 산업 종사자들을 재생에너지와 에너지 효율화 부문으로 전환하면서 여기에 필요한 기금과 직무 확보, 직업훈련을 관련 기업과 사회적 합의 속에서 해결한다는 것이다.

    정의로운 전환

    환경도 보전하면서 더 건강하고 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면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그림이 실현되기란 어려운 조건이 너무도 많을 것이다. 노사, 노정 간의 뿌리깊은 불신이 문제거니와, 노동자 내부의 동의 확보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1983년에 마이크 니콜스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던 <실크우드>는 환경과 일자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일단을 엿보게 한다.

    메릴 스트립이 열연한 실존 인물 캐런 실크우드는 오클라호마 크레센트의 커맥기(Kerr-McGee) 플루토늄 원료 공장의 노동자였다. 1974년에 사측에서는 노동조합을 파괴하려고 해산 투표를 추진하고, 대의원이 된 실크우드는 상급단체와 협력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이 와중에 방사능 위험 은폐와 피폭 의혹이 불거지고, 이를 이슈로 제기한 노동조합 측은 성공적으로 노조를 방어하게 된다.

    핵발전과 노동자 일자리

    그러나 투표가 끝난 후에도 계속 문제를 파헤치는 실크우드에게 동료 노동자들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계속 의혹을 제기하면 공장이 문을 닫게 되고, 그들의 일자리도 위험하게 될 거라는 주장이었다. 사측은 실크우드의 소지물에 방사성 물질을 끼워넣고, 피폭당한 실크우드는 지인들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고립된 채 유력 언론사에 마지막 제보를 하려 하지만 의문의 교통사고로 죽고 만다. 미국 사회운동의 격렬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사인은 결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실크우드는 한 극단적인 실화로 볼 수 있겠지만, 일자리 보장과 일자리와 작업장의 성격, 노동자들 사이의 이해와 인식, 노동조합의 역할이라는 쉽지 않게 연결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혼자서, 공장이나 업종을 따로 떼어서, 노동자의 이해 관계만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하다.

    * 이 글은 <주간 변혁산별> 153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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